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0주년이다. 그해 죽음을 피해 태어나 살아남은 이들이 칠순을 맞았다. 70년. 희생자들의 주검이 흙으로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극우 반공국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여전히 그날의 상처에 괴로워하며 몸서리치는 유족들에게 대한민국은 얼마나 떳떳한 나라일까. <한겨레21>이 다시 4·3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이유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해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6만5천여 명의 병력과 각종 중화기를 제주도에 배치해 미군과 전투에 대비했다. 공출에 시달려온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군사기지 건설에 강제 동원됐다. 미군기는 제주도 상공에 나타나 소이탄을 투하하고, 미잠수함은 제주도 주변 해역에 출현해 선박들을 격침해 수백 명이 숨지고, 제주도의 산업시설이 파괴됐다.
해방은 ‘죽음으로부터의 탈출구’였다. 해방 직후 제주 지역에서는 청장년들을 중심으로 자치기구 건설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중앙의 움직임에 발맞춰 제주 지역에서도 1945년 9월 들어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이어 이 조직은 제주도 인민위원회로 재편됐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주도한 인민위원회는 치안 활동은 물론 자치 교육에 힘썼다. 미군정(제59군정중대)이 제주도에 들어온 것은 한반도가 해방되고 3개월 가까이 지난 11월9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해방이 되자 일본 등지로 떠났던 제주도민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주도 인구는 해방 전해인 1944년 21만9천여 명에서 1946년 27만6천여 명으로 2년 새 5만6천 명 이상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은 전국적인 대흉년과 맞물려 사회경제적으로 제주 사회를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1946년 제주도의 보리 수확량은 해방 이전인 1943과 1944년에 견줘 각각 41%, 31%에 그쳤다. 제조업체의 가동 중단과 높은 실업률, 미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제주 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기근이 심했던 1946년 여름 제주섬을 휩쓴 콜레라는 2개월여 동안 최소 369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군정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때 제주도민들을 압박하고 수탈하는 데 앞장섰던 경찰과 관리들을 해방 후에도 기용했다. 이들은 후술할 ‘3·1사건’ 이전 각종 불법적 이권에 개입해 미군정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낳았다.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보루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제주4·3특별법)은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대로 3·1사건은 4·3의 도화선이었다.
1947년 3월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는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가 열렸다. 행사는 2만5천~3만여 도민이 대회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렸다.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도한 기념대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벌이던 중 관덕정 광장에서 이를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채여 넘어지는 사고가 터졌다. 경찰은 이를 그냥 지나쳤다. 항의하는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가는 순간, 다른 지방에서 온 경찰이 그들에게 총을 쏘았다. 6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다. 광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이들 가운데는 초등학생과 젖먹이를 안은 20대 젊은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경찰은 책임자 처벌은커녕 그날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미군정 경무부는 경찰을 추가 파견해 참가자 검거에 들어갔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3월10일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관 총파업을 벌였다. 발포 책임자와 발포 경찰의 즉각 처벌 등 6개항의 요구 조건을 내건 총파업에 제주도청을 비롯한 학교, 은행, 우체국 등 166개 기관 단체, 제주 직장인의 95%에 이르는 4만여 명이 참여했다. 현직 경찰관들도 파업 대열에 참여했다.
경찰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3월14일 제주도 방문에 맞춰 파업 참가자 대량 검거에 나서 닷새 만에 200여 명을 검거했다. 조 경무부장은 3월20일 담화문을 발표해 경찰 발포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이날 총성이 4·3이라는 커다란 비극으로 가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3·1사건과 3·10 민관 총파업의 영향은 컸다. 마침 1947년 3월12일 미국은 냉전 체제 시작을 공식화하는 선언이라 할 수 있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리스 내전으로 촉발된 이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임했다. 이 독트린은 미군이 제주도 사태에 개입할 논리적 근거가 됐다. 한반도 남쪽 끝 제주섬에서 3·1사건 발포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민관 총파업이 벌어지던 때, 미군정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했다.
먼저 제주도지사가 교체됐다. 그때까지 제주도지사는 제주 출신 박경훈이었지만, 1947년 4월 극우파로 평가받는 외지 출신 유해진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단체나 인사들을 ‘좌파’라 몰아붙이며 우익 강화 정책을 폈다. 그의 행정은 제주도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서청)이 제주도에 들어와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고, 자금 모금 명분으로 테러를 일삼았다. 심지어 서청 제주도단부 간부는 1947년 11월, 미군정에 제주도를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며 이를 입증해 보이겠다고 할 정도였다. 미군 방첩대가 1947년 12월 입수한 정보를 보면, 경찰이 이른 시일 안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하면 모든 단체가 제주 경찰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견할 만큼 제주 사회는 혼돈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
대량 검거 바람으로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1948년 2월 현재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사람은 365명으로, 3.4평 크기의 방에 35명이 수감될 정도였다. 1947년 3·1사건 이후 1948년 4·3이 터지기 직전까지 2500여 명이 검거됐다.
주한미군정청 특별감찰실은 유해진을 특별감찰해 1948년 3월 유해진의 경질을 건의했지만, 5·10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기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1948년 2월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제주 지역에서도 검거 바람이 불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와해 위기에 몰렸다.
이 와중에 3월6일 조천면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원생 김용철(21)이 경찰 고문으로 숨졌다. 중학원생들과 주민들은 지서 앞에 몰려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분노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3월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대정면 영락리 양은하(27)가 숨졌다. 경찰의 잇단 고문치사 사건은 3·1사건 이후 도지사의 독단적 행정, 대량 검거 등으로 부글부글 끓던 민심에 불을 지폈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5·10 단독선거 반대’를 기치로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350여 명으로 추정되는 무장대는 단독선거 반대를 내걸고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 등을 공격했다. 이들이 보유한 무기는 일본군이 쓰던 99식 소총 등 30정 안팎과 죽창이었다. 경찰과 서청의 제주도민에 대한 폭압적 행동은 봉기의 촉매제 구실을 했다. 당시 이인 미군정 검찰총장은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 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다”라고 진단했다. 언론은 ‘경찰의 민심 이반’을 지적하며, 서청을 해산하고, 사법·행정·경찰 수뇌부의 인적 재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딘 군정장관이 도지사 유해진을 경질한 것은 4·3무장봉기가 일어나고, 5·10선거가 끝난 뒤인 1948년 6월이었다.
딘 군정장관은 4월16일 경비대의 합동작전을 명령하는 등 제주도 사태 진압을 지휘했다. 제주도 주둔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과 제주도 인민유격대(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이 4월 말 평화협상을 벌여 사태 해결에 합의했으나, 미군정의 무력 진압 방침으로 합의가 깨졌다. 이즈음 미군정은 4월27~28일 주한미군사령부 작전참모의 제주도 현지 시찰과 지도, 29일 딘 군정장관과 광주 주둔 미국 제6사단장 워드 소장의 제주도 동시 시찰 등의 활동에 나서며 긴박하게 움직였다. 딘 군정장관은 선거를 닷새 앞둔 5월5일에도 안재홍 민정장관 등 미군정의 한국인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도 현지에서 대책회의를 열 정도로 제주도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반면 무장대는 선거일이 다가오자 선거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선거 방해에 총력을 기울였다. 선거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 가운데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 등 2개 선거구가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선거의 성공이 미사절단의 ‘핵심 임무’라며 독려하고, 딘 군정장관이 제주도를 2차례나 방문하는 등 선거 성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선거는 실패로 끝났다.
당시 5·10선거 반대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까지도 가세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은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단독정부 반대 남북협상 추진을 내걸고 통일운동을 주창한 김구·김규식 등의 노선, 다른 하나는 미군정과 보조를 맞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노선이었다.
미군정의 강경 진압 강도는 더 세졌다. 5월12일, 미 극동사령부는 제주도 소요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구축함을 급파했다. 또 미군정은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5월 중순께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외국의 ‘전투 현장’에 현지 군대가 아닌 미군 지휘관을 진압작전 책임자로 파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5·10선거 이전 하지 장군이 미군 개입 금지를 지시했던 것과 달리 선거가 끝난 뒤에는 야전군 지휘관 출신인 브라운 대령을 파견한 것이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
“상공에는 미군 정찰기가 날고, 제1선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미군 지프가 질주하고 있으며, 해양에는 근해를 경계하는 미 군함의 검은 연기가 끊일 사이 없이 작전을 벌였다”는 언론 보도(<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6일치)가 나올 정도로 미국은 제주도 사태에 깊숙이 개입했다.
브라운 대령은 “(무장 대립의)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라며 2주면 이 사태를 평정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작전 아래 진행된 경비대 11연대의 ‘비민분리’ 정책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6월 중순까지 붙잡힌 제주도민은 6천여 명에 이르렀다. 6월18일 강경진압 작전을 벌이던 11연대장 박진경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브라운 대령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제주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6월23일 재선거도 무기한 연기됐다. 두 차례에 걸친 선거 실패는 향후 벌어질 강력한 토벌 작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11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 병력을 증원했다. 제주도 주둔 9연대장 송요찬은 10월17일 해안선에서 5km 이상 내륙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사실상 고립무원의 섬이 된 제주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와 주민들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하고, 방화와 학살을 일삼았다. 해안마을로 소개된 주민들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4·3 시기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5개월여 동안 방화와 학살이 제주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1948년 12월 말 진압 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이 이끄는 2연대도 토벌 작전을 계속했다. 1949년 1월17일 하루에만 300여 명을 학살한, 4·3 시기 대표 학살 사건인 ‘북촌 사건’은 2연대가 저질렀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북촌 사건 나흘 뒤인 1월21일 국무회의에서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하라”고 지시했다. 제주섬은 ‘죽음의 섬’으로 변해갔다.
미국은 4·3 전개 과정에서 직간접으로 개입했다. 정부 수립 이전에는 직접 최고 지휘관으로 진압작전을 주도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이 초토화 시기인 1948년 11월 제주도 토벌을 격려했다. 송요찬 9연대장은 미군 조종사의 정보 제공에 감사를 표할 정도였다. 초토화 시기 소련 잠수함의 제주도 연근해 출현설이 떠돌았다. 그때마다 외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모두 가짜뉴스였다.
이승만 정부 집단처형 승인
4·3 진압 과정에서 서청은 군인으로, 경찰로 변신해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4·3을 체험한 이들은 서청을 가리켜 “인간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청은 1948년 11월9일 김두현 제주도청 총무국장을 고문치사했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무장대의 공격으로 인명 피해도 많았다. 1948년 11월 이후 무장대는 토벌대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구좌면 세화리, 남원면 남원리와 위미리 등 일부 마을을 습격해 학살과 방화를 하는 등 큰 피해를 줬다.
1949년 6월7일 이덕구 무장대 사령관이 사살됐다. 중학원 교사 출신인 이덕구는 1948년 8월 김달삼이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 참석을 위해 제주를 빠져나간 뒤 무장대 사령관이 된 인물이다. 그의 죽음은 사실상 4·3의 종식을 뜻했다. 그러나 ‘붉은 섬’으로 규정된 제주도민에게 정부의 탄압은 가혹했다. 1949년 10월2일에는 이승만의 승인에 따라 249명이 정뜨르비행장(제주국제공항)에서 집단처형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와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됐다. 1950년 7월16일과 8월20일 두 차례에 걸쳐 대정면 섯알오름 옛 일본군 탄약고 터에서 계엄군이 예비검속한 250여 명이 집단학살됐다. 또 한국전쟁 시기 제주에서 다른 지방 형무소(교도소)로 이송된 4·3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가운데 만기 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 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전쟁이 난 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행방불명됐다. 제주4·3은 제주도경찰국이 1954년 9월21일 한라산 입산통제 지역인 ‘금족 지역’을 전면 개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다.
4·3이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것은 인명 피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4·3 희생자로 결정한 인원을 보면, 2017년 7월25일 현재 희생자 수는 1만4232명이다. 희생자에는 사망자(1만245명), 행방불명자(3575명), 후유장애인(164명), 수형인(248명)이 포함된다. 그러나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희생자 수를 2만5천~3만 명으로 추정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이르는 수치다. 정신적·물적 피해는 마을 공동체의 파괴, 공공시설과 산업부문의 파괴 등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영원히 사라진 ‘잃어버린 마을’도 100여 곳에 이른다. 연좌제는 제주도민들에게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군경 토벌대에 희생됐거나 수형 생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감시당하고, 공무원 임용이나 사관학교 입시 등 각종 시험, 공기업 입사, 국내외 여행과 출입국 과정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다.
4·3 추념식 참여한 유일한 대통령
이제 4·3 70주년을 맞았다. 4·3 추가 진상조사를 통해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역사적 정명(正名·올바른 이름을 찾음)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약속했던 4·3 희생자들 보상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결돼야 할 과제다. 화해와 상생은 지역사회 발전의 정신적 토대다. 비극적 역사를 통해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되새기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키우는 여정이 제주도민들에게 남아 있다.
제주=허호준 <한겨레> 기자 hojoon@hani.co.kr
4·3의 가해자들
송요찬, 함병선, 이승만… 그리고 미국
7년7개월 동안 이어진 제주4·3으로 제주도민 10명 가운데 1명이 희생됐다. 수많은 죽음과 엄청난 재산 피해 등을 가져온 4·3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2003년 12월 발표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집단 인명 피해 지휘 체계를 볼 때, 중산간 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 작전을 폈던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보고서가 언급한 9연대장과 2연대장은 송요찬과 함병선이다. 실제 초토화 시기 이들이 제주 토벌 작전을 진두지휘했고, 이 와중에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미군 정보보고서(1949년 4월1일)조차 “제9연대는 모든 주민이 게릴라에 도움과 편의를 주고 있다는 가정 아래 민간인 대량학살 계획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또 9연대에 이어 들어온 2연대의 작전 시기인 1949년 1월17일에는 하루 300여 명이 학살된 이른바 ‘북촌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2연대 3대대다.
그러나 인명 피해의 최종 책임자는 보고서에서도 밝히듯 이승만 대통령이다. 보고서는 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전남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다.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강경 작전을 지시했음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책임도 거론된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1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4·3은 미군정 시기에 시작돼 한국전쟁이 끝난 뒤 막을 내렸다. 보고서는 “4·3사건의 발발과 진압 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며 미군 대령이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되고, 진압 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는 한편 로버츠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은 초토화 시기 9연대장의 지휘를 높게 평가했다고 밝혔다. 주한미대사 무초와 참사관 드럼라이트 등도 지속해서 4·3의 전개에 관심을 가지고 이 대통령 등을 만나 주의를 환기시켰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2016년 제주4·3평화포럼과 지난해 제2회 제주4·3평화상 시상식 참석차 제주를 찾았을 때 “이 사건은 미국이 자신의 명령으로 발생한 행위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지고 있을 때 발생했다. 4·3 당시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던 미국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말했다. 이들 외에도 제주도민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던 당시 경찰과 서북청년단도 가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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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뿌리를 기억하라
70주년 맞아 새롭게 떠오른 정명(제 이름 찾기) 운동…
원인 외면하고 학살에만 초점 맞추면 ‘절반의 기억’ 머물러
해방공간은 극적인 시대였다. 해방과 분단, 좌익과 우익, 혁명과 반혁명의 시간이 공존했다. 해방의 기쁨과 새 세상에 대한 열망은 벼락처럼 왔다가 한순간 꿈처럼 사라졌다. 고작 3년도 채 안 된 시간이었지만 해방공간은 새 세상의 열망이 곳곳에서 분출하는 나날이었다. 그 열망은 한반도 끝자락 제주에서 폭발했다.
금기 깬 ‘순이삼촌’
70년 전,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과 인근 오름들에서 봉화가 올랐다. 미군정과 경찰 폭압에 맞선 자위적인 투쟁을 위해,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기치로 내걸며 봉화가 올랐다. 평범한 제주민들도 선거를 피해 산에 올랐다. 결국 제주 3개의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의 투표가 무효가 됐다. 제주는 단독선거를 저지한 유일한 지역으로 한국현대사에 남게 됐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제주도민 10분의 1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됐고, 금기의 시간이 이어졌다. 제주4·3의 기억이 표출되려면 10여 년 뒤 도래할 4·19라는 혁명적 상황을 기다려야 했다.
4·19혁명 직후 1960년 5월23일 국회에서 거창, 함양, 남원, 영암, 함평, 문경 등지의 양민학살 사건 조사단 구성이 의결되자 제주에서도 4·3 진상규명 여론이 높아졌다. 그 계기는 1960년 5월 제주대학교 학생 7명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해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호소문을 <제주신보>에 발표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 양민학살 관련 현지 조사에 앞서 제주신보사가 6월2일 사고(회사에서 내는 공고)를 내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렸다. 접수된 신고는 사흘 만에 1259건, 인명 피해는 1457명이었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진상규명 논의는 중단됐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쿠데타 직후 제주뿐 아니라 전국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인사들이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이 금기를 깬 것은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이었다. 1978년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순이삼촌>은 북촌리 학살 사건을 그린 소설로서 4·3의 참혹상과 상처를 폭로해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등 필화 사건을 겪었다.
