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
2016년 미국 대선,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의 텔레비전 토론 때였다. 클린턴은 트럼프가 연방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았다며 공격했다. 트럼프는 적반하장이었다. “그래서 내가 똑똑한 거요.” 대통령 후보가 탈세를 자랑했으니 경악스럽다.
사실은 영악했다. 세금은 강도질이며, 노골적인 자기 이익 추구야말로 번영의 비결이라는, 레이건 이래 우익의 신조를 저 한마디로 집약했던 것이다. 경제학자 이매뉴얼 사에즈와 게이브리얼 저크먼이 <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에서 내리는 평가다.
트럼프가 예시하듯 어떤 세계관은 이기적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고 좇는 게 옳다고 믿는다. 성공의 욕망, 부자가 되고픈 욕망, 타인을 이기고 지배하려는 욕망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며 발전과 풍요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이 솔직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정의로운 평등주의자들의 이중성이 폭로될 때다. 앞에서는 온갖 미사여구를 떠들던 이들이 뒤로는 탐욕을 추구했다니 사람들은 아득해진다. 선한 가면 뒤 탐욕의 민낯이라 더 추하다. 위선적인 도덕가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악당이 낫다고 여기게도 된다.
나도 저 역겨운 위선자 무리에 속하지 않을까? 대단한 고백도 못 되지만, 내 삶은 내 글만큼 정의롭지 않다. 유독 글 쓸 때만 정의롭다. 글쓰기가 점점 힘든 이유다. 나에게 선함이랄 게 있다면, 내면에서 우러나온 참된 원칙이라기보다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연기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대개 비슷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회 규범을 지키는 이유는 남들도 지키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남들이 지키지 않는다고 믿으면 나도 지키지 않는다.
도덕적 선호는 내면의 명령을 따르는 올곧은 준칙이 아니라, 타인의 행동에 대한 관찰과 예측에 좌우되는 조건적 선택이다. 철학자 크리스티나 비키에리의 통찰이다. 남들이 선하게 행동한다고 믿으면 나도 선(한 척)하게 된다.
<불평등의 대가>에서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이 원리로 소련 붕괴 뒤 혼란의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일화를 회고한다. 그 나라 온실에는 대부분 유리가 하나도 없었다. 너도나도 유리를 훔쳐갔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 훔칠 거라며 필요하지 않아도 훔쳤다. 선한 척할 필요가 사라진 세상의 모습이다.
그 무렵 러시아의 한 여론조사는 사람들이 기존 사회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야만적 자본주의 중에서 야만적 자본주의를 가장 선호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지지가 높았다. 당과 국가의 간섭은 물론이지만, 인간의 얼굴이라며 복지니 뭐니 하는 위선도 싫었다. 이리처럼 만인에 맞서 경쟁하고 싶었다.
1990년까지도 자본주의에 대해 신중하던 러시아의 여론은, 1991년의 쿠데타와 고르바초프의 실각, 옐친의 권력 장악을 거치며 급변했다. 급진적인 시장화, 사유화를 동반한 충격요법이 지지를 얻었다. 인간의 얼굴을 앞세운 정당들은 패배했다. 사람들은 진보적인 조세제도로 혜택을 입기보다는, 정글에서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했다.
시장주의자들은 1995년까지 생산이 25~50% 증가하리라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3분의 1이 줄었다. 1990년대 동안 러시아인 90%의 실질소득이 절반 아래로 감소했다. 20년 뒤에도 1980년대 말의 실질소득을 회복하지 못했다. 기대수명도 급락했다. 소련 해체 뒤 이행기를 연구한 경제학자 블라디미르 포포프가 ‘여론의 수수께끼’라는 논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국가와 당이 붕괴한 상황에서 경제가 작동하려면 사회적 신뢰가 절실했지만, 야만의 시장에서 신뢰가 생산될 리 없었다. 올리가르히로 불리는 솔직한 악덕계급이 정글을 장악했고, 소련 시절의 첨단 테크놀로지 대신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나라가 됐다.
현 정권의 ‘내로남불’, 위선에 대한 비판이 상당하다. 권력의 위선에 대한 비판은 늘 옳다. 어떤 세력은 이참에 아예 정직한 노동을 비웃으면서, 부동산이며 코인이며 투기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채질한다.
그러나 위선으로 입은 상처를 솔직한 악덕으로 치유할 수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위선이야말로 선을 닮고 싶은 우리의 또 다른 본성을 증거한다. 위선이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인 이유다. 위선은 역겹지만, 위선마저 사라진 세상은 야만이다. 냉소하기보다는 위선의 모순 속으로 걸어가야 할 까닭이다.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조형근 ㅣ 사회학자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93510.html#csidx336e4d36284cead992278b410030013
'시사,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낯뜨겁지 않은가? 정도껏 해라. ‘삼성 찬양 기사’의 종착점은 어김 없이 ‘이재용 사면론’ (0) | 2021.05.04 |
---|---|
30년 전 유엔 가입, 남북의 동상이몽 (0) | 2021.05.04 |
남·북·미, 대결 아닌 대화 물꼬 트는 데 온힘 쏟을 때 (0) | 2021.05.03 |
“이해충돌방지법 국회의원 꼼짝마...교사도 대상” (0) | 2021.04.30 |
미국은 ‘부자 증세’ 하는데, 우리는 ‘부자 감세’라니 (0) | 2021.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