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의 현장을 찾아서(3)
: 백조일손지묘, 알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답사 둘째날의 첫 답사지는 '백조일손지묘'이다.
2007년에 제주에 왔을 때, 근처의 알뜨르 비행장은 왔었지만, (백조일손지묘도 답사 후보였지만) 시간에 쫒겨 미처 찾아보지 못한 곳이다.
이번에는 둘째날 첫 코스로 잡아 내비 안내를 따라 찾아왔다.
그런데 내비가 안내한 곳은 사계리 공동묘지이다.
사방이 온통 묘지라 이곳이 백조일손지묘인가 착각하기가 쉬웠다.
공동묘지를 둘러보니, 최근에 비석을 세우는 작업 중인지, 석재가 여기저기 보이는 등, 내가 찾으려 한 백조일손지묘와는 뭔가 분위기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주차한 곳 옆 길가에 세워진 위령비는 재향군인회에서 세운 것으로, 사계리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숨진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혹시나 하면서 약간 떨어진 길 한가운데, 사유지인 듯이, 출입을 막기 위한 듯, 길을 막아놓은 철제 문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 보니, 바로 그 안에 백조일손지묘가 있었다.
백조일손지묘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공동묘지 서남쪽에 위치하고있다.
백조일손(百祖一孫)'이란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죽어, 누구의 시신인지도 모르는 채 같이 묻혀 무덤도 같고, 제사도 같이 치르니, 그 자손은 하나다.'라는 의미이다.
1950년 8월 20일, 제주 4ㆍ3사건의 막바지이자 6ㆍ25 전쟁 초기에, 제주도 남제주군 송악산 섯알 오름에서는, '적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미리 잡아 가두는 경찰의 예비검속 과정에서, 252명이 대량 학살되어 암매장되었다.
섯알오름에서 대량학살이 있은 뒤, 6년 8개월 만에 유족들이 수습한 유골들은 부러진 팔, 다리, 등뼈 등이 뒤섞여 있어, 도저히 누구의 시신(유해)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이에 유족들은 이 뼈들을 모아 132명의 봉분을 만들고, 유족들이 희생자들의 한 자손으로서 132명의 희생자를 한 조상으로 모시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결국 유족들은 공동으로 부지를 매입하여 유해들을 안장한 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이름을 지었다.
백조일손지묘는 4.3 항쟁을 전후한 시기에 희생된 수많은 시신을 모아 대단위 공동묘지로 만든 유일한 곳이다.
* 길을 막아 놓은 철문. 이 문 너머가 백조일손지묘인데, 차량 통행을 하지 못하게 막아 놓았다.
다행히 문 기둥 옆쪽으로 사람은 지나갈 수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 여기 문 있는 데까지 와보지 않았으면, 백조일손지묘를 보지 못하고, 사계리 공동묘지를 백조일손지묘로 착각하고 갈 뻔 했다.
* 수국 오른 편으로 풀밭처럼 보이는 곳이 백조일손지묘로서, 작은 봉분들이 밀집된 곳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수국과 개민들레(서양금혼초)가 한창이어서, 슬픈 원혼들을 위안하고 있다.
* 사각형의 돌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맨 위 사진의 철문 바깥쪽에서는 조금만 떨어져도 묘역 봉분이 보이지 않는다.
* 돌담장 너머로 오른 쪽이 묘역, 왼쪽이 주차장. 관리사무소(?)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다.
* 우리가 주차한 곳의 반대쪽(맨위 사진 철문의 반대쪽)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포장된 길이 있다. 아마 그 길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주 도로인가 본데, 우리 내비는 사계리 공동묘지(철문 반대쪽)로 안내하였다.
*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안내판
* 이곳에 모셔진 희생자 132명에 대한 분류.
* 정면에서본 백조일손지묘. 위령비 뒤쪽 좌우로 작은 봉분들이 밀집되어 있다.
* 5.16 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백조일손지지' 묘비의 파편을 모아두었다.
** 이것을 보니 남원 운봉에 있는 황산대첩비(고려말 이성계 등이 왜구의 침략을 격퇴시킨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를 일제가 폭파시킨 것이 생각났다.
* '섯알오름 희생자 부분잔해 묻힌 곳'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 2002년에 민예총 제주지회, 충북지회 회원들이 원혼들을 위한 진혼굿을 하고 난 후, 49위의 토우를 묻은 곳.
* 백조일손지묘의 뒤로 산방산, 그리고 더 멀리 한라산 정상이 보인다.
* 텅 빈 주차장. 세워져 있는 차가 한 대도 없어 더욱 쓸쓸히 보인다.
관리사무소 처럼 보이는 건물도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 황폐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우리가 왔을 때도, 이 곳을 찾는 사람은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4.3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이곳을 많이 찾아볼 것 같은데, 내비게이션의 진입로 안내가 잘못되었거나, 앞(사계리 공동묘지와의 경계로 보임)에 철문이 막고 있는 탓인지 모르겠다.