이후 4·3의 조직적 진상규명 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1986년 무크지 <녹두서평>에 이산하의 시 ‘한라산’이 발표되며 4·3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40주년을 맞아 추모모임과 학술세미나가 열렸고, 1989년 처음 공개 추모제가 거행됐다. 1989년 5월10일에는 제주4·3연구소가 조직돼 현장에서 진상규명 작업을 시작했다.
학계에서도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4·3 연구가 시작됐다. 제주 지역에서 헌신적인 증언 채록이 이뤄졌고, 미국 자료가 공개되며 연구가 활기를 띠었다. 1988년에는 자료집 <제주민중항쟁>과 <잠들지 않는 남도>가 출간됐다. 이어 본격적인 학술연구로 정치학 논문 두 편이 나와 4·3 연구의 기초를 담당하게 되었다. 1980년대의 연구는 역사적 사실을 복원함으로써 4·3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민주화운동 거치며 진전
특히 1980년 말 시작된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40여 년 동안 침묵 속에서 한을 삼켜왔던 유족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4·19 이후 1987년 6월 항쟁까지 유족들의 공적 증언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은 그동안 4·3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는지 보여준다. 1980년대 진상규명 운동을 통해 4·3은 제주도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중앙으로 진출하게 됐다. 4·3이 제주도만의 4·3이 아니라 통일운동이자 민중항쟁으로 한국현대사에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4·3 진상규명 노력을 진전시킨 것은, 다시 제주 출신 인사들과 제주도민이었다. 제주4·3연구소의 증언 채록과 1990년 6월부터 연재된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가 출판되며 4·3의 원인, 전개 과정, 피해 상황 등 전모가 소상히 드러났다. 1992년 제44주년 4월제 행사와 세미나는 제주도를 넘어 전국 단위로 확대돼 열렸다. 그런 의미에서 1992년은 4·3의 전국화가 추진된 해였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등 제주와 서울의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는 4월1일부터 7일까지를 ‘4·3영령 추모 기간’으로 정해 추모제를 열었다. 한편, 그해 다랑쉬굴에서 처참한 4·3 피해자들의 유해가 발굴됐다.
이 시기 진상규명 운동의 성과는 재야의 틀을 벗어나 공적 기구에서 해결책이 모색됐다는 점이다. 1993년 3월20일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이듬해 제주도의회는 ‘4·3피해신고실’을 개설했다. 피해 신고에 따라 1995년 제주도의회는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를 펴냈다.
1994년은 4·3 시민단체와 유족회가 함께 주최한 첫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제주 지역 12개 시민단체가 모여 구성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는 1989년부터 5년째 4·3추모제를 열어왔다. 이에 반해 반공유족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당시 ‘4·3유족회’는 1991년부터 3년째 따로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었다. 제주도의회가 중재에 나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1998년 4·3 50주년을 전후해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를 위해 ‘제주4·3특별법 제정’ 운동이 제주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새천년을 맞이하기 전에 특별법을 쟁취하기 위한 제주도민과 유족들, 시민단체들의 헌신적인 투쟁이 이어졌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12월16일 특별법이 통과됐고, 2000년 1월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됐다.
새천년에 제정된 제주4·3특별법에 기반해 2003년 10월15일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해 10월31일 국가권력의 잘못에 공식 사과했다. 보고서는 4·3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했다. 4·3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식 이해가 바뀐 것이다.
극우세력의 4·3 흔들기
진상조사 보고서 채택 이후 본격적으로 4·3 명예회복 과정이 진행됐다. 제주4·3평화공원이 조성되고 4·3기념관, 4·3평화재단이 조직됐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3 최대 암매장지로 파악된 제주공항 등에서 부분적이나마 희생자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현장의 참혹함은 유족과 도민에게 4·3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일깨워줬다.
이명박 정부에서 극우세력의 4·3 흔들기가 계속됐으나, 그때마다 실패로 끝났다. 적극 대응한 것은 유족회였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4·3의 피해자인 유족들의 인식과 역할이 크게 달라졌다. 2001년 3월 전체 유족을 통합한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가 조직되면서, 유족들은 진상규명의 주체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2014년 4·3을 국가추념일로 제정했다.
60주년인 2008년 4·3의 정명(正名·제 이름 찾기)을 둘러싼 문제제기가 본격화했다. 이는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배제된 ‘항쟁의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자는 논의와 맞물려 있다. 4·3 추모행사 직후 제주4·3진상규명 명예회복추진 범국민위원회가 주관한 ‘4·3의 정명을 위한 토론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제주4·3연구소 주최의 ‘4·3 6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도 같은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나 (무고한 이들의) 희생에 초점을 맞춘 명예회복 작업이 대중적 공감을 얻는 상황에서 (제주도민들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항쟁의 역사 찾기는 현실적으로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제 4·3은 70주년을 맞는다. 70주년은 피해자와 유족들이 생존할 때 이뤄지는 마지막 기억투쟁이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기념사업위원회, 전국 조직으로는 범국민위원회를 만들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개별 배상과 사자명예훼손 조항이 들어간 4·3특별법 개정안을 만들었고, 다시 한번 역사적 정명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70주년을 맞아 전국에 4·3분향소가 설치되고, 4월7일 광화문문화제가 열린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4·3아카이브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제주가 아니라 서울 중심부에서 시민들이 4·3과 만날 것이다.
70년 전 제주는 수많은 인적·물적 피해뿐 아니라 처참한 공동체 파괴를 겪었다. 그 고통 속에 이뤄진 진상규명 운동은 제주도민 내부의 갈등을 치유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화해하는 등 과거사 청산의 모범적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또 평화교육이 이루어져 4·3은 미래 세대와 만나고 있다. 제주도민에게 4·3의 상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현재진행형이다.
원인 묻어둔 채 결과만 논해
그러나 4·3이 왜 일어났는가를 기억하는 것도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이 4·3의 원인은 묻어둔 채 결과만을 얘기한다. 물론 참혹한 죽음 앞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통일운동이라는 4·3의 ‘저항과 항쟁’의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4·3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며, 학살에만 초점을 맞추면 제주도민이 역사 속에서 항쟁의 주체로 존재했던 사실을 배제하는 ‘절반의 기억’에 머무르고 만다. 학살론을 통해 국가폭력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이것만 강조하면 제주도민은 일방적인 피해자 지위에 머무르고 만다. 이는 우리가 여전히 ‘가해자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뜻한다. 저항적 기억투쟁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양정심 대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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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반공국가의 탄생
4·3 진압 명령 거부한 14연대 군인들 봉기한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과 숙군, 국보법, 보도연맹 낳으며 분단체제 공고화
역사의 도미노였다. 제주4·3은 여순사건을 낳았고 여순사건은 분단체제를 완성했다.
정부 수립 2개월 만인 1948년 10월19일, 4·3 진압을 거부하며 국군 제14연대가 봉기했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가용 병력을 총동원해 초토화 진압 작전을 벌였다. 반란군과 민간인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차별 진압과 이른바 부역자 색출로 전남 동부권은 피로 물들었다. 이후 군내 남로당(남조선노동당)계만이 아니라 광복군계를 포함한 대부분의 반이승만계를 솎아내는 대규모 숙군 작업이 진행됐다.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됐고 좌익 인사를 계도한다며 전국적 어용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됐다. 극우반공주의 국가의 탄생이었다. 남은 좌익 세력과 피란민들은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 투쟁을 벌였고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직전까지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 1948년, 내전은 이미 시작됐다.
“동족상잔의 제주 출동 반대한다”
14연대가 육군본부로부터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것은 10월15일이었다. 김지회 중위, 지창수 상사, 홍순석 중위 등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 간부들은 출동 시각인 19일까지 나흘 사이에 진압과 봉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들은 뒤쪽을 택했다. 이날 밤 9시, 14연대 소속 군인 2천여 명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며 총구를 제주에서 여수로 돌렸다. 여순사건의 시작이었다.
전남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는 1948년 5월 초 확군(擴軍) 작업의 하나로 광주 국방경비대 제4연대 1대대를 기간병력으로 창설했다. 이 연대에는 여순사건의 주모자가 될 좌익계 군인들이 사병에게 영향을 끼칠 주요 보직에 포진해 있었다. 게다가 경찰 수배를 받던 좌익 동조자들과 일반 범죄자들도 경찰 추적을 피해 쉽게 입대할 수 있었기에 경찰에 대한 적대감이 높았다. 여순사건을 좌익 군인과 친일 경찰의 충돌이라고 해석한 배경이다.
14연대 반군은 지창수 상사 등의 지휘 아래 차량을 동원해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여수 시내에 진입했다. 10월20일 반군 주력 부대가 시내에 진입해 교전이 일어났다. 소수의 경찰 병력은 반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반군이 시내에 들어오자 여수 시민 600여 명이 반군에 합세했다. 이날 오전 9시 반군은 여수시를 장악했다. 반군은 주요 기관과 건물을 접수하고 체포된 경찰관, 기관장, 우익 청년 단원, 지역 유지 등을 여수경찰서 뒤뜰에서 집단 사살했다. 이어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민공화국 깃발이 주요 건물에 걸렸다.
여수를 장악한 반군 2개 대대는 10월20일 오전 9시30분께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여수역에서 통근열차를 이용해 전남 순천으로 북상했다. 순천역 앞에서 대기하던 홍순석 중위 휘하 순천 파견 2개 중대가 즉시 반군에 합류했다. 광주에서 급파돼 순천교와 순천역에 배치됐던 제4연대 1개 중대도 반란에 반대하는 일부 사병을 사살한 뒤 반군에 가담했다. 20일 오후 3시께 순천 시내를 완전 점령한 반군은 병력을 3개 부대로 재편성했다. 주력 1천여 명은 구례·곡성·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보성·화순 방면으로, 나머지는 경상도 지방 진출을 위해 광양·하동 방향으로 진격했다. 남원·구례·보성 등지에서는 반군이 도착하기 전에 지방 좌익 세력이 지역을 점령해 14연대가 무혈 입성하는 일도 있었다. 그동안 비합법 상태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지역 남로당원 등이 사건에 적극 가담했다.
이승만 “아동이라도 불순분자 제거”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해 진압에 나섰다. 육군총사령부는 10월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관에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임명해 제2여단과 제5여단을 지휘하게 했다. 또한 제2여단장에 원용덕 대령, 제5여단장에 특별부대사령관 김백일 중령을 임명해 진압작전을 맡겼다. 같은 날 육군 5개 연대, 비행대, 수색대를 뼈대로 한 진압부대가 편성됐다. 반군의 대응이 예상외로 강력해지자, 10월22일에는 부산에 주둔한 제5연대가 추가로 진압작전에 동원됐다.
이와 함께 정부는 10월22일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군법에 의해 사형 등에 처한다고 밝혔다. 대통령 이승만은 10월23일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사건의 원인이 공산주의, 좌익세력에 있다고 본 것이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와 같은 이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승인대로 군경은 진압 과정에서 반군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민간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살했다. 미군 관계자가 “정부군은 공산주의 봉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드는 사람은 사살하고 다녔다”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다.
봉기는 진압군이 23일 순천을 점령한 데 이어 27일 여수를 탈환하면서 종결됐다. 곧바로 피의 보복이 이어졌다. 이적행위자 색출은 손가락으로 지목하는 1단계와 심문·재판의 2단계로 진행됐다. 경찰·청년단원·학련생·우익인사 등이 머리가 짧거나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을 가려냈지만 개인적인 원한 관계로 억울하게 지목당해 목숨을 잃은 이도 많았다. 말 그대로 ‘손가락 총’이었다. 반군의 즉결처분에 가담하거나 반군 점령 기간에 인민재판에 앞장섰다고 지목된 자는 그 자리에서 곤봉·개머리판·체인 등으로 맞아 죽거나 총살당했다. 2단계 심사를 거친 이들은 즉석에서 총살되거나 군경에 넘겨졌다. 이 과정이 수개월간 계속됐다. 1949년 11월 전남도는 여순사건의 인명 피해를 1만1131명으로 집계했다.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반군과 지방 좌익들은 산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에 토벌대는 빨치산의 보급로가 된다는 이유로 지리산과 조계산, 덕유산 인근의 마을을 초토화했다. 살기 위해 빨치산에게 식량과 편의를 제공한 주민들은 부역자로 몰려 즉결처형됐다. 피아 식별이 어려운 게릴라전의 특성에 일본 전체주의의 유산,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유사인종주의가 더해져 극도로 무자비한 방식의 학살이 자행됐다.
한반도 방방곡곡 피로 물들여
반군의 여수·순천 지역 점령 기간에 이뤄진 경찰과 그 가족, 공무원들에 대한 처형과 진압 이후 이른바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보복 학살은 지역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이 비극은 비단 여수·순천만의 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종전까지 공권력이 벌인 잔인한 보복은 한반도 방방곡곡을 피로 물들였다. 대한민국은 무덤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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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뜨르 비행장에 평화 내릴까
일본이 제주에 만든 군사 비행장…
거대 군사기지로 변모하는 제주, 알뜨르 평화대공원 조성 계획 무색
1944년 말 일본군은 일본 본토 방위를 위해 ‘결호작전’(決號作戰)을 세웠다.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 경로를 예상해서 제주도를 작전계획에 포함시켰다. 이 작전을 ‘결7호작전’이라 한다. 제주도 방어를 전담하는 제58군 사령부가 창설되고, 그 밑에 관동군 111사단과 121사단이 투입됐으며, 신설된 제96사단과 독립 혼성 제108여단을 비롯한 여러 부대가 합류했다. 1945년 3월부터 8월까지 모두 7만5천 명의 일본군이 제주도에 들어와 미군 상륙을 대비하면서 전투를 준비했다.
일본의 제주 요새화 작전
이들의 임무는 제주섬 전체를 요새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제주도민을 동원해서 비행장 4곳, 해안 특공기지 6곳, 그리고 산악 지역에 수백 개의 지하호를 만들어놓았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비행장, 포대, 참호, 훈련장, 감시 초소, 대피소, 비행기 격납고, 탄약고, 폭탄 매립지 등 일본군 군사시설을 볼 수 있다. 한라산 중턱에는 ‘하치마키’(鉢卷)라는 이름의 군사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외에 각 진지와 진지, 진지와 포구를 연결하는 도로도 남아 있다.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처음엔 해안에 진지를 만들어 상륙하는 미군과 싸울 계획이었으나, 나중에 내륙 결전 작전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8월에는 해안선을 따라 배치된 병력이 중산간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군의 상륙을 허용하되 중산간 지역에 진지를 쌓아 유격전을 펴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되면 주민들이 전투에 말려들어 큰 피해를 입는다. 일부 주민을 본토로 소개(疏開)했던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와 달리, 제주도에선 노약자들을 육지로 피신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주민들은 마을에 그대로 남았다. 전투가 벌어지면 제주도민들이 일본군의 유격전에 휩쓸려버릴 가능성이 컸다. 실제 오키나와에선 1945년 4월1일 미군 상륙 이후 3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의 희생자는 20만 명이 넘고, 그중에서 군인으로 징집된 젊은이까지 포함해 오키나와 주민이 15만 명이나 됐다. 1945년 여름 미군이 상륙해 제주도에서 지상전이 벌어졌다면 당시 17만 명이던 제주도민 역시 큰 희생을 치렀을 것이다.
일본군이 전투 준비를 위해 파놓은 방어 진지는 100곳이 넘는다. 이 가운데 파괴되거나 사라진 곳이 많지만, 아직도 많은 전적지(전쟁의 흔적이 남은 곳)가 남아 있음이 최근 조사에서 확인됐다. 일본군이 만들어놓은 비행장과 해안 특공기지도 확인됐다. 하지만 해방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일본군 전적지는 학계와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본군과 관련된 전쟁 유적은 한국인에게는 일본이 점령해 식민지배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유산에 지나지 않았다.
