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칼을 찬 선비 : 남명 조식

道雨 2007. 10. 27. 19:09

 

 

 

           칼을 찬 선비, 칼을 품은 선비

명종 치하 ‘사화의 시대’에 제수된 벼슬을 한사코 거부한 남명 조식…“문정왕후는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소로 조정 흔들어

 

▣ 이덕일 역사평론가

 

  언제부턴가 선비와 칼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72)은 달랐다. <남명선생 별집(別集)> ‘언행총록’(言行總錄)은 조식이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경상감사 이양원(李陽元)이 조식에게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돈주머니)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의 칼에는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었다.

 

과거를 버리고 학문을 얻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義內明者敬/ 外斷者義)


△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던 남명 조식. 그는 명종 때의 정치가 하늘의 뜻, 즉 백성들의 마음과 어긋난다고 보았다. (사진/ 권태균)


  칼에 새긴 글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많은 사대부들이 형이상학을 논할 때 경(敬)과 의(義)를 새긴 칼을 차고 다녔다는 자체가 남다름을 말해준다.

  증조부가 한양에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주하면서 조식의 집안은 이 지역에 정착했는데, 그도 어린 시절 과거 공부를 했으나 곧 과거가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알게 된다.

  20살 때인 중종 15년 문과 초시에 합격했으나 송인수(宋麟壽·1499∼1547)가 선물한 <대학>(大學)의 책갑에 쓴 발문에 “과거 시험은 애초에 장부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19살 때인 중종 14년(1519)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가 발생하는데, 숙부 조언경이 함께 파직된 것도 과거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조식은 25살 때 친구와 산사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던 중 원나라 허형(許衡)의 글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윤(伊尹)에 뜻을 두고 안자(顔子)의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일을 해내고, 초야에 숨어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글이었다. 이윤은 탕왕(湯王)이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정벌하고 은(殷)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며, 안자(顔子), 즉 안회(顔回)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사자성어를 만들 정도로 가난을 선비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 벼슬에 나가면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초야에 은거하면 가난 속에서 도를 찾는 선비가 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벼슬에 나가 이윤처럼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기에는 당시 정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부친과 모친의 권유로 몇 번 더 과거에 나가기는 했으나 <대학> 발문에, “문장이 과거문장(科文)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미 마음은 과거를 떠나 있었다.

   30살 때 김해로 이주해 신어산(神魚山)에 산해정사(山海精舍)를 짓고 45살 때까지 거주했는데, ‘산해’(山海)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큰 학문을 하겠다는 뜻으로서 주자학의 굴레에 갇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연보>에 따르면 조식은 37살 때인 중종 32년(1537) “세상의 도리가 어긋나고 시속이 흐려져 과거로 출세한다는 것은 곧 이에 가담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어머니께 예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 공부를 영영하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바로 그해 학문을 가르쳐주기를 청하는 정지린(鄭之麟)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그가 훗날 북인(北人)이란 당파를 형성하는 첫 제자였다.

  세상사는 묘한 것이어서 과거를 포기한 이듬해부터 벼슬이 찾아왔다. 38살 때 이언적(李彦迪)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윤(伊尹)에게 뜻을 두고서도 그 뜻을 펼칠 수단인 벼슬을 포기한 것은 당시 정치 지형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다.

  당시는 척신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하는 사화의 시대였다. 45살 때인 인종 1년(1545)의 을사사화로 여러 친구가 희생된다. 병조참의 이림(李霖)은 사사(賜死), 사간원 사간 곽순(郭珣)은 옥사(獄死), 성운(成運)의 형 성우(成遇)는 이들을 옹호하다가 ‘역적을 구원하고 공신을 모욕한다’고 장사(杖死)한다. 조식은 죽을 때까지 이들을 잊지 못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분노했다.

   명종 2년(1547)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학>을 보내주었던 친구 송인수가 사사(賜死)당했다. 명종의 모후 문정황후와 그 동생 윤원형이 주도한 사화였다. 명종 3년(1548)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명종 6년(1551) 종부시 주부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거절한 것은 이런 정치 환경에 대한 거부감의 표출이었다.

 


△ 조식의 묘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조식은 죽는 순간까지 처사의 재야 정신을 지켰다. (사진/ 권태균)

지금 읽어도 놀라운 단성현감 사직상소

  조식의 거듭된 출사 거부는 뜻밖에도 퇴계 이황과 작은 논쟁으로 이어진다. 명종 8년(1553) 이황은 조식에게 편지를 보내 벼슬을 사양한 데 대한(‘여조건중’(與曹楗仲))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조식은 이황에게 답장을 보내 “식(植)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자신을 아껴서 그랬겠습니까?”라고 답하면서 “단지 헛된 이름을 얻음으로써 한 세상을 크게 속여 성상(聖上)에게까지 잘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도둑이라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관직)을 훔치는 데 있어서겠습니까?(‘퇴계에게 답합니다’(答退溪書))”라고 덧붙였다.

   퇴계 이황은 조식의 편지에 마음이 상했다. 사림의 종주인 자신의 천거마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식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천거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의미였다. 두 사람의 이런 출사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조식이 명종 10년(1555)에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즉 ‘단성현감(丹城縣監) 사직상소’였다.

