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융성이라더니…
블랙리스트 1만 명, 질 낮은 정부의 표상
파괴는 창조의 모태, 비판이 자유로워야 대한민국이 숨 쉰다
어느 날, 피카소가 기차를 타고 있었다. 옆 좌석에 앉은 신사는 대화 중에 현대예술이 실재를 왜곡하고 있다며 불평했다.
피카소가 그 실재의 증거를 요구하자, 신사는 지갑에서 아내 사진을 꺼내 보였다. 사진이 아내와 똑같다고 하자 피카소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당신 부인은 끔찍하게 작군요. 게다가 납작하고요."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에 나오는 삽화 한 토막이다. 책은 피카소가 상상을 실재보다 더 진실한 것으로 믿었다고 결론지었다.
어찌 보면 선문답 같기도 하다. 그렇긴 한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분명 있다. 본질과 현상의 관계 말이다. 사진이 실물과 똑같다지만 실물은 아니다. 그래서 끔찍하게 작고 납작하다고 한 것이다.
사진이 오히려 실재를 왜곡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내라는 실재, 즉 존재의 본질은 전혀 다르다는 주장이다. 입체파의 추상화는 실재이고 본질이라는 피카소의 반박인 셈이다.
블랙리스트라?
시대가 30년 후퇴했다. 세상에 군사정권도 아니고 블랙리스트라니….
참, 투박하고 거칠다.
'모르쇠' '아닐세' 하든 그 속살이 드러난 느낌이다.
실재와 본질을 모두 훼손한 질 낮은 정부의 표상이다. 정권의 실체와 본질, 권력의 행태가 드러난 압축도다. 기피 인물, 위험 인물이자 관리하고 응징해야 할 대상이 무려 1만 명이다. 문학인, 유명 배우, 감독, 가수 등 전 분야가 망라돼 있다.
누군가는 구역질 난다 했고, 누군가는 영광이라 했다.
한데, 대상에서 빠진 사람들은 더 머쓱하다. 만 명에도 끼지 못하다니….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부문은 뭘까. 문화 예술이라면 과언일까.
지난해 콘텐츠산업이 매출 100조 원, 수출 60억 달러를 돌파한 것은 단적인 예다. 음악, 영화, 방송 등 한류의 폭이 출판,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으로 확대된 결과다.
중국의 사드 보복에도 매출은 5.7%, 수출액은 8.3%나 증가했다. 아직은 비중이 크진 않지만 그래도 희미한 희망의 불빛이 보인다.
아마 여기에 일조한 상당수가 블랙리스트에 포함됐을 것이다. 문화 역군들에게 불온 딱지라니. 품질 낮은 정치가 하품이 나온다.
문화와 예술이 무엇인가.
산업과 경제가 몸을 살찌운다면, 문화와 예술은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 보면 산업과 경제만큼 문화와 예술은 중차대한 사안이다.
창조경제라면서, 문화융성이라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 뿌리를 질식시키려는 게 이 정부다.
문화 예술인, 그들은 누구인가. 말의 고삐와 박차다. 때로는 말을 달리게 하고, 또 때로는 말을 멈춰 서게 한다.
고삐와 박차가 없이 말을 탄다고 생각해 보라. 멀리 가지 못해 땅에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그들이 없는 사회를 생각해 보라. 그 사회가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그들이 없는 정치를 상상해 보라. 천둥, 번개와 폭풍우가 사라진 땅이라면 생명조차 지속되기 힘들다.
문화와 예술을 자연에 비견하면 강과 바다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건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수백 개 골짜기 물줄기의 복종을 받는 것은 청탁을 가리지 않고 포용하기 때문이다. 문화와 예술은 자기 희생 위에 생명을 꽃피운다. 그걸 망치려 해서야 쓰겠는가.
문화 예술인은 철저히 현실을 반영해 작품을 만든다.
창조란 실재의 바탕 위에 생각을 더한 것이다. 실제 상황을 세세히 관찰해 그 속에 든 특성이랄까, 원리랄까 이런 걸 꺼집어내 형상화한다.
물론 그 관찰 속엔 상상과 유추, 변형과 통합, 직관과 통찰이 포함된다.
그러니 문화와 예술은 현실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부정하고, 거부하고, 파괴해야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비판이 자유로워야 민주주의가 숨을 쉰다.
이런 사람들에게 좌파 딱지를 붙여 제어하려는 그 무지몽매함이라니…. 그래 좋다. 좋다 좋다, 다 좋다. 시대 교체, 정치 교체, 역사 교체 다 좋다. 대통령 무책임제 청산, 권위주의 상징인 청와대 이전도 좋다. 지방분권 개헌?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 총리의 장관 임명제청권 등 헌정 질서 왜곡 구조 개선? 그것도 좋다.
다 좋은데 이번엔 제대로 한 번 해보자.
만사 제쳐 놓고 문화 예술인을 억압하고 틀에 가두려는 몰상식만은 철저히 걷어내자.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가 없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라의 품격을 높이고, 매력을 더하려면 문화 예술밖에 없다.
여기에 문이 있다고 치자. 단순히 보면 경첩에 매달린 나무판이다. 한데, 그것뿐인가. 경첩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힘에 의해 여닫는 기능이 있다. 목재를 손으로 다듬은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출구와 입구의 기능도 있다. 게다가 갖가지 장식이 더해지니 디자인이고 예술적 작품이다.
'생각의 탄생'은 문의 의미를 과학과 예술의 상호작용으로 봤다. 이것을 변환해 예술과 산업의 관계로 놓는 건 어떤가. 달리 말하면 '문화, 예술은 산업,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가 된다.
좀 더 확장하면 '문화 예술이 융성해야 나라가 숨을 쉰다'쯤 된다.
박희봉 국제신문 논설고문 aiwi@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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