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품위 있는 삶을 위한 네 가지 근본 조건

道雨 2024. 4. 15. 11:00

품위 있는 삶을 위한 네 가지 근본 조건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2024년 4월 13일)

 

 

오늘 아침의 화두는 “품위(品位)”이다.

 

우선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이고, 사물에 사용할 때는 ‘그것이 지닌 고상하고 격이 높은 인상’을 말한다.

이 화두는, 늘 믿고 읽는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의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철학>>에서 토드 메이 미국 클렘슨대 교수는 좋은 사람의 바탕에는 품위(decency)가 있고, 품위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할 때 좋은 공동체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여기서 품위 있는 삶이란, 타자를 인정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가령 지하철에 탈 때 줄 서서 차분히 기다리는 사람, 승 하차할 때 잠깐 멈춰서 내리거나 타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는 사람은 품위가 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도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와 마찬가지로 바삐 움직이고 있다는 걸 의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품위 있는 삶을 위한 네 가지 근본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오랜 시간을 들여야 이룩할 수 있는 계획이나 관계에 참여하기,
- 인간의 궁극적 한계인 죽음을 인식하며 인생 방향을 설정하기,
- 음식, 주거, 수면 같은 생물학적 욕구 충족하기,
- 자기 주변을 배려하고 애착을 느끼는 기본 심리 욕구를 충족하기다.

 

 

우리 시대에는 당연하고 평범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20·30대의 우울증 증가 원인을 SNS에서 찾는다.

예전에는 평생 고향에 머물며 고작 이웃들이 비교 대상이었다. 하지만 국제화한 요즘 세대는 세계 최고와 비교하며 스스로 초라해지는 순간을 수시로 경험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면화되어 있다. 예컨대, 야근에 찌든 내가 발리를 여행하는 친구의 SNS를 보는 건 부러움을 넘어 자기 비하의 원인이 된다. 내면의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좁고 지저분한 내 방 대신 5성급 호텔의 침대를 찍어 올리는 것이다.

이런 경쟁적 상향식 비교는 우리 안의 불안을 자극해 이 시대 평범함의 기준을 높여 놓았다.

 

우리 사회는 실제 바쁜 것과 무관한 바빠 보이는 이미지에 더 열광한 지 오래다.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조건들을 보면, ‘잠깐 멈춤’처럼 모두 당연하고 평범하다.

백영옥 소설가는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공동체는 환우회라 했다. 나만 환자 같았는데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순간, 나만의 불행이 보편적 불행으로 변한다. 먼저 아팠던 사람이 새로 아프기 시작한 사람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위만 존재할 것 같은 세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우리는 비로소 앞과 옆을 함께 볼 수 있다. 우리의 불행이 다행으로 바뀜을 감사하면서 말이다. 너무 불안해 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자. 다만 내 일상을 ’품위 있게" 영위하자. 그리하여 품위에 내 몸에 베게 하자.

 

품위 있는 삶은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하고, 의미와 가치를 따지는 평범함에 바탕을 둔다. 타인의 모범이 되라고 부추기기보다, 힘 닿는 한계 안에서 최대한 타인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고민하며,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이나 지구 전체를 살피면서 겸손하게 살도록 이끄는 것이다.

 

 

최근의 우리 나라 상황을 보면, 다들 자기 밥그릇 싸움에 너무 치열하다. 행복을 이야기할 겨를이 없다. 그래, 각자도생(各自圖生)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늘 기억하고 있는,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치료법 중에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라는 치료법이 소환된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삶에 괴로움(불쾌) 또는 걱정이나 불안을 주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욕망이 존재한다는 거다.


- 자연스럽 필요한 욕망: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욕망으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
- 자연스럽지만 불필요한 욕망: 식탐이나 성적 욕망과 같은 감정들. 이런 감정들은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더 갈망하게 만들기 때문에 수련을 통해 제어해야 한다.
-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명예와 권력.

 

생존에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은 쉽다. 반면 명예와 권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선한 것은 단순하고 검소한 음식과 거주지이다. 이런 것들은 부와 권력과는 상관없이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 좋은 음식과 거주지를 원한다면 탐욕이 작동한다. 탐욕은 필요 없는 욕망과 걱정을 야기하며 불행을 초래한다. 그러니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라는 치료법은, 생존에 필요한 검소한 삶을 의미하며, 평온을 유지하기 위한 관조하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그 길이 오늘 아침 고유하는 화두인 ‘품위 있는 삶’을 사는 거다. 품위는 위대하지 않다. 우리를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주의자,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영웅, 이상을 위해 생애를 던지는 성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건 장은수 대표의 주장이다. 나도 동의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좋은 삶)라고 했다. 흔히 이 말을 행복(happiness)이라고 옮겨왔는데, 번창(flourishing)이 더 적합한 말이다. 영혼이 극단에 휩쓸리지 않고 아름다움, 절제, 지혜, 관용 같은 중용의 덕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은 나날이 번영한다. 한마디로 품위를 지켜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품위는 우리를 하루하루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갈수록 인생을 의미 있고 풍요롭게 만든다. 품위가 삶의 바탕을 이룰 때 개인도, 공동체도 미래에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가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기보다 타인의 존엄과 평등을 존중하고 겸손히 자신을 성찰하는 품위의 공동체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막말과 주먹질을 서슴지 않고 편법과 협잡을 당연시하는 삶을 바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악의를 품고 타인을 속이거나 해치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가 되려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이런 공통 감각이 무너질 때, 도덕은 타락하고, 사회는 양극 화하며, 공동체는 분열한다.

우리 사회는 이 “공통 감각”이 무너지고 있다. 그래 나는 내 텃밭의 공동체를 아끼고, 거기서 대안을 찾는다. 오늘도 함께 모여 파티를 한다.

 

농부 시인 서정홍의 시가 생각난다.

 

 

 

내가 가장 착해 질 때 / 서정홍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 박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