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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만큼 뜻깊은 날'인 순국선열의 날

道雨 2024. 11. 18. 10:31

'광복절만큼 뜻깊은 날'인 순국선열의 날

 

[오늘의 독립운동가 69]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강제 체결

 

 

11월 17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내 무후(無後) 독립유공자 추모시설인 '독립의 염원이 모이는 길'에서 제85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은 독립의 염원이 모이는 길에서 바람이 펄럭이는 태극기들. 이곳에는 묘소 없는 무후 독립유공자 6478명의 이름을 새긴 추모 명비가 있다. ⓒ 연합뉴스

 

 

 

1905년 10월 27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했다. 일본군 총지휘관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조약 조인 실무 책임자는 하야시(林權助), 일본왕이 자신을 대신할 특사로 보낸 자는 이토(伊藤博文)였다.

11월 10일 정오 무렵 이토가 덕수궁을 찾았다. 그가 고종 앞에 내놓은 일본왕의 친서에는 "짐(일본 국왕)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대사를 특파하니 특사의 지휘에 따르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이토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응하라는 협박이었다.

제1조 : 일본국 정부는 재(在)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하에 종래 재(在)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장리(掌理)한다.

제4조 :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나라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고종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일단 물러났다가 닷새 지난 11월 15일 다시 나타난 이토는 "조약 체결을 거절하시면 조선에 중대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일인지는 충분히 헤아리시겠지요?"라며 노골적으로 고종을 협박했다.

고종이 "이 조약은 국가의 막중한 중대사다. 짐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아야 한다"면서 버티자 이토는 정부 대신들을 궁중에 모아서 동의를 얻는 것이 빠르겠다고 판단했다.

한 사람씩 협박한 이토... 대부분의 대신들 굴복

11월 17일 이토의 요구에 따라 한국 정부 대신들이 일본 공사관에 모였다. 이토는 오후 3시가 되도록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대신들을 이끌고 고종 앞으로 가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었다. 일본 헌병과 경찰들이 회의장 안까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면서 대신들을 협박했다.

그래도 대신들은 조약 체결 안건을 부결시켰다. 마침내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토는 대신 한 명 한 명에게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식으로 겁박했다. 참정 대신(국무총리)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가 끝까지 반대했지만, 학부 대신 이완용을 가장 먼저, 그 뒤를 이어 군부 대신 이근택, 내부 대신 이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은 찬성했다.

한규설은 '대신들의 결정을 거부해 달라'고 건의하기 위해 고종에게 달려가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토는 한규설을 대궐 수옥헌 골방에 감금하고, 다른 대신들과 둘러앉아 조약을 체결했다.

반대하는 참정대신 가둬놓고 을사늑약 체결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제는 외국에 설치돼 있던 한국의 외교기관들을 모두 폐지시켰다. 한국에 머무르고 있던 영국·미국·청·독일·벨기에 등의 외교관들도 공사관을 철수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제 지구상에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사실상 없어졌다.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를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지청천, 차이석 등 6인이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殉國先烈共同記念日)'로 하자고 제안했다.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마 순국한 이들을 각각 일일이 기념하자면 자못 번거한 일일뿐더러 무명선열(無名先烈)을 유루(遺漏)없이 다 알 수 없으므로 1년 중에 1일을 정하여 공동히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認)한 바이오.

이제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정한 이유에 대하여는 대개 근대에 있어서 순국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國亡)을 전후하여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비분 또는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때의 1일을 기념일로 정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망한 것으로 말하면 경술년(1910년) 8월 29일의 합방발표는 그 형해(形骸)만 남았던 국가의 종국(終局)을 고하였을 뿐이오, 그 실(實)은 을사년(1905년) 보호5조약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므로 그 실질적 망국조약이 늑결(勒結)되던 11월 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한 것임.


제안은 원안대로 의결됐고, 그때부터 순국선열기념일(순국선열의 날)이 시작됐다. 순국선열기념일은 199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하지만 대통령이 순국선열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것은 1999년 단 한 번뿐이었다.

<두산백과>는 "순국선열은 생존했던 애국지사와 더불어 한국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생생하게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고 "순국선열의 날은 이들의 활동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현재화한다는 의미에서 광복절만큼이나 뜻깊은 날"로 규정했는데... 과연 그런가 의문이다.

광복절만큼 뜻 깊은 날에 대통령들은 어디 갔을까

순국선열기념일에 그 많은 대통령들은 다른 어떤 행사에 갔을까? 해마다 순국선열기념행사에 와서 정인보가 쓰고 '대한민국 27년'에 김구가 처음 읽은 '순국 선열 추념문'을 낭독하셨더라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 어찌 그토록 공사다망하시었을까?

우리 국조(國祖) 형극(荊棘)을 개제(開除)하시고 정교(政敎)를 베푸신 뒤로 면연(綿延)함이 거의 오천 년에 미치는 그 동안, 흥폐(興廢)의 고(故)가 어찌 한두번이리요마는, 실상은 한 족류(族類)로서의 대승(代承)이요, 혹 외구(外寇)의 침탈(侵奪)함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지역(地域)이 일구(一區)에 그쳐 환해 고윤(桓解古胤)의 내려오는 통서(統緖)는 언제나 엄연(儼然)하였었나니, 우리 몸소 당한 바 변난(變難)이야말로 사상(史上)에서 보지 못하던 초유(初有)의 참(慘)이라. (순국선열추념문 첫머리, 이하 하략)


순국선열기념일을 맞아 독립운동유적을 한 곳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집을 나선다. 의열단 이종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정 고택, 국채보상운동 서상돈 고택, 이육사 기념관,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유적지,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유적지, 대구고보 동맹휴학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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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이종암 지사가 의열단 창단 자금을 조달한 대구은행 구 본점 (오른쪽) 이종암 등 여러 지사님들의 모습 ⓒ 정만진관련사진보기

 

 


계성학교 아담스관, 신명여학교 독립운동기념비, 동화사 학승 만세운동 준비 유적지, 1919년 3월 8일 대구만세운동 최초 희생자 김용해 부자 유적지,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광복회 창립지...

집에서 가까운 곳만 언뜻 헤아려봐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임시정부 순국선열공동기념일 제정 법안 제안서의 표현대로 "무명선열을 유루(遺漏, 빠뜨림)없이 다 알 수 없"는 일이니,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무수한 독립운동유적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걷는 이 길이 독립운동을 해야 했던 그 시기에 어느 지사께서 걸어가셨던 바로 그 길이 아닐까, 생각하며 걷는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