제주도 서남부 대정 지역은 군사전략상 요충지답게 알뜨르 비행장, 오무라 해군 항공대 막사, 섯알 오름의 고사포진지와 지하호, 해안 특공기지 등 많은 일본군 전적지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알뜨르 비행장은 일본 해군이 중일전쟁 초기에 만든 것이다. 1933년 약 6만 평 규모의 ‘제주도 비행기 불시착륙장’(濟州島 飛行機 不時着陸場)을 조성했다. 처음 건설할 때만 해도 해군 항공대가 주둔하는 정식 항공기지가 아니라, 중국과 전쟁에 대비해 임시용으로 만든 중간 기착지였다. 그런데 불과 3년 뒤인 1936년 11월 제주도 착륙장 6만 평을 14만 평 넓힌 20만 평으로 증설하라는 훈령이 내려진다. 일본군은 마을과 농경지를 석 달 열흘 만에 모두 매입했는데, 이처럼 신속한 매입은 경찰의 입회 아래 이뤄진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전쟁 아픔 간직한 알뜨르 비행장
1937년 8월부터 일본 해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에 도양폭격(渡洋爆擊)을 시작했다. 이때 알뜨르 비행장은 난징을 비롯한 중국의 중요 도시를 폭격하는 중심 기지가 됐다. 제주도에서 이뤄진 난징 공습은 36회고 여기에 참여한 항공기는 연 600기, 투하 폭탄의 총계는 300t에 이른다. 이 때문에 난징에서 많은 사람이 살상됐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터진 뒤 알뜨르 비행장은 다시 한번 중요성을 인정받아, 또다시 확장 공사에 들어갔다. 기지 20만 평을 80만 평 규모로 확장하는 계획이었다. 이 확장으로 해당 부지에 있던 6개 마을이 사라졌고, 그 마을의 주민들은 주변 지역으로 강제 이주됐다. 제주도민을 노동자로 동원한 이 공사는 전쟁 막바지까지 계속됐다.
알뜨르 비행장 일대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군의 훈련소로 활용됐다. 당시 한국군이 모집한 육군과 해병대 병사들의 훈련은 모두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중공군 포로수용소도 설치됐다. 이곳은 3년 넘게 한국군의 주요 활동 무대였지만,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 다시 빈터가 됐다.
정부는 사용이 끝난 이 터를 대정 지역의 원소유주들에게 돌려줘야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토지를 돌려달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 시기는 제주4·3 학살 직후였고, 군인들의 세상이었다. 국가는 비행장 부지를 원래 토지 소유자에게 반환하지 않고, 국방부 소유로 묶어놓았다. 지금까지 국방부는 비행장 부지 일부를 주민들에게 농경지로 사용하도록 허용하고 소작료를 받아왔다. 1987년 대통령선거 때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지역주민에게 알뜨르 비행장 터를 ‘불하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기대하게 했으나, 대통령이 된 뒤 국방부가 반대하자, 없었던 일이 되었다.
한국군은 정전협정을 맺은 1953년 이래 휴전선 일대에 병력을 집중 배치해왔다. 그러나 냉전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생기고 상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전쟁 위협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한국군이 한반도 남쪽에 새 군사기지를 세우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였다.
1988년 공군이 대정 모슬포 지역에 공군 비행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은 알뜨르 비행장 부지를 포함한 197만 평에 새로운 비행장과 각종 기지를 짓는 것이었다. 이 계획이 실행되면 3개 마을이 사라질 것이었다. 지역주민뿐 아니라 제주도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반대운동을 펼치면서 계획은 백지화됐다.
알뜨르를 평화의 들판으로?
2001년에는 국방부가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항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주민들이 시민사회단체들과 반대운동을 펼치자, 해군기지 건설안은 백지화됐다. 해군은 2005년 봄에 더 큰 계획을 들고 왔다. 8천억원을 들여 12만 평 기지를 건설해 해군 7500여 명을 상주시키고 기동함대의 주력 전투함인 이지스함(KDX-3)을 비롯한 함정 20여 척을 계류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국방부는 제주도 당국의 협력을 얻어 후보지를 변경해가며 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였다. 화순 주민이 반대하자, 건설 예정지가 위미항으로, 위미 주민이 반대하자, 다시 강정항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인 국방부는 마침내 2017년 3월 강정해군기지를 준공했다. 이번에는 공군이 다시 공군기지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 예정지가 일본군이 만들어 사용했던 알뜨르 비행장이다.
2000년대 이후 제주도의 일본군 전적지가 다시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종합적인 일본군 전적지의 조사·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를 활용한 평화교육과 다크투어리즘(역사적으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가 체험함으로써 반성과 교훈을 얻는 여행)이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지하호를 이용한 전시시설로 한경면 청수리에 제주평화박물관이 개관하는 한편, 알뜨르 비행장 일대와 해안의 특공대용 전적지를 무대로 설치미술 전시회가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 행정 당국도 이것을 중요한 역사 유산으로 인식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한편, 예산을 편성해 보수와 정비를 시작했다. 제주도 당국은 2007년 전쟁 유적을 활용한 평화대공원 조성 계획을 수립했다. 알뜨르 비행장과 주변의 일본군 전적지, 4·3 유적지를 묶어 대표적인 평화교육의 장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부지 소유권이 국방부에 있기 때문에 제주도는 국방부에 소유권 이전을 요청했다. 국방부는 처음엔 거절했다가, 해군기지 건설 협약을 맺을 때, 제주도가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재는 공군 구조대 기지로 쓸 수 있는 대체 부지를 달라면서 제주도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2017년 10월11일 제주도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와 업무협약을 맺어 평화대공원 사업을 재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알뜨르 비행장과 그 일원에 대한 문화콘텐츠 개발, 문화예술 증진 등 제주의 발전을 위해 협력을 강화하면서, 2단계로는 국방부-제주도-JDC 간 상생 협약을 맺어 알뜨르 비행장을 평화의 들판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발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아시아 위협하는 군사기지
지역언론에서는 제주도가 이미 국방부와 협약을 맺었다고 본다. 현재 논란 중인 제2공항에 제주도가 군사시설을 확보해주는 대신 알뜨르 비행장을 넘겨받아 관광의 중심지로 개발한다는 것이다. 제2공항을 공군과 민간이 공동 사용하는 비행장으로 만든다면, 앞으로 10년 뒤 제주도는 해군기지와 공군기지가 모두 들어선, 한국에서도 가장 중요한 군사지역으로 변할 것이다. 제주도가 이미 동아시아를 위협하는 군사기지로 변신할 가능성이 높아진 마당에 알뜨르 비행장을 활용한 평화대공원을 조성한다면, 우리는 그 공원에서 평화교육을 할 수 있겠는가.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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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잃어버린 세월
“아들아, 날 찾아오라, 한라산아 날 찾아오라”
주민 3분의 1인 450명 이상 희생된 표선면 가시리 마을…
살아남은 이들이 털어놓는 70년 피 끓는 이야기
한라산 동남쪽 중산간의 이름도 고운 가시리 마을. 4월이면 노란 유채꽃이 천지를 물들이고, 가을이면 억새가 흐드러지게 들판과 오름을 뒤덮는다. 70년 전 이 아름다운 들판에서 밭 갈고 말 치던 어멍아방들이 무수히 개죽음을 당했다. 영문도 모른 채 참변을 당하고,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왔다. 98살 한신화 할머니는 4살 아들을 가슴에 묻었고, 86살 오국만 할아버지는 부모님과 세 형님을 한꺼번에 잃었다. 제주의 슬픈 보석, 가시리를 기록한다. 유골 발굴 등 여러 4·3 치유 사업도 소개한다.
“우리 양봉선아 양봉선아, 날 찾아오라. 한라산에 눈이 내렸구나, 날 찾아오라.”
3월 초, 제주 중산간 시골마을을 찾았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북서쪽으로 올려다보이는 한라산은 허연 눈으로 덮여 있다. 손을 뻗치면 바로 잡힐 듯 가깝다. 빼꼼히 열린 시골 농가의 창문을 두들겼다. “할머니, 4·3 이야기 나누려고요.” 한신화(98) 할머니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70년 동안 얼마나 사무치게 아들 양봉선을 그리워했을까. 이야기 마디마디가 애끓는 가락으로 살아났다.
4살 아들 잃어버린 한신화 할머니
“밤에 (경찰이) 와서 다 불질렀어. 다 탔어. 내 남편, 어망아방, 어디 간지 몰라. 사방팔방 도망갔어.” 할머니는 4살 아들을 안고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받았다. “가시리 여자 6명, 함께 붙잡혀갔어. 팔을 뒤로 포승줄 묶었어. 책상 위에 올라갔어. 책상을 탁 쳐서 미니까 대롱대롱 매달렸어. ‘살려줍소, 살려줍소.’ 아홉 번을 달아맸어. 바지가 벗겨지고 겨드랑이가 찢어졌어.”
할머니의 한 손가락은 기역(ㄱ) 자로 꺾여 있었다. 다른 손가락은 굽혀지지 않았다.
“꾀부린다고 장작으로 후려쳤어, 뒤로 묶인 손을. 손가락 병신 됐어. 그렇게 매 맞고 1년형 받았어. 말소 끄는 배 타고 육지 형무소 갔어. 전주에서 6개월, 대구형무소에서 4개월 살았어.”
“죄명이 뭔가요?”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것도 몰라.”
한 사람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6살 딸을 데리고 있었어. 그 사람은 무조건 ‘예, 예’ 했는데, 5년이나 받았어. 가시리 마을로 영영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직 죽었나 살았나, 아무도 몰라.”
“할머니 아들은요?”
“우리 양봉선이? 4살이었어. 내가 형무소 갈 때 고아원에 보냈대.”
할머니는 그 뒤로 아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아들이 생각나면, 애절한 가락을 읊는다. “양봉선아 양봉선아, 날 찾아오라.”
무거운 응어리를 안고 할머니 댁을 나왔다. 백 걸음이나 걸었을까. 마을 농협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서니, 오국만(86) 할아버지의 돌담집이다. 할아버지는 70년 전, 피붙이 다섯과 형수님, 여섯 식구를 한꺼번에 잃었다.
“1948년 음력 10월 보름(양력 11월15일)이었어요. 가시리로 토벌대가 들이닥쳤어요. 며칠 뒤 부모님과 열일곱이던 나와 두 동생은 표선의 해안부락으로 내려갔어요. 산으로 피한 세 형님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가족이 영영 헤어졌어요. 큰형님 국림은 26살, 국남 형님 24살, 국효 형님 20살이었어요. 형수님은 호적에 아직 올리지도 않았고요.”
토벌대가 초토화 작전을 시작한 그날 11월15일 하루에만 30명의 마을 주민이 죽임을 당했다. 10살 미만 아이가 9명, 60살 이상 노인이 10명, 21살 청년 1명을 빼고는 나머지 10명이 모두 부녀자였다. 발 빠른 장정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여섯 식구 희생당한 오국만 할아버지
한 달 남짓 지난 12월22일, 수용소 생활을 하던 표선국민학교에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표선 청년들로 조직된 민보단 단원들이 대창을 들고 우리 주위를 둘러쌌어요. 가족이 모두 내려온 식구들만 옆으로 나가 따로 모이라고 하더군요.”
“70년 전 일인데, 그때 기억이 뚜렷한가요?”
“기억이라고요? 오늘 일처럼 생생해요!”
“양쪽으로 무리를 갈라놓고 마주 보도록 세웠어요. 우리는 도피자 가족이었지요. ‘저쪽 무리 중에서 도피자 가족이 없느냐’고 물었어요. 누군가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저기 강덕근이도 아들이 안 내려왔어요.’ 장애인이던 그분, 강덕근도 우리 쪽 도피자 무리로 끌려왔지요.”
할아버지는 그 ‘누군가’를 알지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순진한 분이어서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던 것뿐이거든요. 죽으러 가는 사람이 무슨 감정이 있어서 일부러 남까지 끌고 가려 했겠어요.”
할아버지는 호적 나이가 어리게 기재된 덕에 다 죽은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15살 아래와 젖먹이 엄마는 옆으로 나오라고 하더군요. 실제 내 나이가 17살이었는데, 호적엔 14살로 돼 있거든요. 나와 동생들만 살았어요. 부모님은 그날 돌아가셨고요.” 그렇게 도피자 가족으로 찍혀 표선의 버들못 근처에서 한날한시에 총살당한 이들만 76명에 이른다. 가시리에서 그날(12월22일, 음력 11월22일) 제사를 지내는 집이 유독 많은 까닭이다. 할아버지가 강덕근 가족의 슬픈 사연을 더 보탰다. “아버지가 끌려가니까 강덕근의 맏딸이 주저앉아 통곡했어요. 열다섯이 안 된 아이였어요. 그러자, (경찰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버지 따라 같이 가라’고 도피자 대열에 집어넣었어요. 누군가의 고자질 때문에 아버지와 큰딸이 다 죽은 거예요. 지금은 작은딸 하나만 이웃 신흥리 마을에 살고 있어요.”
그날 헤어졌던 세 형님의 이야기를 물었다. “셋째 형님은 제주 비행장에서 죽었느니, 수장됐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어요. 숨진 게 1949년 8월12일이라는 말이 있어, 그날 제사를 모셔요. 큰형님은 붙잡혀 경인 지역에서, 둘째 형님은 호남에서 희생됐다는 소문만 있어요. 사형 언도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거든요. 그래서 두 분은 생일날 제사를 모십니다. 아버지가 해안으로 내려갈 때 들고 간 궤짝이 있어요. 그 궤짝 문에 아버지가 아들들 생일을 적어놓으셨더군요. 그게 없었다면 형님들 생일도 모를 뻔했어요.”
할아버지는 그날 버들못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했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내가 5살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와 함께 총살당한 분은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니였어요. 무슨 죄를 지어 총살을 당하셨나요. 죽을 죄명을 붙이라면, 우리 어머니였다는 것밖에 없잖아요. 어머니 성함이 고운기인데, 가슴이 찢어져요.”
남편·시아버지 총살당한 안정생 할머니
4·3이 일어나던 해, 가시리의 안정생(93) 할머니는 둘째 아이를 가진 23살 만삭의 몸이었다. 할머니의 한 서린 이야기도 그해 음력 10월 보름, 토벌대가 들이닥치던 날로 시작한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도망갈 데가 없었어. 우리 하르방(남편)은 28살이었는데, 그날 표선으로 끌려갔어. 음력 12월4일인가 5일, 표선에서 성읍으로 가는 길가에서 총살당했다고 해. 시아버지는 76명이 총살당한 버들못에서 함께 당했지. 그 얼마 뒤 둘째 아들을 낳았어. 유복자야.” 할머니는 “총살당해 죽었으니 혼이 달아났는지, 70년 되도록 하르방이 한 번도 꿈에 안 나타난다”고 말했다. “긴 세월 죽지 않으니 살았어. 명이 기니까 산 거야. 이제 죽어서 만나도 하르방이 내 얼굴 못 알아보겠지. 죽은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데. 하르방 사진 한 장 있던 것도 잃어버렸어. 큰아들이 아방 많이 닮았어. 슬퍼.”
오문평(78) 할아버지 가족은 4·3 때 희생을 당하지 않았다. 가시리에서 보기 드문 경우다.
“아버지가 8형제를 모두 데리고 표선 해안으로 내려갔어요. 사돈의 팔촌까지 한 명이라도 산에 올라간 사람 있으면 다 죽었는데, 아버지 덕분에 형제가 모두 산 거지요.”
“사촌도 다 내려갔나요?”
“어, 우리는 사촌이 없었어요.”
할아버지의 아내인 김순애(76) 할머니도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사촌까지 다 내려갔어요. 그래서 살았던 거예요. 우리 형제는 그때 나 혼자였는데, 그 뒤로 8남매가 태어났어요.”
4·3 때 세상을 떠난 표선면의 전체 희생자 수는 공식 집계로 750명, 그중 절반이 넘는 422명이 가시리 출신이다. 행방불명자까지 합치면 가시리 전체 주민 3분의 1가량인 450명 이상이 참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국만 할아버지에게 왜 가시리에서 희생이 많았는지 물었다.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치안이 미치지 못하는 벽지였기 때문이지요. 우리 마을에 경찰지서가 있었다면 그렇게 안 당했을 거예요. 지서가 있던 근처 성읍리는 희생자가 별로 없었거든요. 늘 얼굴 대하는 이웃 사람을 어떻게 참살할 수 있겠어요. 여기는 경찰이 지키러 온다면서 괴롭히기만 했어요. 산에 숨은 이들한테 식량을 줬다느니 하면서 마구 두들겨패니, 경찰이 온다 하면 젊은이들이 무조건 산으로 도망갔어요. 누가 경찰을 좋아했겠어요. 우리 세 형님도 전혀 무학이에요. 좌익사상, 그런 것 몰라요. 국민학교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영문도 모른 채 빨갱이라 구박받고”
이유 없는 개죽음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집안에서 국민학교 입학한 것도 할아버지가 처음이었다. “학교에 늦게 들어갔어요. 4·3 때 17살이었는데 6학년에 다니고 있었어요. 국민학교도 졸업 못했지요. 4·3 때문에….” 할아버지는 지난 70년 세월이 너무나 시리고 아프다고 했다. “10여 년 전까지도 4·3 이야기를 마음 놓고 나누지 못했어요. 이웃 부락에서도 우리 가시리 마을을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아무 영문도 모르고, 빨갱이라고 한없이 구박받으며 평생을 살았어요.”
