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미국...한국은 '승자' 전두환을 따르지 않았다
[한겨레21]
1980년 광주에서 미국 책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닉 플랫 메모’
브라운 국방장관 “한국인들 승자 따라갈 것” 발언, 미국은 공식 사과해야
광주MBC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 갈무리 화면. 니컬러스 플랫의 메모와 인터뷰 모습. 방송 화면 갈무리
김인정 광주MBC 기자는 2012년부터 2019년까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맡으면서 신군부의 광주 학살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했다. 2017년에는 1980년 당시 미국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 니컬러스 플랫(닉 플랫)을 인터뷰해 그의 메모를 확보했다. 김 기자는 2017년 이 내용을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에 담았다. 한림대 이삼성 교수에게 닉 플랫 메모 분석을 자문했다. 팀 셔록 기자는 김 기자와 함께 미국 시사지 <더 네이션>에 닉 플랫의 메모 내용을 알리는 기사 ‘한국 민주주의를 산산이 조각낸 이틀’(2 Days in May That Shattered Korean Democracy)을 실어 5월28일 공개했다. 팀 셔록 기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미국 책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체로키 파일’을 폭로한 한반도 전문 기자다. <한겨레21>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이 기사를 요약 재구성해서 싣는다. _편집자
광주 학살의 책임자는 신군부 말고 하나 더 있다. 미국이다. 당시 한국에는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뒤 계엄령을 선포한 군, 그리고 한미연합사령부를 운영하며 한국군을 통제하던 미국이 있었다. 정세에 영향을 미칠 두 개의 힘이었다. 이 힘이 실제 광주의 5월 안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미국의 책임을 어떻게 볼지는 논쟁거리였다.
미국은 책임을 줄곧 부인해왔다. 1989년 5·18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의 질문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답변 성명서에 잘 드러나 있다. 미국은 아는 바가 별로 없고, 따라서 책임도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과연, 지금껏 그들의 주장대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싶었지만 여러 한계 때문에 돕지 못한 선량한 우방이자 후견자일까.
지미 카터 미국 행정부가 광주 무력 진압 당시 전두환을 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1980년 5월21일과 22일, 긴박했던 이틀을 들여다봐야 한다. 5월21일은 계엄군이 처음 광주 시민을 집단학살한 날이다. 하루 뒤인 22일 미국 백악관 상황실에서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CIA), 합참, 국가안보회의(NSC) 최고위급 관계자들이 회의를 열고 최종 무력 진압을 승인했다. 전두환의 폭력적 집권보다 반독재 시민항쟁이 더 큰 위협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단기적 지지”라고 표현했지만, 실상 ‘지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광주MBC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 갈무리 화면. 니컬러스 플랫의 메모와 인터뷰 모습. 방송 화면 갈무리
빠진 퍼즐을 맞추는 듯
당시 미국 안에서도 반인도적 결정이란 비난이 나왔다.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지적했듯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위협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군사·경제·외교적 압력을 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려하지 않았다. 1996년에는 미국과 신군부 사이를 오간 비밀 전문인 ‘체로키 파일’이 폭로됐다. 미국이 한국군 공수부대 배치를 포함해 광주 상황을 상세히 보고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미국 책임론’이 더욱 달궈졌다.
2017년 광주MBC가 새로 발굴한 자료 ‘닉 플랫 메모’에는 미국 책임론을 뒷받침할 새로운 사실이 나온다. 빠진 퍼즐을 맞추는 듯한 이 자료는 문제의 5월22일 백악관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인 미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 니컬러스 플랫을 미국 뉴욕에서 인터뷰할 때 확보했다. 그는 당시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서기였다. 광주 상황에서 결정적 국면이던 미국의 ‘무력 진압 승인’에 이르기까지 회의 전체가 놀랍도록 상세히 기록돼 있다. 같은 해 미국 애리조나 자택에서 이뤄진 존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인터뷰와 조합해보면 입체적인 재구성이 가능해진다. 새롭게 알아낸 내용은 이렇다.
