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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파고든 '살인 기생충'의 정체는?

道雨 2012. 7. 7. 12:32

 

 

 

        한국 파고든 '살인 기생충'의 정체는?

 

[프레시안 books]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

 

 

예기치 못한 사건이 갑자기 터졌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인수위원회가 기세를 높이며 좌충우돌할 때였다.

2008년 2월 11일 대한민국의 국보 1호 숭례문이 다섯 시간 만에 어이없게도 불에 타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온 국민은 이걸 하나의 무서운 전조로 받아들였다. 아니, 그것은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는 시기에 발발한 하나의 맹렬한 경고이며 무서운 상징이었다.

그러한 상징을 안고 출발한 MB 정부에 대해서, '조금 부패하더라도 어려운 경제만 살리면, 조금 바르지 못하더라도 서민들의 어려운 경제만 살리면…' 까짓 더럽고 아니꼬운 것쯤은 웬만큼 눈 질끈 감고 참아 줄 아량을 준비한 국민들이었다. 역대 대선 사상 가장 큰 표 차이로 당선된 MB가 누구인가.

747 점보 여객기인지 747 코리언특급 경제인지를 보란 듯이 펼칠 자신만만한 이 아니었던가. 청계천을 버젓이 살려낸(그게 정말 잘한 일인지 따지는 건 그만두고) 사람 아니던가. 복잡하고 불편한 서울 대중교통을 버스 전용차로와 GRYB(네 가지 색깔의 약자인 이것을, 비판자들은 '지랄염병'으로 읽기도 했다) 컬러풀한 버스와 환승제도를 이용해서 단칼에 제압한 이가 그 아니던가.

그에게 거는 '경제' 한 가지에 대한 국민적 소망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이제 헤아려 본다. MB의 남은 임기는 불과 6개월, 상류층 1퍼센트와 하류층 99퍼센트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계층 분할의 구도로 말미암아 국가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서민 경제 어디에도 눈 비비고 바라볼 만한 희망의 불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다.

예부터 가난구제는 나라도 할 수 없다 했다. 그러므로 그건 그렇게 치부한다 치더라도, 엉망으로 만든 남북관계는 안보 불안을 불러왔고, 마음 놓고 국민들이 생업에 종사할 만한 사회 분위기도 물 건너갔다.

꽃다운 신인 여배우가 분하고 억울해서 자살하고, 학교폭력에 시달린 중고생들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하면, 새벽의 귀가 길에 납치된 젊은 여성이 토막 살해되는 사회 불안과 치안 부재의 현주소를 날이면 날마다 보고 또 본다.

온 백성 삶의 생생한 현장을 정확하게 제대로 파악하는 분석과 통찰의 안목이 그래서 더욱 절실한 오늘이다. 상업주의와 보신주의에 파묻혀서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보수언론에 기대할 게 없고, 위정자와 일반 국민 간의 의사소통이 철벽같은 불통으로 꽁꽁 틀어 막힌 마당에,<프레시안>이나 <오마이뉴스>나 <나는 꼼수다>같은 대안 언론을 통해서 깨어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그나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그레샴 법칙의 나라>(오홍근 지음, 이담북스 펴냄). ⓒ이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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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연재되는 오홍근의 칼럼 <그레샴의 법칙의 나라>(이담북스 펴냄)는 보수 언론이 굳이 손바닥으로 입 가리고 잔뜩 볼륨을 낮춘 '할 말'을, 귀 있는 자 다 들으라 소리치는 통 크고 당당한 정론이다.

MB에 대한 고발장이다. 그 <그레샴의 법칙의 나라>가 '빼앗긴 이명박 5년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오홍근 그는 누구인가.
그는 기자가 되기 전부터 기자였는지 모른다. 현장 쫓아다니기를 '맹렬하게' 좋아했다. 역마살이 끼여 있었다. 타고난 역마살 탓인지 젊은 날의 객기인지 1965년 그는 맹호부대 사병으로 전란 중의 월남 지원해 쫓아가기도 했다. 1968년 TBC 보도국 기자(중앙매스컴5기)로 입사한 후 TBC가 강제 통폐합되자 <중앙일보>로 옮겨 사회부장, 부국장, 판매본부장 등을 거치며 30년여 동안 언론인으로 재직했다.

1976년 '비무장지대 르포'로 방송대상 기자상을 비롯하여 한국기자상, 언론자유상, 관훈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참지 못했다.

