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산산이 조각날 ‘법의 권위’

道雨 2025. 4. 1. 11:13

산산이 조각날 ‘법의 권위’

 

 

 

출발 시각이 지났는데 기차는 떠날 생각을 않고 안개만 더욱 짙어지는 느낌이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선고가 늦어지면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법조계와 정치권을 떠돈다.

 

서울의 어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열흘 전쯤 문형배 권한대행이 평의를 종결하고 결론을 내자고 했는데, 어느 보수 재판관이 그렇게 하면 직을 사퇴하겠다고 강하게 반발했다는 얘기가 교수들 사이에 돈다”고 말했다.

헌법을 전공한 변호사는 “탄핵 인용을 주장하는 ㄱ 재판관에 맞서, ㄴ 재판관이 논리 싸움을 위해 기각 결정문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동료 변호사가 하더라. 이런 믿기 힘든 얘기가 법조인들 사이에 떠돈다는 사실 자체가 심각한 일”이라고 말했다.

 

 

헌재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순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헌법재판소뿐 아니라 ‘법의 권위’ 자체가 국민 신뢰를 잃고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명령을 받고 행동한 군 지휘관들은 감옥에 있는데, 그 대통령은 풀려나 한남동 관저에서 편안히 상황을 지켜보는 현실이 법치(法治)가 무너졌다는 상징적 징표다.

 

윤석열 대통령 석방엔 즉시항고를 포기했던 검찰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겐 별것도 아닌 건으로 소환 조사를 하겠다고 나선다.

보수논객 정규재씨 말마따나, 대선에서 진 낙선자를 선거법으로 옭아매겠다는 건 도를 넘은 횡포다. 더구나 1심과 2심 판결이 정반대로 나오면서, 검찰과 법원 신뢰는 진보·보수 양쪽에서 모두 땅에 떨어졌다.

여기에 윤 대통령 탄핵 심리가 끝난 지 한달이 넘도록 최종 결정을 미루는 헌재 행태가 국민의 불신에 기름을 붓고 있다.

 

 

애초에 헌재가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거라 기대했던 게 착각이다. “윤 대통령의 헌법 위반은 너무 명백해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보다 쉽게 결론이 날 것”이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탄핵 기각 결정문을 쓰는 건 법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론은 8 대 0 파면밖엔 없다”는 헌법학자들 전망은, 법의 본질을 간과한 순진한 생각이었다.

 

‘법은 지배계급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법이 무도한 권력자를 위해 봉사하며 기상천외한 논리를 전개한 사례를 우리는 이미 숱하게 겪었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등 12·12 군사반란 주동자를 불기소하면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친 게 검찰이란 법 기술자 집단이다.

그러니 30년 뒤에 “실패한 내란은 통치행위이지 내란이 아니다”라고 판결한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법은 정치를 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국민 마음을 얻는 게 전부다”라는 유명한 말은 바로 이 점을 꿰뚫고 있다. 링컨은 노예제를 합법화한 연방대법원 판례에도 불구하고, 다수 국민이 노예제에 찬성하지 않으면 노예제는 사라질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마음(민심)이 전부다. 국민의 마음을 얻으면, 못할 게 없다. 이걸 잃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고로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법을 제정하거나 판결을 내리는 자보다 더 중요하다.”(Public sentiment is everything. With public sentiment, nothing can fail, without it nothing can succeed. Consequently he who molds public sentiment goes deeper than he who enacts statutes or pronounces decisions.)

 

 

기로에 선 헌법재판관들이 지금 마음에 새겨야 할 건 이것이다.

법의 권위는 헌법에 기초하지만, 헌법에서 유래한 건 아니다. 결국 국민에게서 나온다.

법을 만드는 건 국민의 대표자가 모인 국회이고, 최고법인 헌법의 제·개정 역시 국회와 국민의 직접 투표로 이뤄진다.

 

유혈 참극이 벌어질 뻔했던 12·3 계엄을 막은 건 검사도 판사도 아니다. 그날 밤 여의도 국회를 에워싼 시민과 국회의원들이었음을 헌법재판관들은 기억해야 한다.

국민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은 사실을 잊고서 자신을 최후의 심판자로 착각하는 순간, 법의 권위는 거대한 저항에 부닥치며 산산조각이 나버릴 수 있다.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은 옥중 의견서에서 “대통령님께 묻고 싶다. 그날 밤 정녕 저에게 의사당의 국회의원들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한 적이 없으신가. 대통령님은 지시를 따른 군인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고 절규했다.

 

그런 비겁한 최고통수권자를 옹호한다면, 대한민국에서 헌법을 수호한다는 기구는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박찬수 | 대기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