광주MBC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 갈무리 화면. 니컬러스 플랫의 메모와 인터뷰 모습. 방송 화면 갈무리
1. 광주 첫 집단 발포 사상자 규모 닉 플랫 메모에는 5월21일 광주에서 60명이 군의 총격으로 죽고 400여 명이 다쳤다는 구체적인 사상자 규모가 나오고, 이를 미국이 즉각 보고받았다는 사실이 처음 나온다. 카터 백악관은 회의 전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전두환의 광주 진압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광주의 참상을 잘 몰랐다는 미국 정부의 공식 해명과 정면충돌한다. 사상자 수는 1988년 한국에서 새로 선출된 국회가 청문회를 열 때까지 한국 대중에게 알려진 적이 없는, 신군부 세력만이 쥐고 있던 정보였다.
2. 전두환을 책임자로 즉시 거론 백악관 회의 참석자들은 자연스럽게 전두환을 무력 진압의 직접 책임자로 여러 차례 거론한다. 특히 사상자 규모와 광주의 상황이 언급된 뒤 “전두환이 사태를 악화시키며 큰 해를 끼치고 있다”(워런 크리스토퍼 국무부 차관)거나 “전두환이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데이비드 존스 합참 의장)는 우려 섞인 평가도 나왔다.
광주MBC 다큐멘터리 <그의 이름은> 갈무리 화면. 니컬러스 플랫의 메모와 인터뷰 모습. 방송 화면 갈무리
국방장관이 회의를 주도한 이유
3.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의 역할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은 강경한 태도로 회의를 주도한 주역이다. 국무부 관료 사이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전두환의 행위에 대한 우려와 지적이 나오지만, 브라운 국방장관은 이를 무시한다. 오히려 집단학살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은 때 “한국 군부는 아주 유능하게 무력을 사용했다”는 끔찍한 칭찬까지 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전두환과 군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서 미 국무부와 국방부이 약간의 견해차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국무부는 미국의 대외 이미지를 우려하지만 국방부는 군사적 이해관계와 냉전동맹의 중요성을 앞세우는 부서다. 국방장관이 회의를 주도했다는 이야기는, 미국이 광주 상황을 동북아 안보 문제로만 협소하게 파악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더욱이 브라운 장관은 당시 한반도에서 한-미 냉전동맹을 강화한 핵심 인물이었고,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뒤 한국군과의 최고위 대화 창구였다. 플랫에 따르면,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뒤 브라운 장관의 국방부는 존 베시 장군을 통해 전두환 사이에 특별 채널을 만들었다. 베시 장군은 미 육군 참모차장으로, 위컴에 앞서 한미연합사령관을 지내 전두환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관계를 바탕으로 브라운 국방장관은 “전두환이 청와대에 입성하면 우리는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전두환을 반대해서는 안 된다. 그건 우리에게 위험하다”며 지지의 논리를 깔아주는 주역이 된다.
4. “한국인들은 승자를 따라갈 것” 브라운 국방장관의 발언 가운데 한국인들이 가장 분노할 만한 대목이다. 한국인들이 미 정부의 전두환 지지를 받아들일 것인데, 그 이유는 “한국인들은 승자를 따라갈 것”이기 때문이라는 발언이다. 몇 달 뒤,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브라운 국방장관의 이런 생각을 더 부풀려, 한국인들은 강자라면 누구든 따라갈 “들쥐”와도 같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기에 이른다. 이 경멸적 발언은, 오랜 군부독재를 겪고서도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위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당시 미국 수뇌부의 지배적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5. 미 육군 한반도 증파 비상계획 플랫 메모에 따르면, 광주에 대한 미국의 비상계획은 미 육군을 한반도에 증파한다는 것까지 포함했다. 이는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만일 상황이 정말 심각해졌다면 “우리는 더 공격적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위 진압을 위해 태평양 사령부에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의 인터뷰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같은 맥락에서 플랫은, “광주에 투입된 부대 중에는 휴전선에서 이동한 부대도 있었고, 그 때문에 북한에 대응하는 능력이 저하될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같은 자료에는 당시 북한의 움직임이 없다는 사실도 명시돼 있다. 최전방을 지키던 부대가 본래 임무마저 팽개치고 자국민에게 무력을 휘두른 데 대한 비판은 없고, 비어 있는 전방을 메워줄 비상계획부터 미국은 검토했다. 시민들이 반발하는 이유가 군부의 폭력 때문이라는 근본 원인은 외면했다.
