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한국의 국보 "그가 있어 행복했네"

道雨 2008. 9. 3. 17:48

 

한국의 국보 "그가 있어 행복했네"

보존과학 개척자 이상수 선생 10주기 자료집 발간

 

보물 903호는 개인이 소장한 고려시대 청자 일종인 청자상감매조죽문매병(靑磁象嵌梅鳥竹文梅甁)이다. 높이 38.9㎝에 아가리 지름 5.1㎝, 밑지름 15.6㎝인 이 청자 매병은 매화(梅)와 새(鳥), 그리고 대나무(竹) 도안을 상감기법으로 넣은 명품으로 꼽혀 1986년 11월29일에 보물로 격상했다.

 

 

 

 

 

하지만 이것이 조각난 것을 정교하게 붙인 조립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관리소홀로 그만 깨지고 말았다. 그렇게 박살난 20여개 조각을 하나하나 이어붙인 끝에 원래 모습을 되찾아 문화재로까지 지정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고고관 신라실을 장식하는 유물 중 하나로 국보 91호 기마인물형토기가 있다. 국사 교과서와 같은 데 너무 자주 등장해 이제는 식상함도 주지만, 이 또한 조립품이다. 식민지시대 경주에서 출토된 이 토기는 그 아름다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발견 당시에 이미 40여개 조각으로 뭉개져 있던 것을 발견 직후에 접착제를 이용해 복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접착제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1978년 국립박물관에서 다시 손을 댔다. 이 토기 역시 정말로 현미경을 대서 보지 않고는 조각을 붙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1993년 한국은 부여에서 날아든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곳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시대 휘황찬란한 이른바 금동대향로가 출현한 것이다. 이 향로는 발견 직후에 이미 백제의 마스코트로 등장했다. 하지만 향로가 그렇게 대접받기까지 한 보존과학자의 눈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국 문화유산계에서는 이미 타계한 지 10년이나 된 이상수(李相洙.1946-1998) 선생을 여전히 '문화재 보존수복의 1인자' 혹은 '마이더스의 손'이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만큼 그가 문화재보존과학 분야에 남긴 업적은 혁혁하다.

청자매병을 깜쪽같이 복원한 이도, 기마인물형토기를 다시 조립한 이도, 백제금동대향로에 다시금 금빛을 발하게 한 이도 이상수 선생이다.

그의 선배로 한때 국립박물관에서 보존과학이라는 같은 솥밭을 먹던 이오희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는 70년대 박물관 보존과학실 풍경의 한 단면을 이렇게 전한다.

"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그 많은 유물의 보존처리가 시급하다고 생각한 당시 최순우 관장이 나는 일본으로, 그리고 이상수 씨는 대만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 도쿄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금속유물 보존처리 기술을 배웠고 이 선생은 대만고궁박물관에서 도자기 보존처리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직책은 물론이고 자리도 없었습니다. 마침 고고부가 유물정리실로 사용하려던 사무실 공간이 있기에 이를 강제로 '접수'해 각자 책상과 짐을 풀어 놓았습니다. 고고부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이렇게 해서 박물관에서 보존처리실이 탄생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처음으로 보존처리한 유물은 이 교수 회고에 의하면 서울 삼양동 출토 금동보살입상(국보 127호).

하지만 당시에는 변변한 보존처리기술 장비가 없어 이 불상에서 녹을 제거하는 데 이쑤시개를 사용했다고 한다.

현 경주대 문화재학부 안병찬 교수가 문화재 보존과학 분야를 지망해 박물관에 배치되어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7월. 당시 첫 인상을 안 교수는 "검고 큰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에서 나오는 광채는 남을 압도하는 그 무엇인가 있어 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기억한다. 실제 업무 스타일 또한 그래서 안 교수는 호된 훈련을 받았다고 말한다.

첫 만남에서 이상수 선생은 안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내 밑에서 그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겠는가?"
서울 궁정동에서 태어난 이상수 선생은 1965년 2월2일 용산공고 토목과를 졸업하고 71년 5월1일에 당시 덕수궁 안에 있던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실에 발을 디딤으로써 박물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98년 6월1일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하기까지 그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난 문화재는 어림잡아 6천여 건이라 하니, 연평균 400여 점에 이르는 문화재를 '수술'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 셈이다.

요컨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문화재가 없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비단 이뿐만 아니라 1970년대말 전남 강진 운용리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고려시대 청자가마 2기가 저수지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이상수 선생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5년 동안 이들 유적을 이전 복원하기도 했다. 지금에는 흔한 유적 이전 복원이 한국에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10주기를 맞아 안병찬 교수가 '이상수 선생 자료집 문화재 보존수복의 개척자'(한림원출판사)를 최근 정리해 냈다. 이오희 교수가 '추모의 글'을 부치고, 고인이 남긴 수고(手稿)를 중심으로 자료집을 엮었다.

228쪽에 지나지 않는 자료집이 언뜻 초라해 보일 수는 있지만, 그가 한국 문화재 보존과학에 남긴 족적은 활화산과 같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08.9.2>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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