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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유엔 가입, 남북의 동상이몽

道雨 2021. 5. 4. 10:12

30년 전 유엔 가입, 남북의 동상이몽

 

 

이제훈의 1991~2021 _02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제46차 유엔총회에서 161·160번째 회원국으로 동시·분리 가입한 1991년 9월17일 뉴욕 유엔본부 밖 국기게양대에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유엔은 남북의 국기를 나란히 걸었는데, 남과 북은 총회장에서 영문 표기 ‘ROK’와 ‘DPRK’를 기준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는 쪽을 택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90년대 초반의 이런 ‘비대칭 탈냉전’은 그 뒤 30년간 ‘핵 문제’를 고리로 한 북-미 적대에 한반도의 평화가 ‘인질’로 잡히게 된 역사적 뿌리다. 아울러 남북관계가 왜 아직도 화해협력과 갈등·적대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며 8천만 시민·인민을 어지럼증에 시달리게 하는지 성찰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가 아는 주권국가 가운데 유엔 회원국이 아닌 나라는 대만 정도다. 특수한 성격의 국가인 바티칸과 팔레스타인은 유엔 정식 회원국은 아니지만, ‘옵서버’로 유엔총회에 참여하고, 뉴욕에 대표부(Permanent Observer Mission)를 두고 있다. 대만은 이마저도 못한다.

강력한 경제와 민주주의를 갖춘 인구 2400만명의 대만이 유엔 회원국이 아닌 이상한 현실은, 미국과 패권을 겨루는 중국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하나의 중국’을 대외관계의 제1원칙으로 내세운 중국과 관계를 트려고 대부분의 나라들이 대만을 버린 탓이다. 한국도 1992년 8월24일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끊었다. 유엔조차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을 피해가지 못했다. 국제정치의 살벌하고도 냉혹한 민낯이다.

 

한국도 유엔 울타리 밖을 떠돌았다. 거부권을 지닌 소련과 중국의 반대에 가로막혀 유엔의 문을 열 수 없었다. 1990년 9월30일 한-소 수교로 그 벽에 균열이 생겼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1년 9월17일 161·160번째 회원국으로 유엔에 동시·분리 가입했다. 1948년 8월15일과 9월9일 따로 ‘분단정부’를 세운 지 43년 만이다. 올해는 남북의 유엔 가입 30돌이다.

 

유엔 가입은 남과 북의 대외관계와 양자관계를 질적으로 변화시킨 역사의 분수령이다.

첫째, 한반도에 두 개의 주권국가가 있다는 국제사회의 공인이다. 유엔 가입과 함께 남북은 적어도 국제무대에선 서로를 국가적 실체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북은 서로를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을뿐더러, 남북관계가 무엇인지 합의된 견해조차 없었다.

둘째, 탈냉전과 공존공영의 기반이 될 교차승인의 환경이 마련됐다. 유엔의 큰손인 미국·소련·중국이 모두 남북의 유엔 가입에 동의한 터라, 한-소에 이은 한-중 수교, 북-미 및 북-일 수교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한국은 중·소와 수교했지만, 북한은 미·일과 관계 정상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의 이런 ‘비대칭 탈냉전’은 그 뒤 30년간 ‘핵 문제’를 고리로 한 북-미 적대에 한반도의 평화가 ‘인질’로 잡히게 된 역사적 뿌리다. 아울러 남북관계가 왜 아직도 화해협력과 갈등·적대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며, 8천만 시민·인민을 어지럼증에 시달리게 하는지 성찰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남북의 유엔 가입은 상호 신뢰·합의가 아닌 힘의 대결의 결과였다. 한국은 자력으로 중·소의 동의를 얻어 유엔 가입의 길을 열었다. 북은 남의 유엔 가입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나서야 분리 가입 쪽으로 돌아섰고, 그 뒤엔 미국의 반대로 홀로 유엔 문밖에 버려질까 전전긍긍했다.

 

북은 당시 단독으로라도 유엔에 가입하겠다는 노태우 정부의 행보를 “나라와 민족의 분열을 영구화·합법화하려는 시도”이자 “하나의 조선을 둘로 갈라놓는 천추에 용서 못할 대죄”라 저주했다.

그러던 북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배경은, 한-소 수교(1990년 9월30일)와 함께 중국의 ‘최후통첩’이었다. 1991년 5월3~6일 방북한 리펑 중국 총리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한테 “한국의 유엔 가입 신청에 더는 반대 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한국이 단독 가입에 성공한 뒤에는 북이 가입하려 해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압박한 것이다.

그 20여일 뒤 북은 ‘외교부 성명’(1991년 5월27일)으로 ‘유엔 분리가입 방침’을 처음으로 밝혔다. “남조선 당국자들에 의해 조성된 일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로서, 현단계에서 유엔에 가입하는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라는 주장이다.