1982년 6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왼쪽)이 이임하는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위컴 사령관은 1980년 발포 뒤 류병현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만나 최종 진압 계획을 들었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
한국 민주주의의 진짜 승자는
이에 더해, 위컴 사령관은 우리와의 인터뷰에서 5월21일 집단 발포와 학살 뒤 류병현 합참 의장을 만나 광주를 다시 공격한다는 군의 최종 진압 계획에 대해 미리 들었다고 말했다. “류 의장은 광주 상황이 전국적인 무력 충돌로 번지는 것을 우려했고, 최선을 다해서 이 상황을 봉쇄하고 싶어 했다.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병력으로 가장 잘해낼 수 있을지 의논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류 의장과 다른 한국군 사령관들은 이런 행위가 전두환 신군부 편에 서는 일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신군부 수뇌부는 ‘광주를 진압해야 한다. 광주가 우리의 쿠데타에 위협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위컴 사령관은 류 의장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이 대화를 보고했고,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와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은 이 내용을 워싱턴에 비밀 전문으로 즉각 알렸다. 다음날인 22일 백악관에서 열릴 회의를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승자를 따랐을까? 1987년 6월 항쟁 당시 CIA가 본국에 전한 한국 상황 보고엔 미국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게 드러나 있다. 전두환의 폭압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가 커진 것에, CIA는 전두환의 1980년 광주 진압으로 많은 한국인이 전두환 군부가 북한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믿게 됐다고 레이건 행정부에 전달했다. 결국 1987년 6월 항쟁이 또 다른 ‘광주’를 만들 거라는 우려가 커지자 전두환은 대통령직선제를 처음 허용한 뒤 물러난다. 광주의 1980년 민주화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6월 항쟁의 승리였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렇게 탄생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진짜 ‘승자’, 즉 한국인들이 따른 쪽은 광주 시민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인이 ‘승자’ 전두환을 따를 것이라는 미국의 오판 탓에 한국인은 군부독재에서 7년의 억압 세월을 더 견뎌야 했다.
미국은 광주에 사과해야 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기 사흘 전, 그는 미국 주간 <더 네이션>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를 확립해냈으니 이제 문제되지 않는 일”이라며 미국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민감한 사안이라 그런지 청와대 관계자 역시 이 질문에 “정부와 정부 사이의 일”이라며 답변을 거부했다.
인권 전도사 지미 카터는 사과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광주의 5월에 대한 미국 정부의 행보를 되짚어봤을 때 공식 사과가 필요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는 대통령직을 떠난 뒤 인권 전도사 같은 행보를 보였지만 광주에 대한 그의 행동을 공식 사과한 적은 없다. 현재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대변인에게 당시 카터의 정책에 대한 의견을 요구했지만, 그는 예전의 미국 정책에 “덧붙일 것이 없다”고 답변했다.
우리는 다만, 1980년 당시 평화봉사단원으로 시민군과 광주에 함께 남았던 몇 안 되는 미국인이자, 미국 정부를 공공연히 비판했던 데이비드 돌린저의 말을 전하려 한다. “광주를 떠올릴 때면 조국에 대해 진심으로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다. 미국은 정부 관리가 직접 광주의 어머니들과 시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런 뒤 한국의 모든 국민에게도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사과해야 한다.”
김인정 광주MBC 기자, 팀 셔록 미국 탐사보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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