제주=글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im@hani.co.kr
가시리 마을의 4·3 순례
발길 닿는 곳마다 참혹한 학살 흔적이…
가시리 마을의 4·3길 순례는 특별하다. 참변을 겪은 오태경(87) 할아버지와 정덕재(82) 할아버지가 직접 해설사를 맡는다. 두 할아버지는 외사촌 간이다.
오태경 할아버지는 “4·3 때 집이 한 채도 남김없이 다 타고, 마을이 완전히 파괴됐다”고 말했다. “가족 중엔 형님이 행방불명이고, 형수님이 1년형을 살았어요. 이웃 신흥리로 피신 가 있던 사촌형수님이 식량 가지러 마을에 왔다가 들판에서 사살당했고, 사촌 형님과 두 아들은 형수님 주검에 흙이라도 덮어주려고 마을로 들어왔다가 붙잡혔어요. 지금 해비치호텔이 있는 표선 백사장에서 총살당했어요.”
두 할아버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
마을 고지대인 고야동산과 마두릿동산을 먼저 찾았다. 경찰이 오는지, 주민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경찰을 ‘검은개’, 군인을 ‘노란개’라고 했어요. 괴롭히니까 미워했던 거예요. 이곳 동산에 대나무를 세웠다가, 멀리 경찰이 들어오는 게 보이면 보초가 대나무를 눕혔어요. 그때는 나무가 많지 않아, 아래쪽 마을에서 동산이 훤히 보였거든요. 대나무가 누우면, 들판에서 일하거나 집에 있던 주민들이 모두 산으로 도망갔어요.”
‘흙 붉은 동산’이란 뜻의 달랭이모루로 발을 옮겼다. 안흥규씨 가족 12명이 끔찍하게 몰살됐던 곳이다.
“큰각시 고신춘과 작은각시 강매춘, 그리고 21살부터 갓난아이까지 자식 6명, 모두 8명이 성읍지서로 끌려가던 중 총살당했어요.”
“왜 여기서 죽였나요?”
“모르지요. 사람 죽이는 것을 버러지 죽이는 것보다 쉽게 생각했으니까요. 안씨의 누님 부부와 두 자식 등 4명도 함께 당했어요.”
지금 가시리 사무소 앞마당에는 안씨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1949년 5월인가 복구령이 내렸어요.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리사무소 근처에 작은 성을 쌓았고, 그 안에 이엉을 이어 비를 피했어요. 나중에 바깥으로 더 크게 성을 두르고 그렇게 수년 동안 집단생활을 했어요. 안씨가 그때 이장을 맡아 마을 복구에 헌신했어요.”
가시리에서 발원해 세화리로 흘러가는 가시천에도 슬픈 사연이 묻어 있다. “토벌대가 들어오던 날, 60대인 안만규 할아버지와 김인하 할머니가 3살 손자와 1살 손녀를 데리고 가시천 아래에 숨어 있었어요. 아이들이 소리를 냈던 거예요. 토벌대가 수류탄을 던졌고, 그 자리에서 네 식구가 즉사했어요. 아들 부부는 먼저 피신해서 살아남았어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새가름과 종서물을 찾았다. 4·3 이전까지 각각 20여 가구, 10여 가구가 정답게 살던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 대다수가 참변을 당한 겁니다. 돌아올 사람이 없으니, 마을이 사라진 거지요. 새가름에는 고대효씨 부친과 문사봉씨 2가구가 다시 들어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떠나고 말았어요. 외로움과 상처를 못 이겼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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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삶을 말한다
큰넓궤부터 섯알오름, 북촌 너븐숭이까지 제주4·3 상흔 찾아 떠난 2박3일…
통곡의 섬에 삶과 죽음은 함께 있었다
형을 날려버렸다.
일정 때 일본으로 간 아버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었다. 조천중학원에 다니던 큰형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다. 둘째 형은 몸이 아파서 집에 누워만 있었다. 어머니가 의지할 데라곤 큰형밖에 없었다. 그런 형이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난리 1년 전(1947년)에 있었던 3·1절 시위에 나갔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동네 어르신들한테 들었다. 1948년 3월6일, 큰형이 죽었다. 조천지서에서 고문받다 골로 가버렸다. 형의 이름은 김용철이었다.
2월28일 오후, 제주시 조천읍에서 만난 김용선(78)씨는 형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나이 7살 때였다. 다만 이장할 때 본 형의 백골은 아직도 선명하다. 두개골이 함몰돼 있었다. 정부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4·3의 한 도화선이 된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 제주 사회의 민심을 동요시켰다. 조천지서에 연행됐던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金用哲, 21세)이 유치 이틀 만인 3월6일 별안간 숨졌다. 사체의 검시 결과 그는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3월14일 모슬포지서에서 유치 중이던 양은하(梁銀河, 27세) 역시 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3월 말에는 서청 경찰대에 붙잡힌 한림면 금릉리 청년 박행구(朴行九, 22세)가 곤봉과 돌로 찍혀 초주검 상태에서 끌려가다가 총살당한 충격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은 당시 지역신문에도 실렸을 정도로 민심을 들끓게 했다. 경찰은 지병에 의한 사망이라고 해명했지만 주검 전체에 시커멓게 멍이 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가 거세졌다.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사인 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지역 유지들도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철저한 조사를 군정 당국에 요구했다.
부검은 이례적으로 두 차례 실시됐다. 경찰의 훼방으로 건성으로 치러진 1차 부검이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미군 고문관은 재부검을 지시했고, 2차 부검 결과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 결정적 사인으로 밝혀졌다. 조천지서 경찰관 5명 전원이 구속됐다.
장례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고 한다. 동생 김씨는 “수백 개의 만장이 추도 물결을 이루었다”고 회고했다. “4·3 한 달 전 발생한 이 사건은 제주 청년들에게 분노와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도피입산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면서 도민들은 경찰을 더욱 불신하게 됐다”고 향토지는 적었다.
김씨는 “큰성(형)이 죽지 않았으면 집안이 멸족됐을 거”라며 “형이 죽어서인지 4·3 그 난리통에도 다른 화를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집안은 항일운동가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천읍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도일한 김경희 선생은 그의 작은할아버지였다.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도 받았지만 후손인 김씨는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금 한 푼 받지 못했다.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방불명, 그리고 형의 죽음까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3월1일 오전, 날은 잔뜩 찌푸렸고 바람은 모질게도 불었다. 제주를 찾은 인권활동가들의 당일치기 4·3 ‘다크투어’ 일정에 동행하기 위해 제주시 애월읍으로 향했다. 행사를 주관한 강은주 ‘제주 다크투어’ 공동대표는 일정을 소개하면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은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라며 “블랙투어리즘(Black Tourism) 또는 그리프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한다”고 설명했다. 4·3 다크투어는 연중 계속된다.
첫 일정은 영화 <지슬>의 촬영지로 유명한 서귀포시 동광리 ‘큰넓궤’(‘큰 동굴’이라는 뜻의 제주어)였다. 1948년 11월 중순 마을이 초토화된 이후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 은신했던 동굴이다. 지급받은 헬멧과 장갑을 착용하고 인권활동가 30명과 함께 길을 나섰다. 너른 들판에는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억새가 바람에 흔들렸다. 큰길가에서 큰넓궤까지 가는 길은 1.3km나 됐다.
큰넓궤 입구는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자물쇠로 채워 있었다. 해설사를 따라 철제문 사이를 비집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암흑이 끼쳐왔다. 휴대전화 조명을 켜 진로를 확보했지만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폭이 좁아져 낮은 포복을 해야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 무릎이 돌에 부딪혀 약간의 통증이 번져왔다. “아!” “악!” 어둠 저편에서 짧은 비명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수시로 천장에 부딪히는 헬멧은 둔탁한 소리를 냈다. 폐소공포증을 호소하는 몇 명은 진입을 포기했다. 2m 정도 기어가자 아래의 큰 동굴로 이어지는 철제 사다리가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어른 키만 한 높이에 반경 4m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이 나왔다. 윗굴이었다. 해설사는 이곳이 첫 번째 거주 공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축축했다. 불빛을 비춰보니 깨진 사기그릇과 질그릇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당시 피란민들이 사용하던 것이라고 했다. 70년의 풍화도 없이 깨끗했다. 천장 한쪽엔 박쥐가 매달려 있었다. 여기서 20m만 더 가면 또 아랫굴이 나온다고 했다. 폭은 다시 급격하게 좁아졌다.
“당시 피란민들은 이곳에서 밥을 해먹지는 않았어요. 근처의 작은 굴에서 며칠에 한 번씩 밥을 해서 차롱(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납작하게 만든 그릇)에 담아다 먹었다고 해요. 밖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딛고 다니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 발 디뎠던 곳에 꽂아 발각되지 않게 했대요. 똥도 밖에서 누지 못해 굴 한쪽을 변소로 정해 거기서 누었다네요.”
해설사의 말에 활동가들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 공간에서 노인들은 어떻게 60여 일을 버틸 수 있었을까. 아이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밖으로 나오면서 영화 <지슬>의 동굴 장면을 떠올렸다. 50분 동안의 동굴 탐험을 마친 활동가들은 “생존자다”를 외치며 “온몸으로 4·3을 기억하게 됐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턱이 없어 말하기 어려웠던 슬픔
버스는 ‘섯알오름’(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으로 방향을 틀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인민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국의 국민보도연맹원을 불법적으로 체포·구금한 뒤 집단학살했다. 섯알오름에선 1950년 8월20일 새벽 2시에 한림어업창고와 무릉지서에 구금됐던 63명, 새벽 5시께는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에 구금됐던 132명이 해병대 제3대대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보도연맹은 좌익 인사를 계도한다며 이승만 정부가 강제로 조직한 어용단체였다. 지역별로 할당이 정해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보리 서 말을 받고 가입하는 등 엉망이었다. 1949년 중반 이후 가입한 이는 대개 무지렁이 농민들이었다. 현기영 선생 말처럼 “이승만이 국부라면 지 새끼들을 잡아먹은” 국부였다.
해설사는 희생자 추모비를 둘러보고 야외에서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자고 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맨바닥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데 쉴 새 없이 부는 바람에 모래가 밥과 반찬 위에 앉았다. ‘정말 다크투어가 맞다’는 얘기가 절로 나오는 날씨였다. 서둘러 점심을 쓸어넣은 우리는 알뜨르 비행장을 거쳐 송악산 일본군 진지동굴에 도착했다.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15개의 인공동굴이 뚫려 있다. 너비 3∼4m, 길이 20여m에 이르는 이 굴들은 성산일출봉 주변의 인공동굴처럼 어뢰정을 숨겨놓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던 곳이다. 4·3 이전 제국주의의 전초기지였던 제주의 상처는 오늘날 강정 해군기지로 이어지고 있다.
다크투어 마지막 일정은 ‘진아영 할머니 삶터’(제주시 한림읍 월령리)였다. 진아영 할머니는 4·3 때 얼굴에 총탄을 맞아 한평생 턱 없이 살다가 2004년 9월 별세했다. 얼굴에 무명천을 두르고 다닌다 해서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렸다. 할머니의 집은 방 한 칸에 부엌으로 단출했다. 방 한쪽에 머리빗부터 자물쇠, 목걸이, 머리띠, 공과금 영수증, 동전 등 할머니가 쓰던 유품이 진열돼 있었다. 몽당연필 옆 이면지에는 ‘쥐약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다 나왔다. 턱이 없어 말하기 어려웠던 할머니의 슬픔이 거기 새겨 있었다. 의사는 어디에 있고 정부는 어디에 있었나. 인권활동가 몇몇이 눈시울을 붉혔다. 돌아오는 차편, 하루 종일 바람을 맞아서일까. 으스스 신열이 났다.
3월2일 오전, 상경하는 날 야속하게도 날씨가 맑게 개었다.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평일 오전이라 참배객은 거의 없었다. 도열한 각명비 뒤로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적막하고도 평화로웠다. 아치형으로 된 4·3위령제단으로 들어갔다. 1만3903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자랑이고 기쁨이었을 1만390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숨진 이들 가운데는 이름을 얻기도 전에 죽은 아기도 많았다. 만약 그들이 살았다면 올해 일흔이 됐을 것이다. 그들의 자식은 지금 내 나이가 됐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그렇다면 여긴 한 사람이 1만3903번 죽었음을 위로하는 공간이다. 4·3 70주년 추념식엔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평화공원이 중산간이 아닌 시민들 일상 곁으로 내려올 수는 없었을까. 삶과 죽음은 함께할 수 없는 것인가.
제주도에서 가장 피해가 큰 마을이자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조천읍 북촌리 집단학살 현장으로 차를 돌렸다. 1949년 1월17일, 북촌리 주민 450여 명이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됐다. 무장대가 토벌대를 습격한 데 따른 무차별 보복이었다. 너븐숭이 4·3기념관에는 ‘死·삶을 말한다’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아기가 죽은 엄마의 젖을 찾더라고”
기념관 앞에는 그때 죽은 아기들을 묻은 애기무덤이 있다. 어른들 무덤은 다른 곳에 안장됐지만 어린아이들의 주검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무덤가에 핀 수선화가 햇볕에 반짝였다. 돌과 돌 사이에 미니자동차, 막대사탕, 과자가 놓여 있었다. 고무로 된 노란 오리인형도 보였다. 말 없는 통곡이었다. 어른들이 만든 미친 세상에서 아이들은 이리저리 치이다 결국 떼죽음을 당했다.
북촌리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고완순(80) 북촌 노인회장의 댁을 찾았다. 마을 공터에서 기다리는데 직접 차를 몰고 나왔다. 큰일을 당하셨는데도 연세에 비해 정정해 보였다. “그때 내가 11살이었거든. 70년이 지났는디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지. 바깥채에 있던 애가 울더라고. 군인이 단검을 꽂은 총으로 문을 열어젖혔어. 빨리 초등학교로 모이라 하더라고. 나가서 보니까 군인들이 불을 질러서 옆집이 불타고 있더라. 3살 먹은 남동생이랑 언니랑 나도 손 하나씩 잡고 운동장으로 갔어. 사람들이 운동장에 반 이상 가득 찼어. 내가 호기심이 굉장히 많거든. 교통사고 나도 다 보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데. 학교 울타리 위에 기관총이 운동장으로 향해 있더라고. 사람들 끄트머리로 끼어 앉았어. 교단에 군인이 올라가서 뭐라고 말하더니 바로 총을 쏘는 거야. 아침에 군인차 지나가는 거를 (무장대가) 죽여가지고 군인 2명이 죽었거든. 마을 사람들이 그 주검을 가지고 부대에 갔더니 한 명 빼고 다 죽였거든. 그러더니 기관총 사격으로 막 쏘는 거야. 막 기었어. 손에 걸려서 보니까 내 손이 피범벅인 거야. 아고 어멍 손에 피 묻었엉. (눈물을 글썽이며) 아기가 죽은 엄마의 젖을 찾더라고. 세상에.”
군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30명가량씩 묶어서 학교 옆 옴팡밭(오목하게 들어간 밭)으로 끌고 갔다. 그도 그 무리 속에 있었다. “옴팡밭에 끌려갔는데 길도 좁고 밭이 깊어. 끌려가보니까 이미 사람들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다리에 머리가 가 있고. 죽어 있었어. 쓰레기, 바람에 불려온 것처럼. 우리를 횡대로 앉혔어. 죽음 앞에는 뭔 생각이 안 나. 그때 시간이 겨울인데 오후 4시가 넘었어. 밭이 피로 물들어서 햇빛을 받아 흑색으로 보였어. 자기네끼리 이북 말씨로 뭐라뭐라 하더라고. 쇠소리가 철거덕 철거덕 나. 벌벌 떨고 있는데 사격 중지하는 소리가 들렸어. 지프차가 달려오는 거야. 그러고는 학교 운동장으로 다시 끌려갔어.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함덕으로 와라’고 하더라고. 집이 불탄 사람들은 남의 집 곳간이나 외양간에서 밤을 지새웠지. 생각해보면 그때 아예 제주도를 없애버리려고 그런 거 같아.” 소설 <순이삼촌>에 나오는 그 옴팡밭이었다. “그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 되연 이듬해엔 감저(고구마)농사는 참 잘 되”었다는 그 밭. 옴팡밭은 마을 입구에 있었다. 삶과 죽음이 거기에 함께 있었다.
죽은 사람 썩어 ‘감저’ 농사 잘된 옴팡밭
조금만 더 일찍 옴팡밭에 끌려갔으면 자신도 분명 죽었을 거라는 그는, 강원도로 시집간 언니를 만나러 속초에 갔다가 월남해 군에 투신한 남편을 만나 혼인했다. 부산대학교를 나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는 큰딸은 몇 년째 연락이 없다. “이거 한 가지는 소원이야. 뭐냐면 4·3 겪은 사람들이 동네에서 35명쯤 돼. 내가 막내야. 매일 점심을 같이 먹어. 오늘도 둘째 딸이 시내에서 감자탕 사다 갖다 줬어. 다 독거노인이야. 언제 죽을지 몰라. 남편 잃어버리고 자식 잃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할망이가 많아. 그런 노인들을 위해 공동생활할 수 있는 양로원이나 지어줬으면 좋겠어. 그동안 고통을 준 대가로 국가가 이런 거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제주·서귀포=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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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치유’를 얘기할 때
30년간 4·3 취재한 기자의 뒷얘기…
‘트라우마 치유센터’ 만들어 피해자와 유족 보듬어야
제주4·3은 탐라 개벽 이래 제주도에 유례를 찾기 힘든 희생을 몰고 왔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건이 전개되는 7년7개월 동안 제주도민들은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다.