* 방문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게시판인데, 너무 오랫동안 보완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게 여겨졌다.
*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의 명함이 붙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엮은 '답사여행의 길잡이-한려수도와 제주도'에 4.3 항쟁에 대한 특집이 부록으로 실려있고, 본문 내용 중에도 백조일손지묘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 방문객들의 메모가 붙어있는데, 너무 오래되어 퇴색되어 있다.
백조일손지묘를 보고난 후, 알뜨르 비행장을 돌아보고, 송악산으로 향하였다.
송악산 아래쪽 길 맞은 편으로 있는 낮은 오름이 섯알오름이다.
백조일손지묘에 묻힌 유해들은 1950년 8월 20일, 이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사람들로서, 1956년에 유해를 발굴하여 한 곳에 모신 것이다.
섯알오름 주차장에서는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 10여 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 사진 왼쪽 끝 검게 보이는 부분이 비행기 격납고이다. 중앙과 오른 편에 작은 흙무덤 처럼 보이는 것들이 모두 격납고이다.
* 콘크리트로 만든 비행기 격납고. 알뜨르 비행장에 아직도 10여 개가 남아 있다.
섯알오름은 북촌리 학살사건과 함께, 4.3 사건 기간 중 집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으로, 이 곳에서만 252명이 하루만에 총살된 곳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치안국의 불법적 예비검속이 있었으며, 모슬포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357명 중 252명이 1950년 8월 20일, 새벽 2시와 5시 2차에 걸쳐, 하루 만에 총살된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 4.3 유적지 섯알오름 안내판
*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 추모비 앞 상석에 신발이 올려져 있다.
뒤의 병풍석에는 이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넣었는데, 만벵디 영령, 백조일손지묘 영령, 그외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 병풍석 뒤쪽으로 희생자들의 유해를 수습했던 커다란 구덩이가 두 개 있다. 이 구덩이들은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일본군 탄약고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생긴 구덩이라고 한다.
* 일본군 탄약고가 있던 자리인데, 탄약고를 폭파시키는 과정에 커다란 구덩이가 두 개 생겼다. 왼쪽 구덩이가 더 크다.
* 이곳이 백조일손지묘에 안장된 사람들이 총살당한 희생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 두 개의 큰 구덩이 중 왼쪽에 있는 큰 구덩이.
백조일손지묘에 묻힌 유해들은 이 구덩이에서 발굴되었다.
**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이 구덩이 앞에 사람을 한 명씩 세워놓고, 총살시킨 후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고 한다.
* 앞의 큰 구덩이가 백조일손지묘, 오른쪽 뒤편의 작은 구덩이가 만벵디 묘역에 안장된 사람들이 총살당해 묻혔던 구덩이이다.
** 만벵디 묘역은 미처 알지 못해 이번 답사에서 빠진 곳인데, 한림읍 금악리 275번지(개꼬리오름)에 있다고 하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찾아보고자 한다.
* 섯알오름 희생자들의 현장인 구덩이들을 잘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진 추모정.
* 추모정 뒤로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들이 보인다.
* 섯알오름 양민 학살터 안내판.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0년 8월 20일 새벽, 모슬포 경찰서에서 예비검속한 인원 357명 중 252명을 이곳에서 총살시켜 암매장하였다.
* 섯알오름에서 보이는 산방산, 멀리 한라산 정상까지 보인다.
아래는 4.3 당시 섯알오름에서의 학살 사건에 대한 전말(불법주륙기)을 잘 보여주고 있는 안내판으로서, 희생자 추모비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다.
* 섯알오름 학살사건의 전말(不法誅戮記)을 알려주는 안내판.
만벵디 공동묘역
만벵디 공동묘역은 한림읍 금악리 275번지(개꼬리오름 : 갯거리오름, 개구리오름이라고도 함)에 있다.
이곳에 묻힌 희생자들은 한림읍에 살던 사람들로서, 지난 1950년 8월20일(음력 7월7일), 전국적인 예비검속으로 대정읍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계엄군에 의해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와는 다른 구덩이에서 63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1956년 3월, 유족들은 당국 몰래 62명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죽은 지 오래되어 사람의 형상은 찾을 길 없었고, 해골, 나일론 옷, 고무신등이 뒤엉켜 물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옷, 신었던 신발등으로 신원확인이 가능한 시신 62명을 수습해 ,한림읍 만벵디 공동묘지에 묻었다.
한림읍 지역 희생자들은 사건 발생 6년이 지난 56년 3월에야 시신이 수습됐으며, 백조일손 사건과 달리 진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유족들이 많은 아픔을 겪다, 지난 2000년 유족회를 결성, 2001년부터 이곳 묘역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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