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대박물관은 1990년 4월 13일부터 9월 20일까지 5개월가량 경남 양산 북정리고분군(사적 제 93호)과 신기리고분군(사적 제94호)을 조사하면서 부부총을 재발굴했다. 부부총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발굴 조사돼 1927년 조사보고서가 간행된 고분이다. 당시 발굴된 유물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27년 보고서는 부부총이 위치한 능선 상의 대형고분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제1호분에서 18호분까지 번호를 붙였는데, 부부총은 제10호분에 해당했다.
발굴단은 먼저 무덤 주변 호석과 주구흔(周溝痕) 등의 확인을 위해 능선 위쪽에 해당하는 동쪽부분을 조사했다. 다음 일제시대에 조사된 부분과 그 뒤에 행해진 도굴부분을 확인해 그곳을 통해 석실 내부로 들어가 입구 부분을 조사하고 실측하기 위해 남쪽 복원 부분의 봉토를 제거하는 순서를 취했다. 조사결과 부부총은 1927년 보고서에 나와있는 것처럼 횡혈식이 아닌 평면 장방형의 횡구식 석실분으로 밝혀졌고, 석실 내부의 벽면과 천장은 백색으로 도장돼 있었다.
부부총과 비슷한 시기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에는 금관총 천마총 황남대총과 같은 대형분들이 모두 시내의 평지에 축조돼 있다. 그러나 가야지역은 경남 함안 도항리고분군이나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과 같은 대형고분군도 모두 양산 북정리고분군처럼 구릉 정상부나 그 사면에 분포하고 있어 이런 점에서는 부부총의 경우 가야적인 요소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봉토 주변의 호석이나 석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성격상으로는 신라적인 경향이 짙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양산이 당시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라는 지리적인 환경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양산이 가야 영역이냐 신라 영역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하나의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발굴단은 생각했다.
부부총 주인이 착장한 금동보관. | |
부부총에서는 금동관, 금동귀고리를 비롯해 금제귀고리, 금제팔찌, 은제혁띠, 삼루환두대도 등 화려한 장식품들이 출토됐다. 그러나 그 특징이 경주지역의 천마총 금관총 황남대총 등 대형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내용들과 많이 닮아 있다. 이처럼 신라와 관계 있는 유물이 대량 출토된 것은 양산이 지리적으로 신라 경주의 남서쪽 관문인 데다가, 낙동강을 건너 가야와도 인접하고 있어 신라로서는 초기부터 이 지역을 매우 큰 비중을 두고 다스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의 양산에 대한 관심은 양산에 경주문화의 유입을 촉진시키는 한편 고급 인력들의 진출과 함께 이 지역 문화의 질적 양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고 발굴단은 분석했다.
동아대박물관은 "따라서 부부총에서 출토된 각종 고급스러운 유물들을 볼 때 고분 안에 안치된 피장자는 신라 중앙정부와 깊은 관계를 가진 자 또는 그 친족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총의 축조연대는 주인이 먼저 피장되면서 축조된 고분이다. 발굴단은 따라서 주인을 5세기 중반 이후, 부인을 5세기 후반으로 각각 추정했다.
심 관장은 "문헌상으로 양산이 가야에 속했다는 기록이 없고, 신라는 탈해왕 대부터 물금까지 와서 가야와 전투한 기사가 있는 사실 등으로 볼 때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이 지역이 신라권에 속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