시사, 상식

윤석열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道雨 2025. 3. 14. 09:30

윤석열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윤석열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건 내란범과 친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보여준 행태만으로도, 윤석열 일당에게 ‘개전의 정’은 없으며, 법정 최고형으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지지한 사람은 수백만이고, 우리는 그들과 같은 나라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친구 되기’는 무슨 ‘절친’이 되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신뢰를 공유한 대화 상대를 의미한다.

 

‘윤석열 지지자’는 일종의 은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 즉 ‘타자’다.

 

타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추상적 타자’와 ‘구체적 타자’.

추상적 타자는 환대의 대상이지만, 구체적 타자는 혐오스러운 존재다.

나는 지금 ‘구체적 타자’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2025년 3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유사 내전은, 구체적 타자를 배제하고, ‘우리’만의 정의, 부족적 진리만 동어 반복해온 결과다.

따라서 이 질문은 ‘우리’만이 아니라 ‘저들’ 곧 ‘윤석열 지지자’에게도 적용된다.

“당신은 윤석열을 반대하는 자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타자’라는 말에는 ‘환대’라는 말이 거의 자동적으로 따라붙곤 한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자크 데리다가 일찍이 문제화한 ‘절대적 환대’, 곧 사적 공간의 무조건적 개방이 실현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자리’, 즉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사람, 장소, 환대’)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요컨대 환대란, 타자의 공적 자리를 온전히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지지자’라는 타자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 예를 들어 난민, 이주민, 성소수자 등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약자·소수자에 대한 환대를 반대하는 주류 시민에 가깝다.

 

한편, 약자·소수자로 한정하더라도, 존재를 부인당한 타자의 공적 자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일은, 단지 법·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주류 시민의 일상에 낯선 형상·소리·냄새가 침범해오는 신체 경험이다.

환대라는 개념만으로는 이런 타자의 문제를 적절히 다루기 어렵다.

 

이때 타자는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이 말한 ‘현존’(presence)의 문제가 된다. 현존이란 쉽게 말해 ‘여기 함께 있음’, 즉 다른 이와 물리적으로 인접한 상태다.

현존은 수렵채집사회에서부터 존재해온 분배 원리이다. 그것은 숭고한 윤리적 책무 같은 것이 아니라, 출근길 만원 버스나 ‘밤늦게 술 취해 내 집에 들이닥친 동생 놈’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그러나 불편하고 짜증 나는 공존에 대한 현실적 의무다.

 

현존의 원리가 가진 장점은, 고결한 도덕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공간을 양보하거나 가볍게 목례를 하는 이유는, 그냥 그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환대가 윤리적 결단이라면, 현존은 일상에서 소소한 불편과 짜증을 견디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그 일상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일,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야말로 공존의 지름길이다.

 

바로 그런 일상 속에서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

 

미국의 흑인 음악가 대릴 데이비스는, 30년 동안 백인우월주의 테러조직 케이케이케이(KKK) 단원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와 친구가 된 200여명은 이후 조직을 탈퇴했다.

 

독일 저널리스트 바스티안 베르브너의 책 ‘혐오 없는 삶’에는, 네오나치와 좌파 펑크족이 ‘절친’이 되고, 난민 혐오자와 난민이 ‘후천적 가족’이 된 사연이 나온다.

그들의 우정은 대부분 엄청난 환대가 아니라, 위화감과 거북함을 참으며 상대의 말을 듣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사람도 세계도 그리 쉽게 바뀌지 않으며, ‘친구 되기’의 효과를 지나치게 기대하면 곤란하다.

분명한 건 깊은 접촉(deep contact), 풍부한 감정적 교류가 인간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찢긴 공동체는 치유될 수 있고, 더 나은 사회는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권력자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잔혹해져야 하고, 동료 시민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관대해져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적대적 집단의 충돌은 때로 몸서리치도록 끔찍한 학살(제노사이드)로 이어졌다.

부족주의가 극단화될 때, 인간이라는 종은 바닥을 드러내 가장 추악한 존재가 된다.

적대의 압력을 낮추는 일이 시급한 이유다.

 

 

 

박권일 | 미디어사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