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교과서의 추억
초등학교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8대(1972~1978) 대통령이라는데, 손가락으로 아무리 꼽아봐도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뿐인데, 그러면 3대지, 왜 8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손 들어 선생님께 여쭤보니, “좋은 질문”이라며 한참 설명하셨는데, 그래도 이해가 안 됐다.
5·16은 ‘혁명’이었고, 복도 계단 옆에 붙은 학습용 판에는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제목 아래, 영국 마그나카르타에서 시작한 민주주의가 한국에선 4·19, 5·16 혁명, 그리고 유신헌법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렇게 유신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토착화’라 배웠다. 돌이켜보니 ‘한국적 민주주의’란,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와 접근법이 비슷하다.
대학 들어와 ‘세미나’에서 접한 책 <우상과 이성>(리영희)에서 베트남전의 진실, 한국군이 저지른 일들을 알게 되면서 혼란이 시작됐다. 학교에선 한국군이 행진하고 전통 밀짚모자 논을 쓴 베트남인들이 태극기 흔들며 환호하는 삽화와 함께 한국군 향해 ‘따이한, 따이한’(대한) 하며 가는 곳마다 환영했다고 배운 여파 탓이다.
교과서와는 다르지만, 지금도 애국가를 들으면 ‘박정희 대통령’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집 부근 극장을 들락거렸는데 영화 시작 전 애국가가 나오면 벌떡 일어났다 앉았고, 이어 대한뉴스가 시작되면 곧바로 박 대통령의 기념식 테이프커팅 장면이 이어져 파블로프의 개처럼 ‘애국가=박정희’가 머릿속에 박혀 버렸다. 아이들 머릿속에 이런 ‘인’을 박으려는 게 국정 교과서 추진 세력의 목표인가?
교과서 관련 흐름은 국정에서 검인정, 검인정에서 자유발행제다.
한국은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검정에서 국정으로 거꾸로 갔다. 2011년에야 검정이 완성됐는데, 박근혜 대통령대에 다시 74년처럼 ‘국정’으로 또 한번 거꾸로 가려 애쓴다.
아이들에게 하나의 교과서를 강요하는 건, 국정 교과서가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사회 전반에 전체주의적, 획일적 발상을 확산시키는 효과를 준다. 이렇게 해서 무슨 창조경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17개국이 자유발행제, 국정은 터키와 그리스뿐.
이렇게 해서 무슨 글로벌? 그렇게 민영화 외치더니 교과서는 왜 국영?
내년에 작업 끝내, 박 대통령 임기 내인 2017년 국정 교과서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데, 그렇게 단시일에 만들 능력이 되나?
그리 중요한 일이라면 허겁지겁 박 대통령 임기 안에 서둘러야 하나?
4대강 사업을 임기 안에 서둘러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가?
임기 뒤 감사원 감사 받고 싶은가?
거슬러 오르면, 이번 국정화 시도는 친일·오류 논란으로 얼룩진 ‘교학사 교과서’ 제2탄이다. 2013년 보수층에서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시도했으나, 8종의 검정 교과서 가운데 교학사를 채택한 학교는 전국적으로 0%대다.
참패다.
그러면 반성을 해야지, 판 갈아엎고 ‘국정’ 하려 든다.
현행 검정 교과서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검정 교과서도 교육부가 정한 세세한 집필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이를 부실운영한 게 누군데, 이제 와 책임을 엉뚱한 데 돌린다. 심판이 오심해 놓고, 선수 탓하며 자기가 직접 뛰겠다는 식이다.
그나마 추진 주체도 모호하다. 청와대는 “교육부가 알아서”라며 뒤로 빠진다. 비겁하다. 교육부는 국회 국감 업무보고에 국정 교과서 관련은 담지도 않았다. 관료들은 답변이 궁색해지면 으레 “위에서 시키니까”라는 식이다. 알 수 없는 그 ‘위’는 왜 직접 안 나서고 ‘똘마니’들만 총알받이로 내세우나?
김 차관 생각이 바뀌었나, 우리나라가 독재국가나 후진국으로 바뀌었나? 후자 같다.
권태호 정치부장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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