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284

대동법과 김육

대동법과 김육 @ 대동법 개요 대동법은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기 시작하여 1708년에 완성되었다. 호역(戶役)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과 잡역의 전세화(田稅化)가 주요내용이었다. 대동법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여 징수했고, 과세 기준도 종전의 가호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꾸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무전 농민이나 영세 농민들은 이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포나 전으로 대신 징수하기도 했다. 대동법의 시행은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임진왜란 이후 파국에 이른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었다. 또한 공인들의 활동에 의해 유통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자본이 발달했으며,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품을 ..

민중의 시대, 통일의 시대를 노래하던 백기완 선생을 추모하며

민중의 시대, 통일의 시대를 노래하던 백기완 선생을 추모하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민중가이며, 만일 우리가 새로 국가를 만든다면 이걸로 하면 좋겠다 싶은 노래, ‘산 자여 따르라’라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을 만든 백기완 선생이 타계하셨습니다. 재수하고 있던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군부정권이 표면적으로나마 항복하고 직선제 대통령제가 부활됐을 때, 그는 대선 후보로 나왔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민중후보의 단일화를 외치며 후보 자리를 내려놓았지요. 그렇지만 그런 일이 있었어도 가끔 거리에 나가면 대학생들이 소리를 높여 외치는 소리를 듣곤 했었습니다. “가자,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

작호론(作號論) : 명(名), 자(字), 호(號)

* 이 글은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한정주 지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작호론(作號論) : 명(名), 자(字), 호(號) - 이름[명(名)]과 자(字)와 호(號)는 어떻게 짓는가 @ 머리말 : 호(號)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최소한 셋 이상의 호칭을 지니고 있었다. 명(名)과 자(字)와 호(號) 명(名)이란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과 같다. 자(字)는 관례(冠禮, 성인식)를 치르고 짓는데, 그 까닭은 ‘이름을 귀하게 여겨서 공경하기 때문’이다. 관례를 치르고 나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字)를 지어 부르도록 했다. 다, 자를 지을 때는 반드시 이름(名)과 연관 지어 짓도록 했다. 관례는 대개 15~20세 때 행해진다. 명(名)과 자(字)는 부모나 어른..

근·현대사 인물들의 호(號) 소사전

* 이 글은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한정주 지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근·현대사 인물들의 호(號) 소사전 * 김구 : 백범(白凡) : ‘백정(白丁)과 범인(凡人)’에서 각 한 글자씩 취함.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지도자로 대한민구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다.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을 막고 자주적 통일국가 수립에 앞장서다, 반공 우익 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백범(白凡)이라는 그의 호는 감옥에 갇혀있던 1913년에 지어진 것으로, ‘가장 미천한 신분인 백정(白丁)에서부터 평범한 보통 사람인 범인(凡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과 함께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소원을 표시한 것. * 김대중 : 후광(後廣) : 그가 태어난 고향마을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後廣里)’ 지명에서 ..

가난의 품격, 그리고 혼자 노는 즐거움

가난의 품격 가난한 사람에게도 품격과 품위가 있다. 부귀와 권세와 이익 앞에 당당했던 이덕무의 삶과 철학은 자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하나가 '선귤당'이라면, 다른 하나가 '청장관'이다. 선귤당(蟬橘堂)은 '매미(蟬)'과 '귤(橘)'을 취해 지은 자호다. 이덕무는 말하였다. "내가 예전 남산 부근에 살고 있을 때 집의 이름을 선귤이라고 했다. 집이 작아서 매미의 허물이나 귤의 껍질과 같다는 뜻에서였다." 작고 초라한 집에 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했던 이덕무의 기백이 잘 드러나 있다. 청장관(靑莊館)은 이덕무가 죽음을 맞은 곳이다. 생전 그의 글과 기록을 모두 모아 엮은 책의 제목 또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다. 이덕무를 대표하는 자호이자 당호(堂號)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청장관을 호로 ..

김구 선생 암살 후 엄청난 부자가 된 안두희

김구 선생 암살 후 엄청난 부자가 된 안두희 [1996년 10월 23일 안두희 사망] 박기서씨, '정의봉'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 ▲ 서거 당시의 김구(1949.6.26.)-백범기념관 게시 사진 재촬영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가 독립된 지 채 4년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고령으로 인한 자연사가 아니었다. 육군 소위 안두희가 서울 경교장(현 서대문구 강북삼성병원 내 위치)에서 백범에게 총탄 4발을 쏘았다. 백범은 당시 73세로, 1875년생인 이승만보다 한 살 아래였다. 암살범 안두희는 중앙일보 1981년 12월 18일 인터뷰에서 "백범 암살 진상에는 더욱 복잡한 사연이 있다. 그래서 진상을 폭로하면 엄청난 사회적 파문이 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뒷날 번복하기..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己丑獄事) - 조선왕조 최대 피의 숙청 사건 - 정여립 역모(모반)사건이 불러온 피의 광풍 기축옥사(己丑獄事) -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서인(西人) 정철이 주도한 피의 숙청 기축옥사와 동인(東人)의 몰락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때까지 훈구(공신)세력과 사림(士林, 선비)세력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왔다. 선조 때 이르러 사림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이조전랑의 자리를 놓고 시작된 개인적인 앙금은, 1575년(선조 8) 사림(士林)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면서, 정치적 대립관계 유지하는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정여립의 모반(역모)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1589년(기축년, 선조 22)에 시작하여 1590년(경인년, 선조 23..