고립무원의 40년
군경 토벌대는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넉 달 동안 젖먹이부터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저질렀다. 정부 기구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는 2003년 12월 진상조사 보고서에서 희생자 수를 2만5천 명에서 3만 명가량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한다. 4·3의 비극은 엄청난 희생자 숫자에만 있지 않다. “총에 맞은 죽음은 고통의 시간이 짧으니 다행스러운 경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마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참혹한 일들이 잇달아 벌어졌다.
이승만 정권과 뒤이은 군부독재 정권은 이같은 엄청난 피해를 논의조차 못하게 막았다. 제주도민의 입을 틀어막은 결과, 국민 대다수는 4·3을 알지 못했고 유족들은 수십 년 동안 억울하다는 호소 한마디 하지 못했다. 1987년 벌어진 ‘6월항쟁’ 이후에야 비로소 말문을 틀 수 있었고, 40주년인 1988년부터 조금이나마 전국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한 작가는 광주항쟁을 다룬 소설집에서 외롭게 고립돼 있던 그때를 ‘끝내 아무도 달려와주지 않았던 열흘’이라며 섭섭한 마음을 토로한 바 있는데, 그 표현을 빌린다면 고립무원의 제주도민들에게 그간의 세월은 ‘끝내 아무도 달려와주지 않았던 40년’이었다.
1987년 신문사에 입사한 필자는 4·3 40주년인 1988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줄곧 4·3을 취재했다. 필자가 처음부터 증언 채록에 힘쓴 까닭은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실하고 관변 자료가 너무 왜곡돼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제주에서 일어났던 여러 민란처럼 그날의 사연들이 풍문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생생한 증언들을 신문에서 널리 알리고 독자들의 검증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증언들이 훗날 사료로 기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과연 그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진실의 바닥을 알고 싶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1950)은 함께 겪었던 사건이라도 사람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해 보여준다. 그러나 여러 증언을 사료와 비교해 분석하고 검증한다면 진실에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어르신들은 필자의 집요한 질문에 기억조차 하기 싫은 옛일을 마지못해 말씀하시지만, 자신의 사연이 신문에 소개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증언 채록에 몰두했다. 그렇게 제주도 모든 마을을 취재하다보니 7천 명가량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게 됐다.
숨이 막혀오는데 아무 병이 없다니
처음엔 증언 채록이 힘들었지만, 점차 이력이 붙으니 요령이 생겼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 앞에서도 허벅지 한번 꼬집으면 감정을 억누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제정신으로는 듣고 글로 옮기기 힘든 이야기도 많았다. 부모가 총살을 당할 때 맨 앞줄에 서서 박수를 치고 만세 부를 것을 강요당한 사람들, 굴속에 숨었던 가족들이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들켜 몰살당하는 모습을 요행히 밖에 나왔다가 흐느끼며 바라봤던 사람들, 토벌대가 인근을 지날 때 들킬까 두려워 우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가 자기 자식을 숨지게 한 어머니. 이들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마 소개하기 어려운 참혹하고 엽기적인 별의별 사연을 많이 들었어도 그럭저럭 견뎌왔지만, 어떤 증언들은 허벅지를 꼬집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언가가 가슴에서 울컥 쏟아져나오는 듯해 서로 말을 못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방바닥 또는 천장만 바라본 적도 있다. 10대 초반에 4·3을 겪었던 분들의 증언을 들을 때가 주로 그랬다. 당시 성인이던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하는 ‘소년’의 증언을 듣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당시 11살이던 한 증언자는 숨어 있던 굴이 군인들에게 발각되자 급히 도망쳤지만, 어린 동생은 붙잡혀 총살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 군인들을 대한민국 국군이라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현충일에 절대로 태극기를 달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또 휴가 나온 아들의 군복 입은 뒷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던 씁쓸한 기억도 털어놨다. 가족 대부분을 잃고 어머니와 둘이서 살아남은 12살이던 한 증언자는, 군인들이 현무암과 흙으로 지은 집에 불을 질러 돌이 빨갛게 변하던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붉은 벽돌집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8살 어린 나이였던 한 증언자는 뒤뜰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경찰이 정문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을 보고 무서워 뒷문 뒤에 숨었다. 그곳에서 경찰이 집에 불을 지른 뒤 방 안에 있던 할아버지(당시 54), 아버지(28), 어머니(29), 큰동생(7), 작은동생(5)을 총으로 쏴 죽이는 모습을 넋 나간 채 숨죽이며 지켜봤다. 경찰이 돌아간 뒤 불길 속에 뛰어들어 애기구덕 안에 있던 막내동생(1)을 꺼냈으나 곧 굶어죽었다. 그는 가족들을 총으로 쏘고 집에 불을 지르던 경찰관 3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눈물을 흘리거나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은 채 마치 남의 일 말하듯 담담하게 증언했다. “난 지금도 그 경찰들이 우리 가족을 눈을 뜨고 쐈는지, 감고 쐈는지 궁금합니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도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그의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남편의 입버릇은 ‘열다섯 살만 됐어도…’입니다. 남편은 ‘내가 열다섯 살만 됐어도, 그 정도의 힘만 있었더라면 주검을 마당으로 끌어내 불에 타는 것을 막았을 텐데…’라고 수시로 중얼거립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울컥 올라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런 ‘소년’들의 증언을 듣는 날엔 밤에 몸살을 앓았다. 유족들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숨이 막혀오는데 의사는 아무런 병이 없다고 하니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이 상처를 어찌할 것인가.
너무나도 먼 ‘4·3 치유’
‘치유’를 뜻하는 ‘힐링’(healing)이라는 영어 단어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제목이 될 정도로 보편화되었고,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트라우마’(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낯선 단어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치유 또는 트라우마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다.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만들어 4·3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전 <제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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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구천 헤매는 영혼들
2007년 제주공항서 첫 유해 발굴 이후 속속 드러난 그날의 진실…
행방불명된 3천여 명 유가족 품에 안겨줘야
비행기 굉음이 고막을 타고 들어와 머리를 때린다. 거기 중장비 기계음이 더해져 소리 분간이 잘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굴착기를 멈춰세웠다. 자갈이 가득 찬 구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간 사람이 작은 뼛조각을 찾아냈다. 유골이었다. 60여 년 만의 해후였다.
너무도 소중한 뼛조각 하나
2007년 9월, ‘제주4·3사건 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의 하나로 제주국제공항에서 유해 발굴이 시작된 첫날 풍경이다. 발굴단은 기적처럼 첫날 유해를 발견했다. 발굴 장소를 퍼즐 맞추듯 찾아가던 우리는 기다란 암매장 구덩이에서 그날의 참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2007년 여름부터 이듬해 8월까지 1년여간 진행된 공항 1차 발굴 결과, 길이 32m, 너비 1.2~1.5m의 좁고 기다란 구덩이에서 유해 128구, 탄두, 탄피, 고무신 등 유류품 659점이 발굴됐다. 이후 2008년 9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이뤄진 2차 발굴에서는 길이 15.5m, 너비 4.3~5.4m의 직사각형 구덩이에서 유해 259구와 유류품 1300여 점을 발굴·수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제주공항 바닥에 파묻힌 채 침묵해야 했던 이들은 누굴까?
70여 년 전, 제주는 이념 갈등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된 고통의 땅이었다. 1948년 4월3일 무장대가 일제히 오름에 봉홧불을 올리며 투쟁을 결의했다. 미군정의 미곡(쌀) 수집령에 반대하고 친일 경찰의 부당함에 저항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단독정부·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무장투쟁에 나선다. 저항의 대가는 혹독했다. 1949년 11월17일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떨어지고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산·들판이 학살터로 변했다.
당시 정뜨르 비행장, 현 제주국제공항은 대표적인 학살터였다. 공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고 주변에 인가가 드물며 경사진 땅이 많았다. 그래서 학살 후 주검을 암매장하기 쉬웠다. 이후 이곳은 공항 활주로로 포함됐다. 그날의 ‘진실’이 영원히 묻힐 뻔했다.
그러나 목격자들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트럭에 실려 정뜨르 비행장으로 향했지만 돌아온 것은 빈 트럭이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했다. 분명 그곳 어딘가에 유해가 묻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공항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기에 발굴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끈질긴 요구 끝에 유해 발굴의 기회를 얻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발굴을 준비했다. 마침 제주공항 남북 활주로 확장 공사로 활주로 근처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막상 공항 활주로에 서보니 옛 지형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목격자들조차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증언을 토대로 옛 지번을 측량하며 암매장지를 추정해나갔다. 옛 지번 2451번지가 유력했다.
그곳은 공항 내 전시 비축자재를 쌓아두는 곳이었다. 모래와 자갈 등을 넣어두는 구덩이다. 우선 이것을 옮겨야 했다. 그 과정에서 첫 유해 조각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그 일대에서 확인된 유해들은 부스러진 채 흩어져 있었다. 과거 비축자재를 넣기 위해 구덩이를 파던 중에 손상된 듯하다. 하지만 이 으스러진 뼛조각 하나하나는 너무도 소중했다. 누군가 애타게 찾고 있을 희생자를 찾아줄 단서였기 때문이다.
첫 발굴로 얻은 용기와 자신감
제주4·3 희생자 유해 발굴의 목적은 ‘역사의 진실 찾기’ 외에도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여 유가족의 품에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희생자 유골에 남아 있는 DNA와 유가족의 혈액에서 채취한 DNA를 대조하며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92구의 신원이 확인돼 유가족 품에 안겨졌다.
이처럼 많은 성과를 냈지만, 유해 발굴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2005년 4·3 희생자 유해 발굴을 위한 예비조사를 한 뒤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6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발굴이 가능하겠냐는 회의적인 시각과 유해가 온전히 남아 있겠냐는 의문의 목소리가 거셌다. 특별법을 통해 유해 발굴의 법적 정당성은 확보했지만 무슨 근거로 함부로 유해를 파헤치느냐는 비난도 있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태였다.
2006년 5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하천 정비 작업을 하는 사업 터에 유해 발굴 대상지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6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공사를 마쳐야 해 시일이 촉박하다고 했다. 아직 정규 발굴팀도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 구제발굴이 진행됐다. 다행히 첫날 유해 일부분이 확인됐다. 안도하고 감격했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유해는 온전했다. 증언자의 말대로 반듯이 누인 상태로 유해 3구가 확인되었다. 발목을 감싼 각반과 허리벨트까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너무나 긴장한 탓인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식사도 거르고 쪼그려 앉아 흙을 걷어냈다. 배고픔이나 다리 저림도 잊은 채 발굴에 몰입했다. 첫 발굴의 경험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다. 저마다 애타는 사연을 안고 주시하는 유가족들을 보며 갈등하던 맘이 굳건해졌다. 이후 4년 동안 이어질 유해 발굴 작업의 시작이었다.
2006년 10월에야 유해 발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화북천 임시 구제발굴을 마치고도 몇 달이 흘렀다. 여전히 행정은 미적거렸고,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다. (사)제주4·3연구소에서 기획·조사를 담당하고 발굴 전문기관이 발굴 현장을 맡았다. 제주대학교 법의학 교실은 DNA 감식을 했다. 국방부 유해 발굴 현장 경험자를 초빙해 체질인류학적 접근도 시도했다. 그래도 여전히 불신이 남아 있었다. 더욱 정확한 조사가 필요했다. 실패가 거듭된다면 이후 예정된 공항 유해 발굴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계획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교차 증언을 통해 팩트체크에 나섰다.
4·3은 확인할 수 있는 정부 기록 문서가 거의 없다. 그래서 목격자들의 증언이 중요 단서가 된다.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증언자들의 몫은 매우 컸다. 목격자 대부분이 고령인 탓에 엊그제 일은 까맣게 잊었지만, ‘오래전 그날’의 일은 또렷이 기억했다. 첫 발굴지였던 화북천변 현장은 물론, 별도봉 일본군 진지동굴 앞의 유해 발굴 현장은 증언자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5~6겹으로 뒤엉킨 유해들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별도봉 오름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들이 파놓은 진지동굴이 많다. 이 동굴 앞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어 그분의 도움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하지만 근처에 동굴이 여러 개 있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증언자 역시 연세가 많고 편찮은 관계로 현장 동행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땅의 지주를 찾아나섰다. 다행히 아들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며느리가 증언했다. “시아버지께서 그곳에 가면 동굴 앞쪽에선 밭을 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어요. 4·3 때 돌아가신 분들이 묻혀 있는 곳이라고. 그래서 저는 해가 조금만 어스름히 기울면 무서워서 집으로 도망치듯 왔습니다.”
증언자의 시아버지는 자신의 밭 앞 동굴에서 학살된 주검들을 꺼내 가지런히 눕혀 가매장했다고 한다. 동굴 안쪽부터 입구까지 샅샅이 파들어갔다. 증언대로 유해들은 줄 맞춰 뉘어 있었다. 총 8구의 유해가 이곳 별도봉 진지동굴 앞에서 확인됐다. 이 중 2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군대 간 남동생의 생사를 몰라 애타게 기다리던 누나는 6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백골이 된 동생을 만났다.
남동생은 4·3 진압 작전을 펴던 9연대 군인이었다. 하지만 1948년 6월18일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터진 뒤 제주 출신 군인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색출된 이들은 새벽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처형됐다.
2007년 공항 1차 발굴 결과 수습된 128구의 유해 중 신원이 확인된 것은 26구이다. 이들은 1950년 예비검속 희생자들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과거 4·3에 연관됐거나 기존에 요주의 인물로 분류됐던 이들을 대대적으로 검속했다. 이른바 예비검속이다. 이렇게 잡혀온 이들은 고구마 창고 등에 갇혀 있다가 일제히 처형됐다. 이때 공항에서 확인된 이들은 서귀포, 대정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잡혔다가 희생당한 이들이었다. 제주시에서 검거돼 행방불명된 예비검속 희생자들의 주검은 여전히 공항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공항 2차 발굴 역시 평탄치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다. 3개년 계획으로 시행되던 발굴이 늦어지며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약 5m 높이로 복토된 흙을 걷어내는 작업에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1차로 흙을 굴착기로 걷어내고 2차로 인부들을 동원해 손으로 걷어냈다. 그 과정에 구덩이의 윤곽이 확인되었다. 그렇게 찾아낸 구덩이를 파내며 우리는 끔찍한 학살의 현장과 마주하게 됐다.
유해들은 5~6겹으로 쌓여 짓이겨진 채 뒤엉켜 있었다. 좁은 구덩이에 259구(두개골 기준)의 유해를 묻은 뒤, 공항 확장과 함께 그 위에 흙을 덮고 장비로 눌러댔기 때문이다. 전체 발굴에 1년 넘게 걸린 터라 중간중간 현장을 공개하는 현장설명회도 열었다. 이때 발굴 현장을 방문한 이들은 대부분 숙연해졌다. 4·3을 부정하던 이들도, 발굴을 회의적으로 보던 이들도 처참한 죽음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은 1949년 10월 불법 군법회의로 사형당한 희생자들이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잡혀 있다가 살해됐다. 유류품에서 이들의 사연이 묻어났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숟가락과 위장약 병 그리고 안경까지. 누군가의 소중한 남편이고, 아들이고, 아버지였던 이들이다.
좌우 이념이 아닌 인권의 문제
아직도 제주에는 4·3 당시 행방불명된 희생자가 3천 명이 넘는다.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한국전쟁 때 못 돌아온 이들, 바다에 수장되어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는 이들, 제주 땅 어딘가에 지금도 쓸쓸히 묻혀 있지만 찾을 수 없는 이들이다. 벌써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유가족들도 한분 두분 세상을 뜨고 있다. 이분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빨리 어딘가에 묻힌 희생자를 찾아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는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의 문제이다.
조미영 제주4·3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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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사진 속 4·3
누가 그들을 폭도로 몰았나
사진 기록으로 짚어보는 제주4·3의 역사…
미군 사진병 사진 속에 누락된 진실
제주4·3 한가운데 무츠란 이름의 미군 사진병이 있었다. 그는 잡혀온 ‘폭도’들, 폭도의 손에 희생된 여성의 주검, 사태 수습을 위해 제주로 모여든 역사적 인물들을 하나하나 사진에 담았다. 그러나 4·3의 진실은 그가 찍지 않은 사각(死角), 안 보이는 곳에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수집한 사진들에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친절한 설명을 달았다.
