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목조미륵반가상, 원래는 한국인 얼굴`
일본국보 비밀캐는 이윤옥 교수
일본의 국보 1호인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이하 미륵상)의 본래 얼굴은 한국의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하 반가상)의 호상과 비슷한 한국인이었습니다."
이윤옥(50)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는 17일 "일본 광륭사의 미륵상이 100여 년 전 일본 메이지 시대 때 수리됐고 '고치기 전에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다'는 언급이 일본과 한국의 미술 전문가 저서에 각각 나온다"며 "일본이 이런 사실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일본 여자미술대학 나가이 신이치 교수가 1976년 '역사공론' 6월호에 기고한 '아스카불(佛)에 보이는 일본과 조선'이라는 논문에서 "명치시대 미륵상의 얼굴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일본인이 만든 얼굴이라기보다 조선인의 얼굴이자 조선의 불상"이며 "(나중에)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인의 얼굴로 태어났다"고 기술했다고 전했다. 신이치 교수는 또 2006년 '일본·미술탐색'이라는 책에서 재차 서술했다.
이 교수는 또 일본 NHK가 1977년 2월 '미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교양 프로그램에서 방송된 수리 이전의 미륵상 사진을 제시하며 "뺨 부분이 도톰한 게 역력한 한국인 모습이고, 굳이 얼굴을 뜯어고쳐야 할 까닭이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도쿄대학 출신의 한국인 황수영 씨가 쓴 '반가사유상, 대원사'라는 책에도 미륵상이 반가상의 얼굴과 비슷했으나 수리 후 인상이 달라졌다는 대목이 있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그는 "문화유산을 원형대로 보존해야 하는게 원칙이며, 부득이 보수하더라도 원형에 가깝게 해야 한다"며 "일본 광륭사는 미륵상의 '성형' 사실을 숨기지 말아야 하며, 한국인들도 일본에 관광을 가더라도 무조건 찬탄할 것만 아니라 사실을 제대로 알고 감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국내의 누리꾼들도 미륵상이 반가상을 닮았다는 것만 알릴 게 아니라 수리 전에는 얼굴도 비슷했다는 점도 부각해 퍼뜨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별도로 임진왜란 때 조선인의 코를 배어가 일본 교토 인근에 묻은 무덤의 이름이 잔혹함을 누그러뜨리고자 '귀무덤(耳塚)'이라고 했다가 최근 사학자들의 지적에 따라 안내문에 '코무덤'이라는 뜻인 '비총(鼻塚)'을 괄호안에 넣어 '耳塚(鼻塚)'으로 표기됐다고 이 교수는 소개했다.
하지만 현지 코무덤의 흙을 떠와 경남 사천시에 세운 위령비에는 여전히 '이총'이라고 표기돼 있다고 지적하며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만 이는 역사를 정확히 알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사진 제공 이윤옥 교수 2009.9.18>
일본의 목조미륵반가상
<일본 국보 1호> 일본'광륜사(고류사)'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이 불상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선물로 보내다. 시간이 없어서 나무로 만들어 보내다.
-코벨 박사가 본 일본 '고류사(광륭사=廣隆寺) 불상' -
서양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일본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고 20여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던 존 카터 코벨은 '고류사' 미륵불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안치된 <고류사>는 603년 한국에서 이주해 온 직물기술자 진하승(秦何勝)이 건립한 절이다.
그는 한국계 혈통을 지닌 '쇼토쿠 태자'와 절친한 사이였다.
쇼토쿠 태자가 48세에 홍역으로 급사하자 하타노는 자신이 세운 절인 고류사에 자신이 존경했던 쇼토쿠 태자를 기리려는 미륵보살상을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의 장인은 시일이 촉박하여 청동으로 주조하는 대신 적송 통나무 하나에서 걸작 미륵보살상을 깎아내고 그 위에 금을 입혔고, 그 불상이 '목조미륵반가사유상' 이다.
봄에 서거한 태자를 기린 금부처가 7월(623년)에 도착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 불상의 일본 도착 시기도 알 수 있다.”
광륭사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 출가 이전의 이러한 태자 모습은 중생 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실존철학자인 독일의 야스퍼스(1883-1969)는
이 불상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이 불상이 신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초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고대 기록에 전해지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이 한결같이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일부 학자가 이 불상이
"신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 90Cm)"이 바로 고류사의 목조 신라불상과 똑같은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어 현재는 삼국 시대의 것으로만 되어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의 이 신라 목조 불상이 일본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의 목조 불상의 특징인 것이다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이윤옥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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