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무기화 시대, 에너지 자립의 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젊은 시절 지역 유도대회 우승자 출신으로,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들어가 동독 드레스덴에서 첩보활동을 했다. 그는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되자, 벽난로에 불이 날 정도로 기밀 서류를 태운 뒤, 소련에서 구하기 힘든 세탁기를 차 위에 싣고 황급히 귀국했다고 한다.
1991년 소련이 15개 독립공화국(CIS)으로 해체되자, 그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눈에 띄어 후계자로 부상한다.
퓰리처상을 받은 에너지전문가 대니얼 예긴은 저서 <뉴맵>에서, 국가 흥망의 영욕을 겪은 푸틴이 2000년 대통령이 된 뒤 ‘강대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야심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손에는 핵 등 군사무기를, 다른 손에는 석유·가스 등 에너지를 쥔 채.
예긴에 따르면,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석유 생산국 빅3 중 하나이며,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수출국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이 소비하는 천연가스의 40% 이상을 러시아가 공급하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려 하자, 미국·유럽연합(EU)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침공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천연가스 확보에 차질이 생길까 봐 일사불란한 대응을 못 하고 있다.
러시아는 패권주의 국가가 에너지를 무기화하는 위협 외에 또 다른 위험도 세계에 더한다. 마이클 맨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대기과학과 교수는 <신기후전쟁>(The New Climate War)에서, ‘기후변화 부정론’의 배후에도 서구 화석연료 기업과 함께 러시아가 있다고 주장했다. 각국이 화석연료를 버리고 재생에너지로 가면, 러시아 경제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는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있다는 얘기다.
예긴에 따르면, 러시아는 국가 예산의 40~50%, 국내총생산(GDP)의 30% 이상을 석유와 가스 수출에 의존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럽연합 등의 자원전쟁은 남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석유·가스도, 원전 연료인 우라늄도 나지 않는다. 석탄도 대부분 수입한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에너지 수입액은 약 163조원으로, 국가 총수입액의 22%나 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져 석유·가스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국제 시장 가격이 뛰어 우리 경제를 강타할 것이다. 지난 1월 카자흐스탄에서 소요사태가 났을 때 우라늄 가격이 폭등했던 것과 같다.
우리 같은 자원 빈국이 살아남으려면, 국외 에너지에 대책 없이 의존하는 구조를 벗어나야 한다. 태양광·풍력 등으로 자립적 재생에너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돌파구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햇볕은 어디에나 내리쬐고, 바람은 어디서나 분다. 태양광패널과 풍력발전기를 설치·유지하는 데는 돈이 들지만, 연료인 햇볕과 바람은 공짜다. 석유, 가스, 석탄, 우라늄 등 연료를 계속 수입해야 하는 발전소와 천지 차이다.
지난 10년간 태양광패널 가격이 90%나 떨어지는 등,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은 빠르게 향상되고 있다. 일부 선진국에서는 태양광, 풍력의 전기생산단가(LCOE)가 이미 원전, 석탄보다 싸다.
흐린 날, 바람이 안 부는 날 등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는 에너지저장시스템(ESS)과 지능형전력망(스마트그리드)의 고도화로 해결할 수 있다.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겪고 에너지 자립을 서두른 덴마크와 스웨덴은, 석유·석탄 수입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20년 각각 80%, 60%까지 늘렸다. 우리나라는 6% 남짓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햇볕도, 바람도, 기술도 아니다. 기후위기와 방사능 재난을 부르고 에너지 안보를 위협하는 화석연료·원전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깨끗한 자립에너지’로 가자는 사회적 합의다.
학교·상업건물·공장·아파트 등의 옥상·외벽과 노상주차장, 도로 방음벽, 철로 등 가능한 모든 공간에 태양광을 설치하면, 농토 훼손 없이 충분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는 해상풍력의 잠재력도 크다.
기존 원전과 가스 등의 활용이 당분간 불가피하지만, 최대한 빨리 재생에너지 시대를 열어야 한다. 먼 나라 소식에 마음 졸일 필요 없는 ‘에너지 자립의 길’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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