전라좌수영(이순신 수사) 휘하의 5관5포 장수들

전라좌수영(이순신 수사) 휘하의 5관5포 장수들 @ 초기 해전(3차 출동까지)의 전과 구분 1차 출전 (옥포~적진포) 2차 출전 (사천~율포) 3차 출전 (한산도~안골포) 합계 비고 순천부사 권준 (종3품) 대선1 대선1 2척 1차 미참전 보성군수 김득광 (정4품) 대선2 2척 낙안군수 신호 (정4품) 대선2 대선1 3척 광양현감 어영담 (종6품) 대선1, 중선2, 소선2 대선2 대선1 8척 흥양현감 배흥립 (종6품) 대선2 대선1 대선1 4척 방답첨사 이순신 (종3품) 대선3 대선1 대선1 5척 사도첨사 김완 (종3품) 대선3 대선2 대선1 6척 녹도만호 정운 (정4품) 대선1, 중선2 대선2 대선2 7척 발포만호 황정록 (정4품) 대선1 1척 1차 가장 나대용 여도권관 김인영 중선1 대선1 대선1 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 아래의 내용은 위키백과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임진왜란 · 정유재란 壬辰倭亂 · 丁酉再亂 @ 기간 * 임진왜란 :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 정유재란 : 1597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 장소 : 평안도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 @ 원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 일본의 군사 통행권 요구(정명가도)에 대한 조선의 거절 @ 결과 : 일본의 철군, 조·명 연합군의 승리 @ 영향 - 조선의 정치적 혼란 가속 · 사회경제적 기반 초토화 -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성장 -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수립 @ 교전국[1..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활약한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활약한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 이순신(李純信, 1553년 12월 27일 ~ 1611년 9월 2일)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무장, 유학자이다. 임진왜란 때에 활동하던 장수로, 그의 상관이기도 했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의 구별을 위해, 무의공 이순신, 입부 이순신으로 불린다. 본관은 전주.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의 4대손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9대 방조가 된다. 시호는 무의(武毅), 자는 입부(立夫)이다.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1578년(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의주의 판관, 혜산진 첨절제사로 근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영 예하 방답진 첨사로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중위장·전부장으로 옥포·합포·적진포..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박진 장군과 그 억울한 죽음(명나라 장수에게 구타당함)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박진 장군과 그 억울한 죽음(명나라 장수에게 구타당함) 박진(朴晉,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은 무신, 군인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 벼슬을 지냈다. 초기의 밀양성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으나, 영천성에서 의병 주도로 벌어진 영천성 전투를 지원하여 승전을 거두었고, 이후 왜적 111명의 수급을 베어 왕에게 올렸으며, 제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159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순천부사,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596년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냈다. 일본군 장수 사야가는 그를 만나 조선으로 귀순하였다. 사후 증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으며, 후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밀..

임진왜란 육전의 영웅, 권율과 행주대첩

임진왜란 육전의 영웅, 권율과 행주대첩 권율(權慄, 1537년 12월 28일 ~ 1598년 7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또는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목차 1 주요 전력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2.1.1 출생과 가계 2.1.2 과거 급제 2.2 임진왜란 때 활동 2.2.1 임진왜란 초기와 용인전투 패전 2.2.2 이치 전투 2.2.3 독왕산성 진지 복구 2.2.4 독왕산성 싸움과 세마대 2.2.5 한성 진입 계획과 병력이동 2.2.6 행주대첩 2.3 생애 후반 2.3.1 이몽학의 난 진압 2.3.2 정유재란 2.3.3 왜란 이후 2.4 사후 3 가족 4 일화 4.1 이항복과의 관계 4.2..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이자 이순신의 후임자, 이시언 장군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이자 이순신의 후임자, 이시언 장군 1589년(선조 22)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나암(懶庵) 정언신(鄭彦信)[1527~1591]의 천거로 오위의 사용(司勇)에 기용되어 사과(司果)를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선조 25) 인천부사로 나갔다. 이 때 큰 공을 세워 당상관에 오른 뒤, 1593년(선조 26) 황해방어사가 되었다. 1594년(선조 27) 전라병마절도사가 되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라도를 지키며 큰 공을 세웠다. 곧이어 해주목사, 장흥부사를 거쳐, 1596년(선조 29) 충청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 때 경주 탈환전에서 의병장 정기룡(鄭起龍)·권응수(權應銖)와 함께 명나라 원군과 합세하여 공을 세우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이자, 이순신의 절친 : 선거이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이자, 이순신의 절친, 선거이 선거이(宣居怡, 1550년 ~ 1598년)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보성,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이다.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宣允祉)의 8세손이며, 판서 선형(선형)의 증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과 함께 한산도 대첩에 참전하여 승전했고, 그해 12월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독산산성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뒤를 이어 권율 도원수의 부원수 자격으로 행주대첩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1594년 9월의 장문포 해전에서 승전하였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었다. * 한산도 대첩 당시, 선거이는 전라우수영(이억기 수사) 예하의 진도군수로서, 삼도연합함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생..

부산 일대에서 순절한 임진왜란 선열들을 제향하는 충렬사

부산 일대에서 순절한 임진왜란 선열들을 제향하는 충렬사 * 충렬사 전경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의 충렬사(忠烈祠)는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사당 건물은 본전(本殿)이라 하는데, 본전과 의열각에는 선열 스물세 분, 의병 예순두 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명 용사들 등 모두 93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본전은 충렬사 경내의 가장 높은 지점, 의열각은 그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 부산 충렬사 외삼문(사진의 왼쪽) 앞에 세워져 있는 '송상현 공 명언비'. 1592년 4월 15일 "길을 비켜 달라'는 일본군의 요구에 대해 동래부사 송상현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일본군과 송상현 부사 사이에는 말이 아니라 글이 오갔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