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정치가 위기를 불렀다…개헌이 해법이 아닌 이유
떠나지 않는 의문 하나.
헌법을 지키지 않아서 헌정 문란이 왔는데, 그 헌법을 바꾸자고 하는 게 맞는 처방일까?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해서 생긴 혼란의 극복은, 그 헌법에 정해놓은 절차를 또박또박 밟아가면 된다.
위기의 일차적 원인은 헌법이 아니라 규범이다. 헌법을 권력의 수단으로 삼는 비민주적 규범과 태도가 문제다.
헌법 개정은 오래된 숙제다. 개정의 사유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국민적 호응의 분위기가 생기지 않는 까닭은, 위기의 원인과 해법 간 엇박자 때문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전 대표가 헌법과 관련해 ‘절제’를 말했다. 그는 “87년 체제는 위대했다. 정치 세력 간 절제와 자제가 뒷받침했다”라고 한 뒤 개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쪽에서는 29번 줄탄핵을, 다른 쪽에선 계엄을 꺼내면서 절제와 자제가 무너졌다. 체제를 바꿔야 한다.”
한 전 대표가 말하는 자제는 규범이고, 헌법은 제도다.
규범을 지키지 않아 사달이 났는데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 두가지 규범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가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고, 다른 하나가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이다.
자제는 입법부나 행정부가 자신들의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절제를 말한다.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이 각각 장악한 제도의 권한, 즉 행정권과 입법권을 행사함에 있어 자제하지 않아 우리 민주주의를 해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둘 다 잘못했다.
그러나 비상계엄과 이른바 줄탄핵이 동급의 잘못으로 취급될 순 없다. 불법과 남용은 차원이 다르다.
상호 관용은 정당이 상대 정당을 무찔러야 하는 적이 아니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존중이다. 상대 정당, 상대 후보가 집권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 정권을 잃어도 나의 생존이 위태로워지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그런 점에서 자제와 관용 중에서 관용이 더 선차적이고 중요하다. 상대를 존중하게 되면 절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전 대표는 두가지 규범 중에서 콕 짚어 자제만 말하고 관용을 말하지 않는다. ‘반 이재명’을 통해 배신자 프레임을 돌파하려는 의도 때문으로 짐작된다.
정치학자 필립 슈미터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제도화에는 두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민주화다.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헌법화다. 헌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전자가 참여-대표-책임성의 구조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실천과 상호작용을 통해 해당 사회의 현실에 상응하는 갈등의 표출-집약-조정-정책화의 패턴을 만들어 가는 제도화의 방식을 중시한다면, 후자는 정치 밖에서 정치의 행위자나 시민 모두가 따라야 할 규범과 규칙을 만들어 부과하는 제도의 방식을 중시한다.”(최장집, ‘민주주의와 헌정주의: 미국과 한국’)
계엄-탄핵을 떠나 한국 민주주의의 진화를 위해 헌법 개정은 당연히 필요하다. 1987년 헌법을 개정할 때에 비해 사회가 달라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 시대 조응의 차원에서 헌법 개정은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최근 혐오 민주주의로 불리는 수준으로까지 퇴행한 원인을 헌법에서만 찾는 것은, 지적 게으름이자 의도적 비틀기다.
개헌 이유, 즉 헌법의 불완전성이 문제라면, 헌법을 열심히 지켰음에도 결과적으로 위기가 생겨나야 맞다. 그런데 반복하지만, 헌법을 지키지 않아서 위기가 발생했다. 따라서 초점은 헌법이 아니라 헌법 준수 여부다.
엄밀히 따지면 지금 우리는 있는 헌법도 제대로 구현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흔히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알려진 헌법 119조의 2항을 우리가 지금 온전히 실천하고 있나? 헌법 제11조 1항, 즉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조항이 유보나 차별 없이 적용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 12조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수사 과정에서 제대로 보장되고 있나?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5년 단임을 4년 중임으로 바꾸고, 대선과 총선 시기를 일치시키자고 한다. 그런데 대선과 총선을 같이 치르면,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총선에서도 이길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 정당이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을 동시에 장악하게 되면 그만큼 대통령의 힘이 세진다. 나눔이 아니라 모음이다.
미국의 예가 증명하듯, 4년 중임이라고 해서 대통령이 권한을 민주적으로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행정부와 입법부 간 대립이 위기의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는 대통령제의 태생적 한계다. 분점 정부는 대통령제의 ‘노멀’이다. 이게 문제라면 내각제, 학계의 용어로는 의회제로 정부 형태를 바꿔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제를 내각제로 바꾸려면, 국민적 차원의 깊고 오랜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이런 숙의가 불가능하다.
대통령이 헌법기관인 국회·선관위를 군대로 장악하려 해도, 지지자들이 헌법기관인 법원을 공격하는 폭동을 일으켜도, 소속 의원이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를 때려 부수자고 선동해도, 질타는커녕 옹호하고 편드는 세력이 개헌을 말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못난 정치가 위기를 불렀다.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장인 정치가 온전히 작동하지 않고, 크게 보면 그 정치의 기능 부전이 지금의 헌법 위기를 낳았다.
그렇다면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위기 극복의 본령이다.
헌법화가 아니라 민주화가 바른 해법이다.
헌법이 아무리 좋아도 정치가 좋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헌법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충분하고, 더 이상 미루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의 위기를 헌법 개정으로 해소하려 해선 안 된다.
두개는 별개다.
헌법 개정에 답을 찾는 태도는, 정치가 아닌 방법으로, 정치 밖의 외부적 개입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말하는 ‘헌법적 강경책’(constitutional hardball)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규칙에 따르지만 끝까지 밀어붙이고, 영혼까지 갈아 넣는 것이다. 법적으로 주어진 권한을 마음껏 사용해 상대를 최대한 압박하는 행태를 말한다. 과반의석을 가진 야당이 대통령을 옥죄기 위해 국회의 탄핵권을 남용하는 경우, 대통령이 자신과 가족의 사법 리스크 방어를 위해 거부권을 남용하는 경우 모두 헌법적 강경책이다.
대통령 권력은 막강하다. 그 막강한 힘을 사용해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침해할 수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의 막대한 권한을 ‘헌법적 공성 망치’라고 불렀으랴. 그 망치를 함부로 휘두르면 민주주의의 성채가 무너진다.
의회와 대립하던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은, 1992년 4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무효로 한 후,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의회도 못지않은 공성 무기를 갖고 있다.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탄핵권이다. 탄핵은 “선출된 지도자의 힘을 약화시키고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당파적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파라과이 의회는 2012년 6월 느닷없이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을 탄핵해 쫓아내 버렸다.
헌법적 강경책을 쓰면 누가 이기고 누가 지든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보다 절실한 과제는 정치 바로 세우기다. 좋은 정치가 답이다.
평생을 민주주의 연구에 바친 정치학자 최장집의 20년 전 충고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주의가 퇴락의 경로가 아닌, 다시 좋아지는 경로로 나아가기 위해 강조되어야 할 문제 역시, 제도가 아니라 좋은 정치의 중요성이다. 좋은 제도를 디자인하는 것도, 있는 제도를 효과적으로 작동시키는 능력도 좋은 정치의 함수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좋은 정치가 구현되지 못할 때 무용지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헌법의 문제는 곧 민주주의의 문제이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정치의 문제로 집약된다.”
[ 이철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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