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사찰 관련

사찰, 다음은 당신 차례

道雨 2010. 9. 8. 11:38

 

 

 

          사찰, 다음은 당신 차례
 
» 김의겸 정치부문 선임기자
 
 
1998년 어느 겨울날,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529호실 문을 망치와 장도리로 뜯고 들어가 한 움큼의 서류뭉치를 들고 나와서는 ‘국정원의 정치사찰 증거’라고 외쳤다.
529호실이 국정원의 단순연락사무실이라는 해명도 있었고, 문건 내용도 국회 주변에서 떠돌던 풍문 수준이었지만 정국은 꽁꽁 얼어붙었다.

 

당시 점잖기만 하던 한나라당 의원들을 투사로 단련시킨 조련사가 이재오 의원이다. 그는 초선인데도, 특유의 쇳소리로 “독재정권의 정치사찰에 맞서 싸우자”며, 선배 의원들을 다그쳤다. 그 덕에 의원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외칠 줄 알게 됐으며, 한나라당은 ‘만년 여당’에서 ‘선명 야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하지만 요즘 남경필·정두언·정태근 ‘3인방’의 사찰 문제를 대하는 이재오 특임장관의 태도는 세월의 격차만큼이나 달라졌다. 사찰에 대한 분노와 결기는 사라지고, 말다툼한 친구들 화해시키듯 조용하고 원만한 중재를 강조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이다.

 

 

홍사덕 의원은 한술 더 뜬다. 지난 1일 한나라당 회의에서 사찰 문제를 “당사자끼리 해결할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친박 의원 3명이 사찰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의미심장한 호소를 해왔고 자신이 깔끔하게 해결해주었음을 강조했다.

이런 부탁을 할 때 친박 의원들이 했다는 말이 “당에 누가 되지 않게 해달라”였다고 한다. “소문나지 않게 해결해 달라”는 말의 완곡어법으로 들린다.

어떤 문제였는지, 어떻게 해결했다는 건지길이 없다. 그러나 정보기관이 “우리가 잘못 짚었다”고 순순히 물러났을 리는 없고, 뭔가 약점을 인정받고 덮어주지 않았을까?

그러면 그다음은? ㅇ, ㅎ, ㅈ, 알려진 이 의원들의 정치행보가 앞으로 어떨지 자못 궁금해진다. 정보기관으로서는 민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찰의 효과는 충분히 본 셈일 것이다.

 

중진 의원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초·재선 의원들마저 침묵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어 보인다. 이들이 입을 닫는 심리도 다양하다. “난 친박이 아니니까”, “난 형님에 맞서 권력투쟁을 하지 않는데”, “뭔가 구린 데가 있겠지 뭐. 하지만 난 깨끗해” 하며 다들 넘어간다. 심지어 “거들어주면 정두언·정태근만 키워주는 거 아냐”라고 이유를 대는 의원도 있다고 한다.

 

 

야당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하다. 강 건너 불구경이고, 외려 한나라당 집안싸움이라고 즐기는 듯도 하다.

하지만 최근 나온 <김대중 자서전>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71년 공화당 4인방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어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야당 의원들과 함께 통과시켜 버렸다. 박 대통령은 펄펄 뛰었고, 결국 김성곤 의원은 특유의 카이저수염이 뜯겨나갔고, 길재호 의원은 초주검이 되었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뒷짐을 지고 있을 때 김대중 의원은 “공화당의 내분쯤으로 여기고 방관할 일이 아니다. 법과 질서를 능멸하는 패륜적 몽둥이질이 언제 야당으로 닥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라고 절규했다. 실제로 그 뒤 야당 의원들도 통닭구이 등 갖은 고문을 당했고, 마침내 박정희는 유신독재로 나갔다.

 

 

독일 나치 정권에서 집단수용소에 갇혔던 목사 마르틴 니묄러의 시가 있다.

요약하면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므로, 유대인이 아니므로,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매번 침묵했다. 그런데 그다음 ‘숙청’이 내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 시의 제목이 “침묵하면 다음은 당신 차례다”이다.





김의겸 정치부문 선임기자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