나는 제주도민이었다. 제주에서 태어났고,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하기 전까지 내 삶의 반경은 섬이었다. 섬 밖에 나가본 것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두 번의 수학여행이 전부였다.
나는 민오름을 좋아했다. 집 뒷산치고는 큰 오름이었다. 올라가면 제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풍광이 좋았다. 민오름을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코앞에 오라리 연미마을이 있다. 국민학교 소풍 때마다 지나쳤던 오라리 마을이 제주4·3 때 등장하는 ‘그 마을’임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2000년 즈음이었다. 당시 4·3으로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감춰진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며 내 생활과 기억의 일부이던 장소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던 오름에 으레 있는 버려진 무덤의 의미도 예전과 같을 순 없었다.
1948년 5월1일 일어난 ‘오라리 방화 사건’은 40년 넘게 ‘폭도’들이 오라리 마을을 공격해 방화하고 주민을 학살하는 것을 경찰이 격퇴한 사건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89년 <제주신문> 4·3취재반의 조사로 경찰의 사주를 받은 우익 청년단이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극적인 반전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 사태‘에 대한 군경의 무력 진압이 본격화됐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듯 4·3이라는 대량 학살이었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무성영상 한 편이 남아 현재에 전한다. <한국의 메이데이: 제주도>라는 이름의 영상은 제주경찰감찰청 입구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을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자수한 ‘폭도 살인범’과 노획한 ‘살인 무기’를 클로즈업한다.
기관총에 비하면 영상이 전하는 살인 무기라는 것은 죽창, 손도끼, 칼 등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느릿느릿 구부정한 채 건물로 들어가는 두 사람 역시 ‘폭도 살인범’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약해 보인다. 1948년 5월은 아니지만 6월에 종군기자로 취재했던 조덕송 <조선통신> 특파원이 쓴 기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포로들이 후송되어 온다. … 부린 채 말없이 이끌려가는 그들의 안색은 그들의 의복과 같은 색깔이다. 감히 그들을 어느 모로 보아야 폭도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 무엇 때문에 폭도로 규정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는가.”
영상은 곧바로 충격적인 장면으로 이어진다. 맞아 죽은 여성의 주검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미군 장교가 파괴된 도로를 지켜보는 모습과 함께 이내 미군과 경찰이 주민들을 심문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오라리 마을의 일부 가옥들이 불타는 장면이 나온다.
영상은 L-5 정찰기를 타고 공중 촬영한 장면과 오라리 마을로 출동해 마을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 모습을 지상 촬영한 장면이 교차편집돼 있다. 영상은 엉성하나마 의도를 갖고 편집된 것이다. 그렇다. 이는 단순 기록영상이 아니다. 사전 각본에 의해 철저히 준비된 기록물이다. ‘제주4·3’ 무장대가 잔악무도한 ‘폭도’고, 오라리 마을을 습격해 방화하고 주민들을 잔인하게 살인한 것‘처럼’ 편집을 했다.
이 영상을 찍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딱 그 시간에 공중과 지상에서 ‘오라리 사건’을 촬영할 수 있었을까.
당시 제주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에 배속된 123통신사진파견대 스틸사진가와 영상카메라맨이 있었다. 이들은 1948년 4월30일, 5월1일, 5월5일, 5월15일 제주도의 모습을 찍었다. 이 가운데 스틸사진을 찍은 무츠와 영상카메라맨 샤이다크가 이목을 끈다. 샤이다크가 촬영한 영상 속 일부는 무츠의 사진에 정지화면으로 포착돼 있다.
군 사진병들은 사전 기획 목적에 따라 특정한 시각을 이미지 기록으로 남기는 활동을 임무로 한다. 샤이다크가 찍은 영상만큼 무츠의 사진 속 시선이 매우 흥미롭다.
무츠는 123통신사진파견대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남겼다. 나는 그가 1948년 1~6월 한국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132장을 확인했다. 그는 서울, 인천, 수원 등 중앙은 물론 춘천과 제주 등 이른바 전선 지역을 두루 넘나들었다. 정치와 군사 관련 주요 피사체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의 모습을 사람들 일상 속에서 잘 포착했다.
4·3사건과 관련해선 18장(1장은 추정)의 사진이 남아 있다. 무츠의 사진 속 시선에서 ‘사각화’(死角化·어느 각도에서도 보이지 않게 함)한 것은 무엇일까?
무츠의 사진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공산 폭도’들의 잔악한 만행이다. 연구자들은 이 사진들이 프로파간다(선전) 목적으로 촬영됐다고 평가한다. 1948년 4월28일 김익렬 국방경비대 9연대장과 무장대 대장 김달삼 사이에 ‘평화협상’이 맺어진다. 그 직후인 5월 초는 국방군 강경파에게 이 협상을 파기하고 강경 진압을 정당화해줄 프로파간다가 절실하던 시기였다.
4·28 평화협상은 말이 평화협상이지 ‘귀순공작’에 가까웠고, 김익렬 연대장이 단독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의 지시와 제주 59군정중대장 제임스 맨스필드 중령이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협상 결과가 기대 이상이어서, 보고를 받은 맨스필드 중령이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딘 소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주한미군 제24군단 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의 결정 때문이었다. 하지 중장은 ‘5·10 총선거’를 앞두고 사태의 조기 진압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현재 병력으로 무력 진압을 했을 때 얼마나 빨리 사태를 끝낼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들에게 제주도민의 안위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하지 중장 주변의 미군 방첩대와 정보참모, 군정경찰을 대표하는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무력을 동원한 강경 진압 방침을 권고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는 5월1일 김익렬 연대장이 만난 미 제24군단 정보참모 중령과 방첩대 소령의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 방첩대 소령은 김익렬이 자체 조사한 오라리 사건의 진상을 듣고 “경찰 보고와 다르다. 그것은 폭도들이 한 것이다”라며 일축했다. 게다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해 토벌 강화를 지시했다. 하지 중장의 정보 라인과 경찰 수뇌부가 긴밀히 연계하면서 제주 지역 경비대 책임자의 의견을 묵살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진실을 알린 <제주신문> 4·3취재반의 실질적인 책임자이자 현 4·3평화재단 이사장인 양조훈의 평가가 주목된다. “평화협상의 구도를 미군과 경찰이 깨뜨렸다. 그뿐 아니라 제주도의 유혈을 불러일으킨 초토화의 근간도 미군의 발상에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김익렬 연대장이 보고한 오라리 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 5월1일 발생했던 일들만 정리하면,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등 우익 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에서 좌익 혐의가 있는 집을 찾아 불을 질렀다. 12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벗어날 무렵, 오후 1시께 우익 청년단은 무장대 20여 명의 추격을 받았다. 그즈음 마을 어귀에서 마을 출신 경찰 가족 1명이 피살됐다. 무장대 출현 소식을 듣고 경찰기동대가 출동했다. 그러나 이미 무장대는 떠났고, 주민들이 불을 끄고 있었다. 경찰은 마을 입구부터 총을 쏘며 들어왔고, 주민들은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여성 1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이후 경찰은 경비대 9연대가 마을로 출동하자 황급히 철수했다. 김익렬 연대장이 직접 현장 조사를 진행했고 다음날 방화 주동자로 대동청년단 단원을 체포, 구금했다.
40년 뒤 4·3취재반은 방화범 대동청년단원과 경찰의 총에 맞아 피살된 여성의 딸을 찾아냈다. 딸의 증언이 흥미롭다. 당시 “하늘에서 비행기가 오랫동안 머리 위를 맴돌았다”고 한다. 불타는 오라리 마을을 공중에서 촬영하고 있던 비행기를 본 것이다.
이후 미군은 영상과 사진으로 5월4일 이후 제주의 모습을 담았다. 공중에서 제주도 제59군정중대 건물, 공중과 지상에서 제주항의 모습을 담았다. 장소는 매우 상징적이다. 무력 진압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미군의 존재와 역할이 미묘하게 시각화하는 장소다. ‘폭도’와 주민을 구별하지 않는 무력 진압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미군이 드러나는 것은 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를 통치하는 제59군정중대에서 성조기가 펄럭이는 장면, 주한 미군정 최고 지도부가 비밀회의 참석을 위해 제주에 도착하는 장면, 미군 구축함이 제주도를 봉쇄하기 위해 제주항에 정박한 장면 등이 포착됐다.
특히 5월5일 비밀회의를 위해 주요 인사들이 제주에 도착하는 모습을 포착한 것은 참 흥미롭다. 딘 군정장관, 맨스필드 59군정중대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군정경찰의 책임자인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김익렬 국방경비대 9연대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날 회의에서 맨스필드 중령은 회의 내용이 ‘극비’이고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했음에도, 그다음날 딘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제주 사태’를 바라보는 회의 참석자들의 시각이 달랐음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외부의 ‘공산분자’에 의한 것이고, 사태가 곧 회복될 것이라 했다.
이 극비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주고받고, 무엇을 결정했을까? 김익렬의 회고록을 보면 ‘제주 사태‘의 원인을 둘러싸고 상반된 의견 두 개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경찰은 국제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계획한 폭동이므로 군경이 합동으로 무력 진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익렬 연대장은 사태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됐고, 경찰의 실책도 한 원인이라 지적하며 무력 진압이 능사가 아니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해 ‘폭도’와 ‘일반 민중 동조자’를 분리해야 한다고 맞섰다. 4·3을 민중항쟁으로 보는 처지에 서면 ‘폭도’와 ‘양민’을 구별한 김익렬 연대장의 시각에도 한계가 있지만, 당시 제주 지역 군 책임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을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그런 정도의 입장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격분한 김익렬 연대장은 몸싸움을 벌였고, 다음날 연대장 직위에서 해임됐다. 조병옥의 빨갱이 몰이야 별로 새로울 건 없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안재홍 민정장관의 통곡은 인상적이다.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것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이후 상황은 송호성 사령관이 “제주 사람들은 이제 다 죽었구나”라고 예상한 것처럼 전개됐다. 5·10 총선거가 제주도 2개의 지역구에서 무산되자 미군은 경찰과 경비대를 지휘하면서 강경 무력 진압 작전을 펼쳤다. 그 무렵 미 6사단 제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이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돼, 현지의 모든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사건은 본관의 계획대로만 간다면 약 2주면 평정될 것이다. 사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는 그였다. 여름 이후 미군 사진병의 시각에서 제주도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유혈 진압을 시각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사진병들은 한국의 이곳저곳에서 활동했지만, 초토화가 전개되던 제주도는 여전히 그들의 사각에 있었다. 제주에서 꽃모가지째 떨어지던 붉은 동백꽃은 2년 후 전국에 걸쳐 벌어질 동족 학살의 전조였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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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기획_여성과 4·3
4·3의 이 깊은 기억, 아무도 모릅니다
허영선 시인이 만난 제주4·3 피해 생존 여성들
여성들의 파괴된 삶이 증명하는 참혹한 역사
눈물마저 죄가 되던 시절. 그렇게, 제주4·3의 시기를 살았던 이들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을 간직한 이들이 있다. 4·3의 복판을 맨몸으로 관통한 여성들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살아낸 그들은 몸에 벼락처럼 가해진 참혹한 트라우마 속에 산다.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4·3 광란의 바람에 휩쓸렸고, 희생당했던 여성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4·3 70년. 아직도 흐르지 않는 세월을 가슴 깊은 우물에 담그고 사는 사람들. 과연, 그들의 기억을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_편집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안 해서, 결혼한 여성은 했기에 제주4·3이 몰고 온 폭풍을 비껴갈 수 없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의 기억은 이들에게 가해진 성폭력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치욕’을 증언하는 당사자는 거의 없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성을 잃는 것은 목숨만큼 위태로운 일이라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일까.
4·3 때 열여덟이던 한 할머니는 토벌대에 당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했다. 그가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다. “요즘 텔레비전에 누구누구한테 당했다는 얘기 나오면 가슴 덜컥해. 잠이 안 와.” 그는 지금도 자신을 가해한 군인의 얼굴을 기억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영상을 안방에서 볼 때도 늙은 가슴속이 스멀거린다. 오래된 흉터처럼.
누구에게 호소할 수 없는 성적 유린을 당한 여성들이 입은 상처는 후유장애로 편입되지도 못한다. 내면의 고통을 겹겹 포갠 채 살아갈 뿐이다. 4·3의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몸의 기억, 가족의 안위를 위해 받아들여야 했던 강제결혼 등 여성들을 둘러싼 기억은 목격자의 입을 통해 어렴풋 세상에 공개되곤 한다.
달빛을 보라 했다
1948년 12월, 4·3 초토화 시기, 표선면 토산리 집단학살 현장에서 토벌대는 여성들에게 달빛을 보라고 했다. 달빛에 비춰 여성들 여럿을 뽑아갔다. 살아 돌아온 이는 열다섯 소녀뿐이었으나 소녀는 이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성담을 쌓다가, 토벌을 피해 도망치다가, 느닷없이 총상을 입고 후유장애의 삶을 사는 여성들은 어떤가. 턱을 날려버린 총상을 입고,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싸맨 채 살던 진아영은 홀로 기억과 싸우며 신음하는 생을 살다 숨졌다.
그 광풍을 온몸으로 맞았던 양복천을 기억한다. “이제 그런 사태 온다 하면 죽지. 살 생각이 없어. 어떻게 살아.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입니까. 지금도 꿈에 나와. 이제도록 어찌 무슨 힘으로 살아졌는지.” 2009년 당시 93살이던 그는 몸서리치며 기억의 필름을 돌렸다. “3살 딸 등에 업고 10살 아들 옆에 섰어. 난 박박박 털멍 ‘선생님 날 살려줍서’만 하고. 올레 밖으로 도망가려는데 바로 총이 아들한테로 가버렸어. 아들이 ‘엄마아 엄마야’ 하니깐 ‘저거 아직도 안 죽었네‘. 팡 쏘안. 첫 총에 죽었수다. 차마 사람이 사람을 죽이랴 헷수다. 팡! 허난 셋이 마당에 엎어진 거라.” 순식간에 마당은 선혈로 낭자했다.
그의 등허리에 명중한 총알은 옆구리로 튀어나왔다. 등에 업힌 딸의 다리가 그 총알에 맞았다. 그날은 딸의 세 번째 생일날이었다. 그날 입은 상처로 평생 후유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던 딸 김순여. “곱은다리서 함덕장으로 갈 때는 마을에서 놀던 아이들이 놀렸지요. 기어서 가니까.” 딸이 자라면서 고통은 커져만 갔다. 어머니는 딸을 업어서 등교시켜야 했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힘들면 앉아서 모녀가 함께 울었다.
“예쁜 신발 한 번만 신어봤으면 하는 건 꿈이었죠.” 딸은 열여섯부터 발등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십 대가 되니 옆으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어머니는 속으로만 울었다. 오십 대가 돼서야 남편의 권유로 수술을 받았다. 그가 그랬다. “마음에서 없어질 상처는 아닙니다. 아무 친구한테도 말 안 했죠. 친구들은 소아마비로만 알았지요. 죽을 때까지 갖고 갈 상처지요. 남들과 함께 걸어보지 못한 거,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고문 역시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그들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날 고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을 살다 간 고난향. 그는 생전에 비행기 소리만 나도 쿵쾅, 심장이 벌렁거려 잠을 이룰 수 없다고 구술했다. 전주교도소에서 10개월 옥살이를 했던 그다.
“남편 없다는 이유로 집에 와서 마을 공회당으로 끌고 갔어. 며느릴 걸상에 가로눕혀 배 위 양편에 나무 판자를 지들렀어. 두 놈이 통나무 양쪽에서 네 서방 어디 갔느냐고 고문했지. 이 아인 모릅니다, 놔줍서 해도 놈들은 내 뺨을 때리고 그 짓을 했지.”
“폭도년이니 죽여야 한다”
1948년 5·10 총선거를 피해 산으로 올랐던 경험이 있는 여인들은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도피자 가족으로 몰렸다. 그들이 당한 고문 역시 혹독했다. 이들은 이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집을 회의 장소로 잠시 빌려줬던 양○○은 누군가의 밀고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일본에서 잠시 고향에 왔다가 일본의 남편한테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그는 5살 딸아이의 엄마였다. 그의 전 인생은 그날로 뒤집어졌다. 회의 참석자 이름을 절대 불지 않고 “모르쿠다(모르겠습니다)”로 일관했던 그에게 내려친 고문의 모습은 이랬다.
