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걸린 '무죄' 확정... 드러난 검찰의 시대착오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대법원 무죄확정... 그리고 검찰이 보여준 또다른 가해
"상고를 기각합니다."
지난 7월 29일 목요일 10시 25분께, 대법원 2호 법정에서 4명의 대법관 중 한 사람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이 여덟 글자를 들은 두 분의 고문피해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 재판에 참여했던 고문피해자와 지인들은 조용히 법정을 나와 로비에서 서로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재판에 함께 참석했던 피해자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먼저 그 자리를 떠났다. 축하의 말을 건넬 틈도 없이 '대법원 무죄'라는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간의 서러움과 억울함,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조심스럽게 짐작하게 됐다.
이날 '구미유학생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양동화, 김성만씨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 받았다.
▲ 무죄 판결 후, 대법원 앞에서 다같이 찍은 사진 지난 7월 29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재판에 참석한 분들이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정금택, 김성만, 양동화, 이동석씨,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
전두환과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
1985년 9월 9일, 전두환 독재정부는 또 하나의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고자 했다.
당시엔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규명과 학생중심의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의 신한민주당이 득표율 29%를 넘기며 총 의석수 67석을 차지했다.
당시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 148석을 차지했지만 득표율은 35%에 불과했기 때문에, 신한민주당의 선전은 전두환 독재정부에 큰 충격을 안겨줄만한 결과였다. 특히, 김대중과 김영삼의 존재는 전두환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 1985년 9월 9일자 경향신문 보도사진 1985년 9월 9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학원가에 침투해 반미 투쟁을 선동한 구미 유학생 간첩단 22명을 검거해 이 중 19명을 구속했다"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정치적 역학 속에서 전두환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외부의 적을 상정해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려는 전통적인 정치적 술수를 쓰고자 했다. 그게 바로 1985년 9월 9일 발표된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양동화·김성만·황대권 등이 미국 유학 중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뒤, 국내에 잠입해 학생들의 반정부 폭력시위를 주도하면서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건에 연루된 양동화·김성만·황대권 등은, 길게는 65일 동안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불법 구금돼, 모진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양동화와 김성만은 사형 선고를, 그리고 황대권과 강용주는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등 15명의 사람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86년 12월 대법원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양동화와 김성만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이후 민가협과 국제 앰네스티는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구명 활동을 펼쳤고, 양동화·김성만·황대권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8월, 수감된 지 13년 만에 광복절 사면으로 석방됐다.
재심의 시작은 고통의 시작이었다
석방되고 약 20년이 지난 2017년 9월,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들은 용기를 내어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은 당시 안기부의 강제연행과 구금이 불법체포와 불법감금에 해당한다고 인정해, 2018년 5월 재심을 개시했다. 구미유학생의 재심 과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약 2년의 재판 과정이 흘러 2020년 2월 14일 재심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손동화 재판장은 "이 사건 기록을 살피면서 여러분의 고초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매우 안타까웠다. 이번 무죄판결로 절망과 좌절이 작은 희망과 소망이 바뀌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검사는 양동화, 김성만 선생에 대해서만 항소했다. 항소의 이유는 1985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이 두 사람의 당시 행동은 국가의 존립과 안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당시 불법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민주적 정통성이 없는 독재정부가 자신의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가기관(안기부)을 동원해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날조해 국민의 삶을 망가트린 것이 이 사건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오히려 시대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항소했다.
▲ 구미유학생 1심 무죄 선고 2020년 2월 14일, 서울중앙지법 재심 1심에서 무죄선고 후 단체로 사진을 찍고 있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 못한 검찰
검사의 항소로 2심 재판이 진행됐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에서도 1심 결론을 유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2020년 8월 21일, 서울고법 형사 6부 오석준 재판장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 가운데 증거능력이 없는 증거들을 제외한 나머지만으로 이들(김성만, 양동화)의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이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1심 결론을 유지한다"라고 밝혔다. 다시 한번 재판부는 1985년 당시의 재판은 물론 2020년 검사의 판단 또한 잘못됐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러나 검사는 이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상고했다. 결국 양동화, 김성만씨는 대법원까지 가게 됐다. 그리고 지난 7월 29일 대법원의 "상고를 기각합니다"라는 이 여덟 글자를 듣게 됐다. 참 길고, 그리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국가기관의 2차 가해
이번 재심 재판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재심 과정에서 검찰은 미국에 거주하던 관련자를 포함해 총 21명의 증인을 신청했다. 검찰은 이 증인들을 재판정에 앉혀 당시 고문에 의해 날조된 안기부의 진술조서 내용을 재차 추궁당했다.
이는 재심을 청구한 4명과 21명의 증인에게 35년 전 잊고 싶은 고통과 극심한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행위다. 명백한 국가기관의 2차 가해다. 이 같은 2차 가해는 고문의 경험을 가진 피해자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안겨주기 때문에, 재심 과정에서 인권의학연구소는 변호인에게 재판부 기피 신청을 요청할 것을 주장했다. 변호인이 2018년 11월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면서 재판이 약 1년 가까이 중단되기도 했다.
검찰은 과거 선배들의 잘못으로 시작된 재심 재판의 의미를 망각한 채, 다시 한번 고문피해자들을 피고인으로 대했다. 1985년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날조된 조서를 가지고 고문피해자들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장면이다. 특히, 이들은 이미 억울한 형을 다 살고 나왔는데도 말이다.
구미유학생의 고문피해자인 양동화, 김성만씨는 2017년 재심을 청구하고 지난 2021년 7월 대법원 판결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약 4년의 시간은 또 다른 감옥과도 같은 일상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보상과 치유는 누가 할 것인가. 재심 재판 과정에서 일어나는 국가기관의 2차 가해 또한 면밀하게 검토해서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
박민중(skek3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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