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폐허에 '희망꽃' 피운 위트컴을 기리며...
당시 미군군수기지사령관, 부산역 앞 대화재 구호 등 앞장
![]() | |
- 본지-스토리텔링협 재조명
1953년 11월 27일 오후 8시30분 발화한 부산역전 대화재는 6·25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딛고 재건을 일구려는 부산 시민의 희망을 삼켜버렸다.
부산 중구 영주동 산비탈 피란민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은, 당시 부산의 번화가였던 40계단, 동광동, 부산역(당시 중앙동 소재) 등지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2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집을 잃은 6,000여 세대 3만 명의 이재민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만 했다.
리차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1894~1982·사진) 부산 미군군수기지사령관(준장)이 미군 창고를 열어 이들에게 잠을 잘 천막과 먹을 것을 나눠줬다.
위트컴 장군이 쳐준 천막에서 생활한 이종철(65) 씨는 18일 "천막촌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꿈을 키워 대학교수가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이처럼 위트컴 장군의 은혜를 입은 부산 시민들이 공덕비를 세웠으나, 안타깝게도 위트컴 공덕비는 사진만 있을 뿐 비석 존재 여부와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 | |
* 1954년 '라이프'에 소개된 한복 차림의 위트컴 장군. |
위트컴 장군은 부산대 장전캠퍼스 부지 165만 ㎡(50만 평)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메리놀병원 신축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국제신문이 국가기록원에 요청해 입수한 위트컴 장군에 관한 자료를 보면, 그는 1954년 11월 24일 테일러 우드 주한 미8군 사령관에게 공문을 보내, 부산역전 대화재 이후, 부산에서 병원 건립(7개국 17만 달러 추가 지원)을 포함해, 191개 대한미군원조처(AFAK) 프로젝트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부족한 병원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런 복장을 하고 거리 캠페인을 벌일 만큼 그는 부산 재건에 헌신했다.
그는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미군 32명 중 유일한 장성이다.
이제 부산이 전쟁 폐허 속에서 '희망 꽃'을 피운 위트컴 장군을 기억해야 할 때다.
국제신문과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는 위트컴 장군의 선행을 재조명한다.
* 지난 현충일에 집사람과 며느리, 손녀들 데리고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호주의 휴머스턴 대위 부부와 우리나라 홍옥봉 일병 부부의 합장묘에 국화꽃을 헌화하고 왔는데, 다음에 갈 때는 미국의 위트컴 장군의 묘석도 찾아봐야겠다.
*********************************************************************************************************
<상> 속속 드러나는 선행
체면도 버리고 갓 쓴 한복차림 시내 돌며 병원 건립기금 모금
![]() | |
1954년 7월 29일 부산 메리놀병원 신축 기공식이 위트컴(앞줄 왼쪽 세번째) 장군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클리프 씨·용두산공원 부산타워 제공 |
- 후원 손길 필요한 고아원 등, 예하부대와 결연 맺어 지원
- 전쟁 후 질병앓는 이들 위해 병원 세우는 데 가장 적극적
- "그의 헌신적 노력 없었다면, 부산 재건은 훨씬 더뎠을 것"
리차드 위트컴 부산 미군군수기지(Pusan Military Post·PMP) 사령관(준장)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음을 입증하는 선행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위트컴 장군을 재조명하는 데 앞장선 김재호 부산대 문화콘텐츠개발원장(전자전기공학부 교수)과 강석환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대표는 18일 "전후 복구로 혼란스러웠던 1953, 1954년 그가 부산에 근무한 것 자체가 부산으로 봐서는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했다.
위트컴 장군은 주어진 대한미군원조처(AFAK) 기금을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차원을 넘어 부산 시민을 위한 일을 발 벗고 찾아다녔다. 기금이 부족하면 그는 예하 부대원의 월급 1%를 병원 신축 기금으로 헌금하도록 하는가 하면 도움이 필요한 부산지역 기관과 미군 부대 간 후원 결연 등 갖은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갓 쓰고 이벤트…조산소 설치
위트컴 장군은 1954년 영도구 피란민촌에 산원(産院·조산소)을 설치했다. 그해 5월 피란민촌을 둘러보던 그는 배부른 산모가 보리밭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같이 지시했다. 피란민촌의 7, 8세대 40여 명의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천막 안에서는 아기를 낳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부산 영도구청 '신문으로 본 영도의 발자취').
병원 건립 기금이 모자라자 그는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부산 시내를 활보했다. 병원 건립 기금 모금 행사를 홍보하고 부산 시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미국 격주간지 '라이프' 1954년 10월 25일 자). 그는 부산 시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사령관으로서 체면을 구기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후원의 손길이 필요한 부산지역 기관과 88개 예하 부대가 자매결연을 하고 체계적으로 후원하도록 했다. 부대 규모가 크면 두 개 이상의 기관을 후원하도록 했다. 특히 그는 예하 부대원에게 "부산지역 기관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안 입는 옷, 선물, 돈, 기타 물품을 기부하라"고 지시했다고 미국 '성조지'(Stars and Stripes·1954년 1월 13일 자)가 보도했다.
■전후 복구 프로젝트
1953년 7월 6·25전쟁 휴전 이후 전후 복구를 위한 AFAK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그해 11월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속도를 냈다. 위트컴 장군이 191개 AFAK 사업을 진행했다. 그는 화재 복구를 위해 한미재단으로부터 1만5000달러의 지원을 받아냈다.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위트컴 장군이 수행한 주요 AFAK 사업을 보면
▷ 메리놀·침례·성분도·복음·독일적십자병원 등 병원 건립 지원
▷ 이재민을 위한 후생주택 건립(영도 208동, 동래 210동 등)
▷ 보육원과 요양원 건립
▷ 국제시장과 메리놀병원 주변 도로 개설 등이다.
그는 전쟁 이후 각종 질병에 노출된 아픈 이를 위한 병원 건립에 가장 주력했다. 덕분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부산 지역 의료시설은 전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석환 대표는 "위트컴 장군의 헌신적인 전후 복구 노력이 없었더라면 부산의 재건은 훨씬 더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은 1950년 착공됐지만 위트컴 장군이 완공했다. 그는 자신이 마무리한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영원한 부산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신문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공동기획
'뉴스자료, 기사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년 여름 대한민국을 향해 달려오는 행성 (0) | 2012.06.20 |
---|---|
주택용에만 6단계 누진제...전기 요금 인상 전에 체계부터 고쳐야 (0) | 2012.06.20 |
“대기업 전기요금 할인으로 한전 7792억원 손실” (0) | 2012.06.19 |
한국 의료 공공성에 대한 배신 (0) | 2012.06.18 |
학림사건 피해자 31년만에 무죄 확정 (0) | 2012.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