“이년은 폭도년이니 죽여야 한다고. 쉐(소) 닮은 년이니 죽여야 한다고. 돼지 달아매듯이 이레 착 저레 착 막 두드려 반 죽으니까 떨어집디다. 손을 내놓으니 몽둥이로 두드리곡 손가락은 완전 꺾어지니까, 상의는 벗기지 못하니까 아랫도리만 벗겨서 그렇게 두드립디다. 3일 동안 두드려도 바른말 안 하니 이런 지독한 년은 없다고. 천장에 달아매고 두드리다가 코로 주전자에 끓인 물을 들이켜니 죽어질 것 아니우꽈(아닙니까). 밖에 동지섣달 얼려놓은 물에 던져. 살아나니까 끌어다가 다시 코로 물을 붓고. 손목 심고 돌리며 이제도 바른말 못하겠냐고 과락 밀리니 이마 벗겨지고, 이빨 다 무너지고. 아픈 줄도 모르곡. 옷이라도 입혀 그렇게 하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 목숨 질긴 사람이우다.”
겨우 정신이 돌아온 그에게 순경이 말했다. “이제도 바른말 못하겠냐고. 그 순경이 자기 말만 들으면 살 수 있다고 헙디다….” 그날 이후 그의 생은 완전히 조각났다. 고문은 질겼고, 기억의 힘은 너무 강해서 지금도 고통은 밤까지 따라붙는다. 깊은 기억은 죽을 때까지 살아남는 힘을 갖는 건가.
만삭의 여인에게 가해진 고문도 있다. 출산이 임박했던 여인 전○○에게 달려온 사람은 산파가 아니었다. 남편이 산파를 데리러 간 사이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수없는 구타가 이어졌다.
“멍석말이가 다 뭐야. 이리 차면 저리 나동그라지고 할 때는 정신 좀 차려진 때야. 하루 만인지 이틀 만인지 살아났지. 온몸은 멍들어 형편없고. 다 죽은 걸로 알았어. 정신 나서 보니 애기도 있었어. 그러곤 정신을 놓아버렸어. 방은 피로 번번했고 순경들이 나갔어. ‘사람 죽었다’ 소리에 사람들이 달려온 거야.” 인근 병원 간호사 출신의 그는 고통 속에서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간호사로 다녔던 병원 의사들도, 동료들도 볼 수 없었다. 60년 넘어서야 병원 엑스레이를 찍었다. 병원에선 머리가 함몰된 지 40년 넘었는데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 했다. 집안 사람들도 그의 한쪽 눈이 멀었다는 것,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것을 알지 못했다. 절대 말하지 않았다. 마을 팽나무에 임신부를 매달아놓고 학살한 일도 있었다.
주검을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
남편 잃고 홀로된 여성들이 살아갈 힘은 오로지 자식들이었다. 4·3 시기 어디론가 사라진 남편을 대신해 자식들과 시부모를 모시고 피신을 한 것은 여성들이었다. 그러다 붙잡히면 도피자 가족으로 모진 고문을 겪었다. 행방불명자 가족이 있는 여성들은 주검을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산다. 젊은 남편은 죽고 당신은 아흔 넘게 살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인도 있다.
행방불명된 이십 대 남편이 행여 어디선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며 기다리던 가시리의 박내은. 그는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이 벌어지자 제주시 연동에 있는 한 방송사를 찾았다. 혹시 남편이 육지 어딘가에 살아 있어 자신을 찾지 않을까 해서였단다. “이산가족들이 울고불고하는 장면이 텔레비전 나올 때 혹시 (남편이) 육지로 넘어가 살았으면 그래도 편지라도 할 것인가 해서 오래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한 여인은 대구형무소에 수용당했다는 남편을 찾아갔지만,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찾을 길 없는 주검 대신 자신이 갖고 간 옷을 사른 재를 한 줌 손수건에 담고 왔다. 두 남동생이 학살된 데 이어, 예비검속으로 어머니와 올케, 어린 조카마저 행방불명됐다는 김순아. 그 역시 가족의 주검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친정아버지로 인해 친정가족 모두 4·3으로 몰살됐다. 그래서 4·3 기사는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했다. “예전엔 바다에서 헌 고무신짝만 봐도 어머니 생각, 헌 걸레만 봐도 어머니 생각. 이런 꽝(뼈)만 봐져도 어머니 생각 나는데 찾지도 못하고. 내가 죄인이야.”
육지 출신 경찰의 수양딸로 들어가 평생 자신의 성씨가 바뀌어버린 여인에게도 4·3은 입 밖에조차 내지 못하는 고통이다. 팔순을 앞둔 그는 아예 고향 땅 제주도를 밟지 않는다. 원망은 자신을 그리 놔둔 오빠에게 향한다. 부모님 호적에서 빠진 채 평생을 살아온 여든 살의 강○○.
사라졌던 아버지는 얼마 뒤 광주형무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그는 부모님이 4·3 때 왜 죽었는지, 70년이 된 지금까지 “여자라서 물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붙잡혀간 뒤 중산간 마을 봉개동에 살았다는 그의 집에 군복 입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아들을 내놓으라’며 어머니를 회초리와 몽둥이로 매타작했다. 어머닌 말 못하는 흉내를 내며 맞기만 했다. 이후 열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3살 여동생은 굶어 죽었어. 우리 어머닌 눈물도 하나 안 내고, 묻을 걱정이라. 이 아길 어찌 묻을까. 당(친족)한테 아이를 묻어달라고 사정을 한 모양이라.” 갈 곳 없는 그들은 외양간에서 잠을 잤고, 제사도 쇠막에서 했다. 한 번이라도 밥을 먹고 싶었다. 11살 그에게 수양딸 삼자고 우도에서 한 엄마가 찾아왔다.
평생 뒤틀린 삶 살아낸 여인들
“이 아이를 우릴 줍서. 어머닌 절대 안 된다고 했어. 죽어도 같이 죽자 했어. 막 울었어. ‘어머니, 나라도 살아야 할 거 아니우꽈. 쌀도 하나 없는데.’” 한 입이라도 덜어야 했다. 그렇게 수양딸로 가 6년을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너희 엄마가 크게 울더라. 그렇게 우는 사람 처음 봤다고 해. 그래서 나는 절대 우도에 (수양딸로) 간 말 안 해. 챙피해서. 물질해서 친정집 세 개 사준 적도 있어.” 살아남은 남매의 호적은 부모가 아닌 친척 호적에 남았다. “우린 왜 호적도 못 찾는지, 누군한테 물어야 하는 건가? 우리 아버지는 첫아기를 서른에 났어. 아들도 없는데 (군복 입은 사람들이) 왜 아들을 내놓으라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 아직도 자발적으로 남의 집에 갔다는 말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그가 그런다. “그렇게 곱닥한(고운) 사촌언니도 임신했는데 죽었어. 막 화나지. 죄 없는 사람들을 왜 죽여. 징글징글하지.”
엉키고 뒤엉키는 4·3의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떠난 사람들 가운데는 “좋은 세상이 곧 올 줄 알았다”며 주체적으로 활동했던 여성들도 있다. 오사카에 사는 조은숙은 어려서 본 동네 학살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땐 총 맞아 죽는 사람은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여성은 “학살 모습을 봐선지 꼬챙이에 꿴 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다”고 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놓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4·3 희생자의 21.3%가 여성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런 무장도 없는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주섬 거기 있었다는 이유로 희생당했다. 대통곡을 가슴에 묻고, 애도조차 할 수 없었다.
죄 없이 육지 형무소에 갇힌 한 여인은 갓난아이가 죽자 찬 바람 쌩쌩 부는 전남 목포의 한 파출소 빗자루 위에 주검을 올려놓고 왔다고 눈물을 흘린다. 젖이 퉁퉁 불은 수용소의 또 다른 젊은 엄마는 “빨갱이 새끼에겐 젖도 주지 말라”는 저주의 목소릴 들었다. 밤엔 산이 무섭고, 낮에는 아래가 무섭다고 울부짖던 젊은 여성들은 4·3의 비극이 “시국 탓”이라 말한다. 국가의 폭력에 희생됐으나 이들은 누구를 원망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이들의 감춰진 목소리는 여전히 4·3 역사에서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꽃 같은 청춘의 생 위에 쏟아진 광풍에 휩쓸려 평생 뒤틀린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들, 4·3의 가장 가혹한 시간이었던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2월까지 키보다 높은 눈을 짐승처럼 헤치며 헤매야 했던 여인들, 아이가 아이를 업고 죽어가던 모습을 눈물 없이 지나쳐야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들의 삶이 증거다
기억과의 싸움은 올해로 70년을 맞는다. 그 시기를 살았던 여성들의 사연은 국가 공권력이 무고한 여성들의 인권을 얼마나 철저히 유린했는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을 보여주는 극명한 증거이자 진실이다. 살아남은 그들이 찬란하나, 가혹한 제주의 4월을 통과하고 있다.
허영선 시인·제주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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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예술로 피어난 4·3
“4·3은 내 숙명이었다”
제주4·3의 진실 가장 먼저 알린 <순이삼촌> 작가 현기영…
“두 차례 끌려가 고초 겪었지만 다시 돌아가도 쓸 수밖에 없어“
제주4·3이 잊힌 게 아니라면, 광기의 역사를 고발한 문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4·3이 외롭지 않았다면, 야만의 세월을 기록한 예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이삼촌>의 현기영부터 김석범, 강요배가 있어 4·3의 슬픔이 뭍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영화 <지슬> <레드헌트>가 있어 4·3의 비극이 젊은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본디 예술이 세상에 대한 위로라고 할 때, 그 모범이 여기에 있다.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 없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 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 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 인사 가족들도 넋 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 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낮부터 시작된 이런 아수라장은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다.”(<순이삼촌> 중에서)
1978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현기영(사진) 선생의 중단편 <순이삼촌>이 실렸을 때, 그것은 하나의 문학사적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제주4·3’을 발음하지 못했던 유신 말기에,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평생을 환청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끝내 목숨을 끊은 한 여인의 비극적 생을 다룬 이 소설은, 제주도 방언의 질박함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플래시백 구성으로 남다른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
그러나 작품의 성과만으로 <순이삼촌>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순이삼촌>은 소설이기 전에 4·3의 진실을 폭로한 최초의 기록으로 평가돼야 한다. 문학과 활자 매체를 통틀어 4·3을 처음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뭍사람들에게 4·3의 원형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비극을 알게 된 우리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훗날 4·3 진상 규명 운동에 뛰어든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의 독자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꿈속에서 순이삼촌이 나타나”
초기작 <아버지>와 <초혼굿>에서도 4·3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4·3을 정면으로 다룬 첫 작품은 1978년 <순이삼촌>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경외감마저 든다.
젊을 때라 겁이 없었던 것 같다. (웃음) 처음부터 4·3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런데 막상 데뷔하고 보니까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문학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더라. 4·3을 말하지 않고 다른 걸 쓰면 엉뚱한 말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세상 물정 몰랐던 거다.
해야 할 말을 했다는 이유로 필화 사건도 겪었다.
<순이삼촌> 소설집이 나온 1979년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3일 동안 고문을 받고 한 달간 감옥에 갇혔다. 이듬해인 1980년에도 종로서에 끌려가 일주일간 취조받은 끝에 책이 판매 금지되기도 했다.
등단 이후 가장 왕성하게 집필해야 할 시기에 고초를 겪은 셈인데.
그렇게 얻어맞고 나오니까 억울해서 못 견디겠더라. 더 이상 쓰지 말라는 건데, 아! 너무 억울해서 고등학교 동창 녀석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맞을 짓을 하고 다녔다’고 하더라. (웃음) 그렇게 한동안 술로 허송했다. 글을 못 쓰겠더라고. 그즈음 연세대 학생들이 찾아왔다. 내게 “선생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십니까? 오늘이 4·3입니다” 하는 거야. 그렇게 지냈지. 그해엔 5·18도 터지고 더더욱 술만 마셨어요.
다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꿈속에 나타난 순이삼촌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술로 분노를 삭이며 지낸 지가 1년이 채 못 되었을 때다. 어느 날 낮술 먹고 집에 고꾸라져 있는데 빛 속에서 소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나타나더라고. 순이삼촌이야. 내가 만든 소설 속 주인공이 정말 실제 인물처럼 나타났던 거지. 백일몽이었죠. 나보고 ‘일어나라’고 소리쳤어. 정신이 번쩍 들었지. 마치 트라우마에 시달린 사람들을 손잡고 이끌어내는 장면과 비슷했어. 그 꿈 덕분에 위안을 얻고 절망을 버릴 수 있었지.
“‘공비’라는 말 때문에 국보법 면해”
<순이삼촌>을 이번에 다시 읽으니 동네 어르신들의 대화와 학살 사건이 플래시백되면서 교차편집처럼 이뤄진 구성이나 서북청년단 출신의 고모부 캐릭터를 집어넣은 점 등이 눈에 들어오더라.
플래시백은 별거는 아니고 영문 소설에 있는 기법을 가져온 거지. (웃음) 지금 생각해도 고모부 캐릭터를 넣은 건 잘한 거 같다. 소설에도 썼지만 당시 도피자 가족들 중에는 목숨을 부지해보려는 방편으로 이런 정략결혼이 성행했다. 연대가 교체돼 육지로 떠남에 따라 거의 파경에 이르고 아비 없는 자식들만 서럽게 자라는 경우도 많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웃을 이루며 살아가게 된 공동체의 비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4·3 연구가 이뤄지기도 전에 문학이 당대의 삶을 재구성한 느낌이 들었다.
제주 공동체의 본질이지. 그때는 계산하고 썼어. 고모부의 입을 빌려 동네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을 일부러 ‘공비’라고 썼어. 나중에 수사기관에서 국가보안법으로 걸려고 하는데 공비라는 말 때문에 안 됐다고 하더라.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이후엔 ‘산사람’이나 ‘입산자’라고 썼지.
이번 설에 문재인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는데, 무슨 얘길 나눴나.
감사하지. 묻지 않았는데, 4·3 70주년 추념식에 내려와서 참배한다고 하시더라. 4·3 전국화하느라 다들 애쓴다고 격려하시고. 특별법 통과 도와달라는 말을 못 드렸는데 아마 아시겠지.
4·3 70주년을 맞아 역사적 재평가 움직임도 일고 있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항쟁이었지. 이데올로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해방 후에도 강제 공출에 시달린 제주 민중의 생활고가 터져나온 거다. 항쟁과 대학살의 측면이 함께 있다. 변방과 속국의 제주 역사가 현대에서 재현된 것이지. 중앙이 가해 세력이고 섬은 피해자가 되는 구조다. 70주년을 맞는 4·3이 대한민국 역사로 기록돼야 하는 이유다.
제주 민란을 다룬 <변방에 우짖는 새>와 일제 때 잠녀항일투쟁을 다룬 <바람 타는 섬> 등 4·3문학의 전사(前史)가 되는 작품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왔지만, 여전히 선생을 4·3 작가로 일컫는다.
숙명이다, 버릴 수 없는. 문학이 해방이고 자유인데 구속받지 않고 쓰고 싶은데 잘 안 돼. 벗어나려고 유년의 눈으로 제주의 자연을 그린 <지상에 숟가락 하나>도 썼지만 그 자연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는 거야. 이제 편하게 운명이려니 생각한다. 인생이 한순간이더라고. 이거저거 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더라.
“다 미친 세월이었던 거지”
개인적으로 노인의 혜안이 눈부신 <마지막 테우리>에서 4·3 화해의 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오래전에 제주의 한 마을로 취재를 갔더니 두 할머니가 나무 그늘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 한 사람 남편은 경찰인데 싸우다 죽고, 한 사람은 죽은 산사람의 부인이더라. 두 할머니가 사이좋게 지내더라고. 다 미친 세월이었던 것이지. 그런 것들이 화해와 상생의 단서가 되지 않을까.
성남=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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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를 읽다
제주 4·3을 인류 보편적 비극으로 승화시킨 김석범의 <화산도>…
70년 전 비극을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두 번째는 더 깊고 아린 체험이었다. 지난 1년 여에 걸친 월례 세미나를 통해, 김석범(1925~ ) 대하소설 <화산도>(火山島) 전 12권을 다시 완독했다. 2015년 10월 <화산도>가 한국어로 완역된 직후 약 석 달에 걸쳐 처음 독파한 지 2년여 만이다. 좋은 작품 읽기가 늘 그러하듯이, 첫 독회에서 스쳐 지나갔던 문제적 장면들, 애틋한 마음들, 가슴 시린 비극들, 뇌리를 관통하는 생생한 묘사들이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다. <화산도> 두 번 읽기를 통해, 나는 이 기념비적 작품의 뛰어난 문학성과 비범한 상상력, 치열한 역사의식, 인간과 사회·혁명에 대한 깊은 안목을 다시금 환기하고 싶다.