 

북이 왜 ‘분리 가입’에 반대하고 ‘단일 의석 가입’을 주장했는지 그 속내는 공식 외교문서인 ‘외교부 성명’만으론 가늠하기 어렵다. 조선역사학회장을 지낸 북한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허종호가 1975년에 쓴 <주체사상에 기초한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이론>은 “북과 남이 따로따로 유엔에 들어간다면, 비법적인 남조선괴뢰정권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고, 단일 의석 가입은 “‘대한민국’이 조선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1948년 유엔의 ‘결정들’, 미제와 남조선괴뢰들간에 맺어진 온갖 매국조약들이 무효로 된다”고 주장했다. 상대의 존재 근거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이런 대결적 인식으로는 공존공영의 길을 열 수 없다.

 

남북의 유엔 가입은 북이 줄기차게 주장하던 ‘하나의 조선’론과 ‘즉각적인 2체제 연방제 통일’ 방안의 기반을 허물었다. 남북의 공존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그 첫 변화는 유엔 가입 석달여 뒤인 1991년 12월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로 현실화했다.

 

사실 북의 ‘하나의 조선’론이나 유엔 동시·분리 가입이 ‘두 개의 조선 조작 책동’이라는 오랜 수사는 역사적·현실적 근거가 튼실하지 못한 ‘통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당시 북과 외교관계를 맺은 100개국 중 남북 동시 수교국이 89개국이었다(1988년 기준). 2021년 북쪽의 160개 수교국 중 3곳(쿠바·시리아·팔레스타인)을 뺀 157개국이 남북 동시 수교국이다. 북의 ‘하나의 조선’론은 대만과 수교하면 바로 단교해버리는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에 견줘 실상과 성격이 다르다.

 

유엔 동시·분리 가입이 “두 개의 조선 조작 책동”이라는 북의 오랜 주장도 불변의 원칙은 아니다. 북은 1956년과 1958년 두 차례에 걸쳐 소련이 제출하는 형식으로 ‘남북 유엔 동시 가입 권고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한 사실이 있다. 북이 ‘남북 유엔 동시·분리 가입=두 개의 조선 조작 책동’이라 처음으로 공개 주장한 건, 박정희 대통령의 ‘6·23 선언’을 비난하며 당국 대화 중단을 선언한 1973년 8월23일 ‘북남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 김영주 성명’이었다.

 

북의 통일 관련 주장과 태도는 남북의 상대적 역량 변화,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달라져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북의 ‘말’보다 ‘말’에 감춰진 속내와 행동, 무엇보다 그 행동이 불러온 현실의 변화를 중시해야 한다.

 

통독 전 서독과 동독은 1973년 유엔 가입 뒤 총회장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그러나 1991년 남북은 영어 표기 알파벳 순서(북 DPRK, 남 ROK)를 기준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주권국가의 유엔 가입이 단일 안건으로 표결·토론 없이 만장일치로 처리된 데에는, 미국의 반대로 홀로 가입이 무산될까 걱정한 북을 배려한 중국의 ‘외교’가 있었다.

 

당시 남북이 유엔 가입을 체제 경쟁의 승리와 패배의 성적표로 여겼어도, 유엔 가입의 근본적 긍정성과 미래지향성은 완전히 휘발하지 않았다.

 

한-소 수교에 이은 남북의 유엔 가입은, 냉전기 동북아의 강고한 세력균형을 뿌리부터 뒤흔들며, 공존공영의 미래를 열어갈 변화의 씨앗을 흩뿌렸다.

 

남북은 무력행사 금지를 규정한 유엔헌장 2조4항에 따라, 상호 군사적 충돌을 억제할 국제법적 의무를 지게 됐다. 유엔 가입은 냉전기의 무질서한 체제 경쟁·갈등을 넘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평화·공존·발전을 지향할 튼실한 외교적 기반이자, 제도 마련의 디딤돌이 됐다.

 

당시 북이 인식했는지 불명확하지만 유엔 가입은, 사회주의권의 연쇄 체제전환으로 김일성 주석의 밤잠을 설치게 한 흡수통일을 막을 국제 방파제이기도 했다. <노동신문>(1991년 9월19일치)은 1면에 크게 실은 유엔 가입 기사와 ‘외교부 성명’에서 “우리 나라의 유엔 가입을 만장일치로 지지찬동한 것은 우리 인민의 선택에 대한 존중의 표시”라거나 “유엔 성원(회원)국들이 우리 공화국과 긴밀히 협조해나갈데 대한 진지한 염원을 뚜렷이 표시한 것”이라며, 나름의 ‘기대감’을 드러냈다.

 

유엔 무대는 애초 ‘하나’이던 남북이 다시 ‘하나’가 될 필요와 마음이 있는지를 서로 탐색·확인하며 공존공영의 꿈을 키울 인큐베이터이자 검증대다. 유엔총회는 남북정상회담을 환영·지지하는 만장일치 결의(A/62/L.4)로 남북에 “정상선언 완전·충실 이행”으로 “한반도 평화”와 “평화통일”의 “굳건한 기반 마련”을 권고하며 “이 과정을 계속 지지·지원하기를 회원국들에 요청한다”고 밝혔다.

굳이 따지자면 유엔은 ‘두 개의 조선 조작자’보다 남북 화해협력의 지지·협력자에 가깝다. 지난 30년간 충분히 발현시키지 못한 유엔 가입의 잠재력을 이제는 현실로 만들 때다.

 

이제훈 ㅣ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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