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판사 잇속 탓에 ‘글로벌 호구’된 한국 소비자
아이폰 고작 49만원, 폭스바겐 2억 2000만원 배상
지난 6일 서울고등법원은 애플사의 아이폰 이용자들이 애플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애플에게 소비자 1인당 7만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애플이 2016년 아이폰 운영체제(iOS)를 업데이트하면서 기기 성능을 고의로 떨어뜨린 데 대한 배상이었다.
그런데 이 판결로 인해 실제로 애플로부터 7만 원씩의 위자료를 받을 수 있게 된 소비자들은 불과 7명. 1심에서는 6만 명이 참여했었는데,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증거가 없다’며 소비자들을 패소시킨 후, 항소심에는 고작 7명만 참여했기 때문이다.
미국 소비자들이 같은 사안으로 2016년경 집단소송을 제기하여 약 6개월여 만에 6000여억 원을 배상받았다. 그에 비해 한국 소비자들은 8년을 기다려 고작 49만 원 배상받는 데 그쳤으니, 애플 입장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것이다.
소비자들에게 너무도 불리한 한국 법체계
2016년경 국내에 또 한 건의 대형 소비자소송이 있었다. 바로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사건으로 인한 것이었다.
미국 소비자들은 2015년도에 집단소송을 제기해서 6개월여 만에 20조 6550억 원을 배상받은 데 반해, 한국 소비자들은 2019년도에야 총 2억 2000만 원을 배상받는 데 그쳤다. 1심에서 무려 50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소송에 참가했지만, 역시나 서울중앙지방법원이 1심에서 소비자들을 패소시킨 후, 항소인원이 79명으로 줄어든 탓이다.
폭스바겐은 당시 미국 소비자들과는 소송제기 후 몇 개월 만에 빠르게 손해배상에 합의한 반면, 유럽과 한국 소비자들과는 합의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소비자 배상문제와 관련한 한국 법체계의 허점과 법원, 특히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보여온 그동안의 태도를 종합해보면, 내가 폭스바겐 법률팀장이어도 절대 한국 소비자들과는 합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한국 소비자들이 이처럼 절대적 약자가 되어버린 원인은 크게 네 가지 정도이다.
첫째, 한국에는 아직 집단소송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둘째, 대륙법 체계를 따르고 있는 우리 민법의 원칙상, 소비자들이 제품의 하자에서부터 기업의 고의, 과실, 그리고 손해배상의 범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입증책임을 부담해야 하는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셋째, 소비자들이 그 모든 것을 입증해낸다 해도 법원의 손해배상 인용액이 터무니없이 적고,
넷째,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의 모든 소비자 배상 사건에서 매우 일관성 있게 (입증 유무를 불문하고) 소비자 패소 판결을 내리고 있다.
미국은 어떻게 다를까?
미국에는 일단 집단소송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 소비자들 중 일부가 기업을 상대로 소송에서 승리하면, 같은 조건에 있는 다른 소비자들도 자동적으로 배상을 받게 된다.
또한, 미국 법원은 대부분의 증거가 기업측에 있다고 생각될 경우 디스커버리 제도를 이용해 기업에 내부자료 제출을 명령할 수 있고, 자료 제출 명령에 응하지 않을 경우 소비자 승소 판결을 내리는데, 손해배상 액수가 소위 ‘징벌적 손해배상’으로서 실제 손해액의 3배 이상이 된다.
그러니 소비자들이 제기한 집단소송에서 재빨리 손해배상에 관한 합의를 하고, 되도록이면 법원의 최종판결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위와 같은 집단소송,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이 재계의 반대로 인해 매번 무산되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기업 옥죄기’ 법안이라거나 ‘과잉 입법’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면, 입법자들은 어영부영하다가 입법에 손을 놓아버리기 일쑤였다.
그 결과가 바로 아이폰 사태나 폭스바겐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국민 전체가 ‘글로벌 호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현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180석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어째서 소비자 구제 입법에 손톱만큼의 진전도 없었는지 큰 의문을 가지고 있다.)
‘늘 하던대로’ 소비자 패소 판결 내리는 서울중앙지법
물론 위와 같은 제도적 문제만으로 이런 결과에 이른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일관된 반소비자적 판결 행태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폰 소송도, 폭스바겐 소송도 모두 2016년도에 시작된 소송으로, 아이폰 소송은 2023년도에, 폭스바겐 소송은 2019년도에 각 마무리되었다.
그 사이 소비자들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증거부족으로 패소하고, 서울고등법원에 항소를 하여 승소를 거두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1심 판결을 뒤집을 만큼 새로운 결정적인 증거가 2심 때 추가되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까?
그렇지 않다. 외국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들이 1심이 끝날 때까지 제출하지 못한 증거를 사건 발생 후 수년이 지나 항소를 제기할 시점에 새롭게 수집해서 제출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이 두 사건 모두 ‘처음부터 증거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늘 하던대로’ 소비자 패소 판결을 했으리라는 것을 넉넉히 짐작해볼 수 있다.
아이폰 소송이나 폭스바겐 소송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원고인단 소비자들은 대체로 1심에서 진 이후에는 항소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개 “우리나라 법원이 그렇지, 뭐” “거대 기업이니 응당 법원에 따로 손을 썼겠지” 하는 반응을 보이며, 순식간에 싸울 힘을 잃어버린다. 항소 인원이 6만 명 중 고작 7명, 5000명 중 79명에 불과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나마 폭스바겐 소송은 국내 유수의 대형 로펌이 진행했던 소송인데다 손해배상액이 제법 고액이었기에 항소 참여율이 저 정도 나왔던 것이지, 사실상 6만 명 중 7명이 평균적인 항소 참여율일 것이다.
자본의 거대한 힘 앞에서 소비자들은 무력감을 느낀다.
소비자는 이 사회의 자본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지만, 막상 손해가 발생했을 때는 자본주의적 질서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희생양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입힌 기업이 그에 대한 정당한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그 때문에 기업이 망한다는 논리가 아직도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이 놀랍다.
소비자에게 배상하다가 망하게 될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른 기업이라면, 하루빨리 우리 사회에서 퇴출시켜 버리는 것이 모두를 위해 더 좋은 일 아닌가?
그리고 또 다른 기업이 성장하여 그 자리를 대신할 기회를 갖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건강한 자본주의 질서가 아닐까?
국회에 진출하기 전에는 소비자권익 보호라는 대의를 적극 지지하던 정치인들도, 일단 원내에 진입하고 나면 이 문제에 관심을 잃어버린다. 계속 정치를 하려면 ‘반기업적 정치인’으로 찍혀 재계에 밉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법복을 입은 판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대법원 판사가 될 것이 아니라면, 적당한 시점에 옷을 벗고 나와 로펌 변호사로서 기업 사건을 수임해야 하는데, 자칫 ‘반기업적 판결’을 내린 경력 때문에 수임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을 한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기업의 행태로 인해 한 번 상처입고, 그것을 눈감아버리는 사회구조에 다시 한번 상처입는다.
거대 기업 앞에 한없는 약자로 마주 선 소비자들은 대체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 것일까.
김태현(변호사) 칼럼mindle@mindlenews.com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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