 

올림픽 개최를 앞둔 1988년 8월 그는 출근길에 일단의 괴한들로부터 회칼 테러를 당해 허벅지에 중상을 입는다. 이 사건은 정보사령부 장성 2명을 포함한 10여 명의 현역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였다. 그들은 당시 오홍근 <중앙경제> 사회부장이 <월간중앙> 1988년 8월호에 기고한 '청산해야 할 군사 문화'라는 칼럼에 불만을 품고 테러를 자행한 것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강골'이었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홍준표 의원의 '정치보복' 주장을 비판한 칼럼이 신문사 측에 의해 게재 거부되자, 오홍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표를 썼다. 1999년 3월이었다. 30년 4개월여 동안 몸담았던 <중알일보>를 그렇게 떠났다.

그 해 5월, 국민의 정부 초대 국정홍보처장을 시작으로 청와대 대변인. 공보수석비서관,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등 공직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일선에서 물러나 <프레시안>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기자 이후'에도 기자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제목에 나오는 '그레샴 법칙(Gresham's law)'은 무엇인가? 

소재의 가치가 서로 다른 화폐가 동일한 명목가치를 가진 화폐로 통용되면, 소재가치가 높은 화폐(GoodMoney)는 유통시장에서 사라지고 소재가치가 낮은 화폐(Bad Money)만 유통되는 현상을 그레샴의 법칙이라 말한다.

예컨대 금이 5그램 함유된 5만 원짜리 주화와 구리가 5그램 함유된 5만 원짜리 주화가 동시에 유통된다고 가정할 때, 금이 함유된 주화는 슬그머니 유통 시장에서 사라져버리고 구리가 함유된 주화만이 활발하게 거래 수단으로 통용됨을 말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토마스 그레샴은 이 현상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라고 표현했다. 이는 비단 화폐 유통 시장뿐만 아니라 여러 경제 현상 내지는 사회 현상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저자는 MB정권이 '나쁜 것으로 좋은 것을 몰아내고 있는' 그레샴 법칙의 현상을 칼럼의 문패로 내걸었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론의 자유'라 할 것이다.

예부터 고려·조선시대에선 언론 자유를 언로(言路)라고 표현했으며, 그것은 냇물과 자주 비교되었다. 즉 냇물이 막히면 썩는다 하였다.

"언로가 통하면 국가가 편안하고,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언론 자유는 치국 이념의 하나였다.

그래서 언론을 장악하여 왜곡 사용하는 일은 독재자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차대한 일이었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 등이 맨 먼저 접수한 곳이 방송국이었던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저자는 MB의 남다른 언론 장악 수법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언론 대책은 매우 특별한 데가 있다. 우선 후진국이나 독재 체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언론인들에 대한 불법 연행, 고문이나 테러도 없다. (……) "이만하면 언론자유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자랑스럽게 나온다. 정부, 여당 쪽 이야기다. "언론을 장악하려 한다는 일부 주장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대통령과 최시중 씨도 앞으로는미소 띤 온화한 표정의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116쪽)

"작심을 하고 칼을 뽑았다. 칼질은 KBS에서 터득했던 대로 사장 쳐내기로 시작되었다. 바꿀 때는 다소 소리가 나지만 사장만 '충성스러운' 사람 앉혀놓으면, 그 다음은 '손 안대고 코 풀기'였다. 이미 KBS에서 경험을 쌓은 터였다. KBS처럼 임기 중간에 바뀐 사장 자리에 김재철 씨가 임명되더니, 충성도를 인정받고 연임에 성공했다. 이윽고 김 사장에 의해 '손 안 대고 코 푸는 ' 작업이 시작되었다."(117쪽)

"물속에서 알을 까고 뭍으로 올라와 메뚜기와 귀뚜라미에 기생하다가, 숙주를 투신자살하게 하는 기생충도 있다. 2005년 8월 <뉴사이언티스트> 지에 처음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네마토모프'(Nematomorph)란 이름의 악질 기생충이다.

이놈은 성충이 되면 물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을 몸 안에서 키워준 메뚜기나 귀뚜라미를 물가로 가도록 조종한 뒤, 물에 투신자살하도록 한다. 죽는 건 이용당한 메뚜기와 귀뚜라미다.

연상되는 행태가 있어서 하는 소리다. 시사교양국 PD들의 제작거부 결의 등 여진은 있지만 '최후의 골칫거리' <PD수첩>에 대한 손보기는 마무리 단계다. 물론 '손 안대고 코를 푼' 경제적인 작업이었다."(119쪽)

저자는 이 나라 언론계의 네마토모프가 누구냐고 묻고 있다.