  조식이 단성현감 제수를 사양하는 이유로 먼저 든 것은, 자신은 헛된 명성만 있지 벼슬을 감당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뒤이어 명종 즉위 뒤의 정사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평했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이는 명종의 10년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와 인심이 떠났다’는 말은 명종에게 천명이 떠났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더 놀라운 표현이 등장한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당대의 금기였다. 조식의 친구들이 죽은 을사사화나 양재역 벽서 사건은 모두 문정왕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명종 2년(1547) 경기도 광주의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 등이 권세를 종간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은 것이 양재역 벽서 사건인데, 조식의 친구 송인수를 비롯해 많은 사림들이 죽었고, 이후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금기 중의 금기가 되었다. 그런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칭하고, 명종을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라고 했으니 평상시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언급인데 하물며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실권을 장악한 사화 때였다. 그러나 윤원형과 문정왕후는 조식을 죽이지 못했다. 은거 선비의 사직 상소를 가지고 죽이는 것은 도리어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성현감 사직상소’는 은거 처사 조식을 단숨에 전국 제일의 선비로 만들었다. 사관(史官)이 ‘사신은 논한다’에서 “유일(遺逸·은거한 인사)이란 이름을 칭하고 공명을 낚는 자가 참으로 많은데, 어질도다. 조식이여!”라고 칭찬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퇴계집> ‘언행록’에 따르면 이황은 오히려 조식의 상소를 비판했다.

  “선생은 남명의 상소를 보고 사람에게, ‘대개 소장은 원래 곧은 말을 피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자세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뜻은 곧으나 말은 순해야 하고, 너무 과격하여 공순하지 못한 병통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예를 잃지 않을 것이요,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을 것이다. 남명의 소장은 요새 세상에서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은 정도를 지나 일부러 남의 잘못을 꼬집어 비방하는 것 같았으니 임금이 보시고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 조식이 61살 되던 해에 지리산 덕천동에 지은 산천재. 그는 72살 때인 선조 5년 이곳에서 삶을 마쳤다. (사진/ 권태균)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

  그러나 조식은 척신 윤원형이 주도하던 명종 치하에서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보고 상소를 올린 것이다. 사관은 조식의 상소를 둘러싼 논란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오늘날과 같은 때에 이와 같이 염퇴(恬退·고요하게 은거함)한 선비가 있는데, 그를 높여 포상하거나 등용하지는 않고 도리어 그를 공손하지 못하고 공경스럽지 못하다고 책망하였다. 그러니 세도가 날로 떨어지고 명절(名節)이 땅에 떨어진 것이 당연하며, 위망(危亡)의 조짐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조식이 분개한 것은 명종 때의 정치가 하늘의 뜻과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하늘의 뜻이란 곧 백성들의 마음이었다. ‘민암부’(民巖賦)에는 이런 생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경>(書經) ‘소고’(召誥)의 “백성의 암험함을 돌아보아 두려워하소서”란 글에서 나온 ‘민암’(民巖)은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민암부’는 ‘단성현감 사직상소’가 평소 그의 소신임을 말해준다.

  “…백성이 물과 같다는 말은/ 예로부터 있어왔으니/ 백성은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한다/ …한 사람의 원한과 한 아낙의 하소연이 처음에는 하찮지만/ 끝내 거룩하신 상제(上帝)께서 대신 갚아주시니/ 그 누가 감히 우리 상제를 대적하랴/ …걸(桀)왕과 주(紂)왕이 탕(湯)왕과 무(武)왕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백성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부로서 천자가 되었으니/ 이처럼 큰 권한은 어디에 달려 있는가?/ 다만 우리 백성의 손에 달려 있다/ …백성을 암험하다 말하지 말라/ 백성은 암험하지 않느니라.”

  백성이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하고 천자가 되는 것도 백성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조식과, 백성은 사대부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피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주자학자들과는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식의 사상은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단성현감 사직상소’에서 “불씨(佛氏·석가모니)의 이른바 진정(眞定)이란 것은 다만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니,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데 있어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라며 불교와 유교의 근본원리가 같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인물이 조식이었다.

  조식은 45살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48살 되던 해에 삼가현 토동(兎洞)에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학문에 몰두했는데,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나오는 ‘뇌룡’은 ‘고요히 있지만 신비한 조화가 드러나고 천둥 같은 소리가 난다’는 뜻으로서 은거함으로써 세상을 움직이겠다는 의지이다. 이황이 “남명의 본 바는 실로 장·주와 같다”라고 비판한 것은 조식이 이처럼 장자의 학설도 배척하지 않고 수용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조식은 61살 되던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이주했는데, ‘산천’이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밖으로 빛을 드러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는 갓 즉위한 선조가 교지로 부르자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사양하면서 개혁을 주문했다.

  그리고 72살 때인 선조 5년(1572) 산천재에서 세상을 마쳤다.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이 사후의 칭호를 묻자 “처사로 쓰는 것이 옳다. 만약 이를 버리고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사의 재야 정신을 죽는 순간까지 지녔던 것이다.

 

북인 제자들, 대거 의병장으로

  칼을 찬 선비 조식의 진가는 임진왜란 때 발휘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제자이자 외손서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해 수제자(首門) 격인 정인홍(鄭仁弘)과 김면(金沔), 그리고 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하락(河洛)·전치원(全致遠)·이대기(李大期)·박성무(朴成茂) 등 쟁쟁한 의병장들이 모두 조식의 제자였다. 그의 제자들로 형성된 북인은 의병장을 대거 배출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처사 조식은 선조 36년(1602)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광해군과 전란 극복에 힘쓰던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정계에서 축출되고, 주요 인사들이 사형되면서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조식이 64살 때인 명종 19년(1564) 이황에게 보낸 편지는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퇴계에게 드립니다’(與答退溪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