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내전’ 몰아넣은 윤석열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이 2년11개월로 짧았으나, 한국 사회 곳곳을 1980년대로 후퇴시켰다.
이는 필자의 자의적 판단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신망을 받고 있는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올해 3월 발표한 ‘2025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에서 ‘선거민주주의’로 한 단계 강등시켰다.
선거 같은 민주주의 제도는 갖추고 있으나, 민주주의 기본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자유민주주의로 분류되기 위해선,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균형, 법 앞의 평등, 시민적 자유 존중, 입법부·사법부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 연구소는 각 나라를 폐쇄적 독재-선거독재-선거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 4단계로 분류한다.
한국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선거독재에서, 1987년 민주화에 힘입어 선거민주주의로 올라섰으며, 19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자유민주주의 단계에 진입했다.
우리가 선거민주주의 단계로 퇴보한 것은 32년 만에 처음이다.
입만 열면 자유를 외치던 대통령이 집권했는데, 정작 정치체제에서 ‘자유’가 떼어진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상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를 이렇게 단기간에 퇴보시킨 지도자는 여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윤석열의 검사통치는 예외적이었다.
윤석열이 남긴 가장 큰 폐해는, 나라를 사실상 ‘총성 없는 내전’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정치 양극화 현상이 심각했는데, 윤석열은 이를 극단적 수준으로까지 악화시켰다. 12·3 사태 이후 4개월간 탄핵 정국에서 벌어진 분열 양상은, 이념적 적대감으로 정치 테러가 난무했던 해방 공간 이후 가장 심각한 수준이 아닐까 싶다. 2016~2017년 박근혜 탄핵 때도 태극기 부대가 극성을 부렸으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때와 다른 건 대통령이 고의적인 허위정보와 음모론을 유포해 극우세력을 선동하고, 여기에 집권여당이 동조하고 나선 점이다.
게다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검찰·관료·종교·언론·법원·학계 내 수구세력이,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집단적 공모’ 현상까지 벌어졌다.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 장치가 마련돼 있어서 웬만해서는 내부적으로 무너지지 않으나, 이렇게 최고권력자와 집권세력이 의도적으로 파괴하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윤석열은 지금까지 해온 것도 모자란지 아직도 분열 책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훼손된 민주주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
여러 과제가 있지만, 극단적 정치 분열과 허위정보·음모론 유포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현대 사회에서 정치 양극화와 허위정보가 극심해지면 독재화가 진행된다고 진단했다. 헝가리·인도·페루 등 독재화한 나라들이 이런 패턴을 보였다. 한국도 이런 이유로 2년 연속 ‘독재화 진행국’으로 분류됐다.
남미의 칠레와 브라질에서 배워야 한다.
칠레는 20세기 중반까지 ‘남미의 영국’으로 불릴 만큼 유서 깊은 민주주의 나라였다. ‘칠레 와인 한병으로 해결될 수 없는 논쟁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타협의 정치가 이뤄졌다. 그러나 1960년대 냉전과 경제 불황 여파로 좌우파 정당 간 극단적 정치 분열 현상이 나타났다. 좌파는 우파를 ‘파시스트’라 하고, 우파는 좌파를 ‘전체주의’라 비난하는 지경이었다.
정국 불안의 틈을 타 1973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150년 역사의 칠레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말았다.
17년 이어진 군부독재를 겪고서야 정치인들은 정신을 차렸다. 기독민주당·사회당 등 20개 정당이 ‘민주주의 연합’을 구성했다. 이 연합은 독재를 물리치고, 이후 20년간 공동정권을 운영했다.
또한 ‘합의 민주주의’라 불리는 협력 규범을 마련했는데, 예컨대 대통령은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기 전 모든 정당의 지도자를 만나 협의를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 연합은 칠레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회복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브라질의 경우, 극우 유튜버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집권 시절, 정권 차원에서 허위정보와 음모론을 유포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22년 대선 전후로, 사법부와 선거관리위원회 중심으로 대대적인 허위정보와의 전쟁을 벌였다. 최근 브라질이 민주주의로 유턴한 데는, 허위정보에 대한 적극 대응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칠레와 브라질은 혹독한 독재 트라우마를 겪고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이번 내란 사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윤석열보다 ‘더 센 독재자’가 출현해, 훨씬 더 파괴적인 현실을 마주할 수 있다.
김용현·노상원 등 군 장성 출신들의 행태를 봤을 때, 또 다른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정치인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
박현
논설위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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