교묘한 방법으로 언론을 통제하는 MB 정부의 '작업'에 힘입어, 한나라당을 계승한 새누리당은 여러 가지 악재 속에서도 2012년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1971년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 저자는 기자였다. 그는 그때 여론이 어떻게 조작되는지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4.11 총선 때도 그렇게 여론이 조작되었음을 저자는 고발하고 있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영상조작'이 이번 제19대 총선에서도 등장해 맹위를 떨쳤다. MBC 노조는 편파화면의 빈도와 행태까지 밝히며 보고서를 내 놓았으나, 꼭 그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관심 있게 TV 뉴스를 본 사람은, MBC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방송들이 어떤 식으로 영상을 손질해 내보냈는지 대개는 짐작한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항상 거리의 많은 인파속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웃었다. 한명숙 민주당 대표는 겨우 두세 명이 함께 걸어가거나 회의하는 장면이 적지 않게 나왔다. '차별화' 되었다. (…)

때마침 파업 중이라 조금도 기자들 눈치 볼 필요 없이, 거리낌 없이 그런 짓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영상뿐만이 아니었다. 기사 내용도 그랬다.

MBC 노조는 "선거 기간 중 총선 보도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편파 뉴스가 나갔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영상 조작은 앞서 말한 1971년 대통령 선거가 효시 아니었나 싶다. 말하자면 이번 총선의 TV뉴스는 정확히 41년 전으로 시계바늘이 되돌려진 상태에서 전파를 탔다는 이야기다."(258쪽)

옛날 교과서에선 언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에 제퍼슨의 말이 자주 인용된다. "신문이 없는 정부보다는 차라리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저자는 30여 년 동안의 기자 생활을 통해 민주 언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 언론이 왜곡되고 편향될 때 끼치는 심각한 영향은 치명적인 독극물에 못지않음을 저자는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이 책의 3부 전체를 그에 할애하고 있음을 본다.

요즘 누구나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다니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기자들도 옛날과 달리 회사의 자기 자리에 앉아 전화로 중요한 기사 작성을 손쉽게 처리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현대화하여 통신기기의 메커니즘을 십분 이용한다고 할지라도, 기자에게는 현장이 역시 중요하다. 눈으로 확인해야 하고 사람을 직접 만나 들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오홍근이 4대강 현장을 여러 차례 훑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역마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꽁꽁 숨겨놓은 최시중 씨의 '추한' 이야기(138쪽~153쪽)를 찾아내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묻고 다녔는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박영준 씨의 이야기를 쓰기위해서 저자가 많은 사람들을 만난 사실도 그렇다. 박 씨와 현장을 함께 할 수 없다면,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만나야 현장을 파악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기사는 그렇게 취재해 쓴 칼럼 가운데 한 대목이다.

"아프리카 출장길에서도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명색은 자원외교를 표방한 순방길이었지만, 규모나 여행 수준은 가히 '행차'급이었다고 동행했던 기업인은 전했다.

작년 10월 하순이었다. 총리실·지식경제부·국토부·농진청·석유공사·가스공사·광물공사·한국전력공사 등 정부부처와 공기업의 고위 실무자들이 그를 수행했다. 여기에 SK에너지·코오롱·STX·포스코·삼성물산·현대종합상사·현대자동차·현대건설의 임원 등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모두 28개 기관 57명이나 되는 일행이었다. 

프로펠 비행기까지 통째로전세 냈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잠비아·모잠비크의 하늘을 열흘 넘게 누비고 돌아다녔다. '왕과 형님의 남자' 박영준 당시 지식경제부 차관 이야기다.

자원외교를 중시하라는 대통령과 '형님'의 뜻에 따라, 박 차관은 지식경제부 발령 2개월 만에 이 같은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바람을 일으키며 아프리카를 돌았다. 그는 통도 크고 힘도 셌다.

그러나 아무리 '왕 차관'이라 해도, 차관이면서 출장길에 비행기까지 전세 내는 간 큰 공무원이 있다는 이야기는,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아직 들은 바 없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일행 중 그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이건 기업인이건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물론 전직이었던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때도 그는 자원외교 명목으로 아프리카를 들락거렸다. 2009년 8월부터 14개월 동안 모두 4차례 아프리카 10개국을 방문했고, 그 때마다 모두 기업인들과 함께 갔다. 스스로도 '자원외교의 선봉장'이라 자랑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는 항상 조마조마한 대목들이 붙어 다녔다. 그리고 그예 사단이 났다."(214쪽)

이제 오홍근의 칼럼집〈그레샴 법칙의 나라〉를 읽은 소감을 다음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저자의 고3 때 담임 양동식 선생님이 쓴 서문 마지막 대목이다.

"오홍근은 나이 70인 지금도 옳고 그름이 분명한, 그러면서도 가슴이 뜨거운 기자입니다. 오홍근이 그런 제자이므로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비록 초라하지만 오홍근의 담임선생이었음이 자랑스럽습니다."

 


 

     

/강인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