일본 문인들의 편견을 깬 수작
작가는 2017년 9월18일 ‘김석범 문학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 ‘화산도와 나-보편성에 이르는 길’에서 “‘일본어로 조선을 쓸 수 있는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 고향 제주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대학살 ‘4·3’을 테마로 글쓰기를 시작한 나에게 일본어로 조선에 대한 글을 못 쓰게 된다면, 글쓰기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애초에 한국어로 <화산도>를 쓰다 그는 결국 일본어로 <화산도>를 완성했다. 이 점은 일본어로 조선(문학)의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통렬한 자각의 발로이다. <화산도>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 문학은 상위 문학이고 재일조선인 문학은 그 밑에 있다’는 편견, 즉 ‘조선을 테마로 한 작품은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완강한 선입견에 대한 확고한 저항의 찬란한 결실이다. 작가는 일본어로도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대마도 밀항 때 만난 여성의 상처에 충격 받아
<화산도>를 통해, 4·3의 전개 과정은 물론, 친일 문제와 친일문학, 해방 직후의 역사적 과제, 한국 현대사와 미국의 역할, 제주의 풍속과 인문지리, 혁명과 이념에 대한 사유와 성찰, 재일조선인의 상처와 저항, 밀항과 귀환의 험난한 여정, 해방 직후 일본에서 귀국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투쟁과 내면, 서북청년단의 행태와 욕망 등은 그 최대의 미적 형상화에 도달한다. 이 모든 주제들은 작품 속에서 단단하게 결합되어 적절한 자리에 배치된다.
4·3 때 일본에 있었기에 현장 확인을 위한 답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김석범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가 그로 하여금 장장 20여 년 동안 대하소설 <화산도>를 쓰게 만든 마음의 동력이었다. 작가는 4·3의 참화를 피해 대마도로 밀항한 친척과 함께 만난 여성이 고문으로 유방이 사라진 것을 비통한 마음으로 확인하며, 제주에서 자행된 미증유의 대학살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때로 슬픔은 그 어떤 정서보다 강렬한 힘이 된다.
해방 직전 일본에 있는 가족과 영원히 이별하겠다는 각오로, 홀로 조국을 거쳐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충칭(중경)으로 망명을 시도했던 작가 김석범의 행로를 생각해본다. 해방 직후 국학전문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며 위당 정인보를 만나 대화하기도 했던 학생 김석범이 있었다. 1946년 2월8일부터 9일 사이에 종로 YMCA 강당에서 열린 조선문학가동맹 주관의 ‘전국문학자대회’에 참석해, 시인이자 비평가인 임화가 연단에서 ‘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 과제에 관한 일반보고’를 발표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청년 김석범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그 마음과 체험, 역사적 상상력이 <화산도> 곳곳에 켜켜이 배어들어 있다. 김석범은 20대 초반에 간접 체험한 고향 제주(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고향 제주를 마음속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의 참혹한 비극을 평생 동안 창작의 원동력으로, 사회적 실천의 근거로 삼아왔다.
“작가를 만나면 작품보다 환멸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김석범 선생은 참으로 진솔한 편이다.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했던 재일동포 조동현의 발언을 기억한다. 오랜 세월 작가 김석범을 깊이 이해하고 도운 그는 “<화산도>를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토록 가벼운 시대, 때로 그 어떤 무거운 역사적 과업과 깊은 인식도 스마트폰 앞에 속수무책인 시대에 200자 원고지 2만 장에 이르는 대하소설 <화산도>를 독파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벌어진 슬픈 역사와 인간에 대한 곡진한 애정과 이해 없이는 참으로 힘겨운 도정이 아니겠는가.
문학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
올해로 우리 나이로 아흔넷에 이른 김석범은 현재 <화산도> 이후의 스토리 <바다 밑에서>(海の底から)를 일본의 대표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연재하고 있다. <바다 밑에서>에는 이방근의 자살과 남승지의 일본 밀항 이후에 전개되는 얘기, 즉 제주에서 그토록 애잔한 관계였던 남승지와 이유원이 일본에서 맞이하는 슬픈 해후와 어긋남의 장면이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또한 4·3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한 남승지와 한대용이 이방근의 삶과 죽음을 회상하는 대목도 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다. 이번 2018년 4월호 <세카이>에는 <바다 밑에서> 14회 연재분이 수록되었다. 90대 중반에 가까운 연세에 아직도 소설을 월간지에 연재하다니, 노대가의 참으로 엄청난 문학적 열정의 소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생이 지속되는 한, 4·3에 대해 계속 발언하고 형상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의무감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마음이 과연 가능했을까.
이제 <화산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이해는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바다 밑에서>를 비롯한 김석범의 다른 저작들이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또 한 편의 <화산도> 후일담이라 할 수 있는, <땅밑의 태양>(地底の太陽, 슈에이샤, 2006)과 <전향과 친일파>(1993), <고국행>(1990)을 비롯한 김석범의 산문집과 평론집도 한국어로 옮겨야 하리라. 최인훈의 산문과 소설의 관계가 잘 보여주듯, 김석범의 산문 역시 소설과 밀도 깊은 관계를 이루며 또 하나의 독창적인 세계 인식을 우뚝하게 보여준다.
김석범은 “문학작품을 통해 해방 공간의 역사를 재검토하는 것이 <화산도> 창작의 기본 의도이다. 앞으로 통일이 될 때, 4·3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정리해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을 수립하기 위해 대학살을 자행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내 개인적 소망은 <화산도>의 주인공 이방근을 통해 독자들이 해방 공간의 역사적 진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내가 <화산도>를 쓴 궁극적 목적은 작품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에 있다”고 말한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에 대한 남다른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김석범 작가는 <까마귀의 죽음>(1957)에서 <화산도>로 이어지는 4·3을 소재로 한 작품과 실천 활동을 통해, 일본 지식사회에 4·3의 참담한 비극을 최초로 알리는 ‘평화를 위한 파수꾼’ 역할을 담대하게 수행해왔던 것이리라.
곧, 4·3 70주년을 맞이한다. 제주의 슬픈 역사, 더 나아가 이 땅 한반도 현대사의 상처와 모순, 그늘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화산도>를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민주와 평화가 번성하는 시기일수록 첨예한 사회적 대립의 역사적 내력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 이 땅의 문학과 역사는 어떤 작품보다도 <화산도>의 세계를 정면으로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 이즈음 남과 북, 미국 사이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이 흐름에 김석범은 누구보다도 반가운 마음일 것이다. 그는 “언젠가는 민주화가 된 ‘북’에서도 <화산도>가 독자의 손에 닿는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바 있다. 그렇다면 <화산도>가 한반도에서 명실상부한 존재 증명을 하는 순간은 북한의 독자들이 자유롭게 <화산도>를 탐독할 때가 아닐까 싶다.
<화산도>의 문제의식 촛불과 통해
2017년 9월 중순 제1회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수상차 서울을 방문한 김석범은 일본 귀국길에 공항으로 가기 직전 이 땅의 청춘들을 만났다. 3박4일에 걸친 한국 방문의 마지막 일정은 동국대 학생들과 대화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얘기를 경청하는 증손자뻘 학생들에게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함께해서 너무 좋다고, 이들이 이 땅의 희망이라고, 당신들이 촛불데모(혁명)로 새로운 정부 탄생에 커다란 기여를 한 주역이라고’ 말하며, 중간에 잠깐 눈물을 보였다. 그는 거듭 이 땅의 청춘들과 함께한 감격, 민주정부가 들어선 새 시대에 한국에 오게 된 소회를 토로했다.
역사가 그렇듯 작품도 운명이 있지 않을까. 두 차례에 걸친 보수 정권의 파행 이후, 촛불혁명으로 새롭게 진전한 한국 사회에선 <화산도>에서 제기된 문제의식과 의제에 대한 열린 대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곧 열릴 4·3 70주년 행사에서 벅찬 감격과 깊은 회한의 표정을 지닌 김석범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부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권성우 문학평론가(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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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원혼을 달래는 씻김굿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이 그린 제주 민초들의 상처…
4·3의 비극, 강정마을에서 재현되나
금기시됐던 제주4·3을 세상에 처음 알린 건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었다. 그 뒤 회화, 음악, 연극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4·3 예술이 피어났다.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화 <동백꽃 지다>는 4·3을 대중적으로 알린 대표적 작품이다. 4·3의 아픔과 의미를 국내외에 알린 영화로는 오멸 감독의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를 손꼽을 수 있다.
윤중목 영화평론가는 책 <지슬에서 청야까지>에서 “<지슬>은 제주4·3을 다룬 영화다. 제주 출생의 오멸 감독은 4·3에서 기인한 가위눌림을 비로소 <지슬>을 통해 흐느끼며 대속했다. 그가 ‘표현의 자유’에 의연해질 수 있도록 한 <순이삼촌> 작가 현기영과 화가 강요배에 감사해야 한다”고 썼다.
흥행뿐 아니라 작품성도 인정받아
<지슬>은 4·3 때 토벌대를 피해 제주 안덕면 동광리의 ‘큰넓궤’(‘큰 동굴’이란 뜻의 제주말)에 피신했던 주민들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실제 동광리 주민 120여 명은 1948년 겨울 50~60일 동안 캄캄한 굴속에서 피신 생활을 하다 토벌대에 발각됐고, 한라산으로 도망가다 붙잡힌 주민들은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됐다.
<지슬>은 총제작비 2억5천만원의 저예산 독립영화지만 커다란 대중적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2013년 3월 개봉해 관객 14만 명이 보았다. 흥행과 더불어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시민평론가상 등 4관왕, 2013년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극영화 경쟁 부문 심사위원 대상, 프랑스 2013년 브줄국제아시아영화제 황금수레바퀴상 등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었다.
영화는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은 4·3 희생자를 위한 씻김굿이다. ‘신위(神位·영혼을 모셔 앉힌다), 신묘(神廟·영혼이 머무는 곳), 음복(飮福·영혼이 남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소지(燒紙·신위를 태우며 염원을 비는 것)’ 등 제사의 절차에 따라 네 시퀀스로 전개된다. “제주4·3을 재현한다는 목적보다는 당시 이름 없이 사라진 원혼들에게 위로를 보내기” 위해 오멸 감독이 의도한 연출이다. 토벌대가 휩쓸고 지나간 빈집에 덩그러니 놓인 제기에서 시작된 제례는 희생자들의 지방을 태우며 그들을 위무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에 제주 주민들과 제주의 대자연을 담는다. 제주의 독특한 지형을 담은 숲 곶자왈, 4·3 당시 실제 주민들이 몸을 숨겼던 큰넓궤, 총을 든 토벌대와 마을 주민들이 대치하는 용눈이오름 등지에서 촬영된 무채색 화면은 말 못할 깊은 아픔을 간직한 진짜 제주의 모습을 재연한다.
토벌대에도 감자를 건넨 주민들
영화는 사건보다 사람 이야기에 집중한다. 특히 동굴에 모인 이들이 지슬(감자)을 나눠 먹으며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주민들은 집에 두고 온 돼지가 굶어 죽을까봐 걱정하고, 다리가 불편해 집에 두고 온 어머니를 모셔올 방법을 궁리하고, 마을 총각·처녀의 연애담이나 자식 혼사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들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영화는 주민이 겪은 비극뿐 아니라 ‘폭도’를 죽여야 했던 군인들의 상처도 어루만진다. “여기 있으면 죄 없는 사람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탈영을 생각하는 병사들의 인간적 고뇌를 담으면서, 상부의 명령으로 살인 병기가 되어버린 이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인 ‘지슬’은 제주말로 감자를 뜻한다. 감자는 영화에 중요한 오브제로 자주 등장한다. 동굴에서 따뜻한 감자를 나누는 주민들, 아들 무동을 위해 죽으면서까지 감자를 품에 안은 노모, 그 감자를 가져와 동굴 주민들과 나누는 무동. 주민들을 살상한 토벌대에도 감자는 귀중한 식량이다. 박 상병은 총을 겨눴던 순덕에게 동료들 몰래 감자를 건네려 하고, 주민들은 탈영하다 부상당한 군인에게 기꺼이 감자를 건넨다. 사람들 손에 든 감자는 극한 상황에서도 빛나는 삶의 의지와 온기를 뜻한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오멸 감독은 영화에 제주의 정서와 풍습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내부인인 그가 만든 영화는 리얼리티 문학을 보는 듯하다. 그는 그동안에도 데뷔작 <어이그 저 귓것>(2009)은 물론, <뽕똘>(2009), <이어도>(2011) 등에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에는 ‘끝나지 않은 세월2’라는 속편을 뜻하는 부제가 붙어 있다. 4·3 당시 한때 친구였던 이들이 무장대와 경찰이 된 비극적 상황을 그린 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을 찍다가 2005년 뇌출혈로 사망한 김경률 감독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영화 <지슬>엔 고 김경률 감독이 총제작 지휘로 이름이 올라 있다. 김 감독이 남긴 <끝나지 않은 세월>은 4·3을 소재로 한 최초의 극영화이자 <지슬>이 있게 한 배경이자 4·3 극영화의 물꼬를 튼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관광지로 알려진 제주의 실상
그 밖에 4·3을 그린 영화로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1996), 김동만 감독의 <무명천 할머니>(1999), 임흥순 감독의 <비념>(2012) 등이 있다.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 나온 <레드헌트>와 <무명천 할머니>는 세상에 감춰진 4·3의 진실을 드러내는 구실을 한 작품이다. <무명천 할머니>는 1949년 총탄에 맞아 턱을 잃고 반세기 이상 턱에 하얀 무명천을 두른 채 살다가 2004년 돌아가신 진아영 할머니에 관한 20분짜리 짧은 다큐멘터리다. 국가폭력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준다. <레트헌트>는 제2회 인권영화제에 상영된 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규정되기도 했다. 4·3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이뤄진 이 영화는 4·3의 잔혹함을 고발한다.
<비념>은 4·3과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통해 제주의 과거와 현재의 비극에 대해 말하는 다큐멘터리다. 4·3 때 남편을 잃은 강상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관광지로 알려졌지만 실은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제주도를 비춘다. ‘4·3의 원혼이 통곡한다’는 펼침막이 내걸린 강정마을의 갈등을 통해 제주도를 둘러싼 비극이 여전히 진행형임을 주지시킨다. 비극의 역사 4·3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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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응어리를 캔버스에 담다
제주4·3의 실체 알린 화가 강요배…
미술이 민중의 아픔 외면 말라 가르쳐
제주도민에게 제주4·3은 ‘올레걸러’(집집마다) 말 못한 고통의 시간이자 오랫동안 가위눌렸던 한의 실체다. 4·3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는 여전하다. 제주인들은 가족의 주검을 찾지 못해 헛묘(칠성판에 망자의 옷가지만 넣고 만든 무덤)라도 만들어 영혼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고, 행방불명된 망자를 위해 원혼을 달래는 ‘까마귀 모른 식게’를 지낸다. 영매의 새인 까마귀도 모르게 지내는 제사라고 하여 ‘몰래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이는 4·3에 대한 감시와 탄압의 결과다.
‘그림패 바람코지’의 활약
미술계가 4·3을 처음 다룬 것은 1989년 4월이다. 이때 ‘그림패 바람코지’ 그룹의 주도로 ‘4월 미술제’를 처음 열었고, 같은 해 8월 그림패 바람코지 회원의 ‘4·3 넋살림전’을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소개했다. 이처럼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제주도민에게 금기였던 4·3을 몇몇 화가가 간헐적으로 그리다가, 서사화가 강요배씨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1992년 3월 강요배의 ‘제주민중항쟁사-강요배의 역사그림전’은 한국 사회에 4·3의 실체를 바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에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을 민중항쟁사적 관점에서 서사적으로 그린 역사화를 선보였다. 4·3은 최소 3만의 인명을 앗아간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최초로 미국이 개입한 4·3은 이후 세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4·3은 해방공간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이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제주의 그림패 바람코지에서 부분적으로 다뤄지던 4·3은 비로소 강요배의 손에서 역사화로 부활했다. 강요배의 4·3민중항쟁 연작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한 농가에서 약 3년에 걸쳐 완성됐다. 화가는 말한다. “역사의 맑은 바람을 쏘여 내 가슴속 응어리의 정체를 밝혀보고자 시도한 것이 제주민중항쟁사 연작 그림”이라고.
4·3민중항쟁 연작은 종이와 캔버스에 혼합 재료로 그린 작품이다. 총 50점으로 구성된 이 역사화는 제주민중항쟁사를 서사화로 재현했다. 제주도 삼별초 항쟁에서부터 왜구와의 싸움, 이재수 반제·반봉건 투쟁, 일제강점기 잠녀항일투쟁, 해방 후 제주인의 귀향, 4·3사건 전개와 수난, 토벌이라는 이름의 상상할 수 없는 민중 학살 등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사방이 물로 가로막힌 화산섬에 이런 엄청난 항쟁이 있었다는 것, 제주도 민중이 험난한 역사의 돌밭을 걸었던 피나는 고난의 연대기가 있었다는 것에 한국 사회는 놀랄 뿐이었다. ‘제주민중항쟁사-강요배의 역사그림전’은 4·3을 한국 역사에 소생시키면서 다시 햇볕을 쬐게 한 기념비적 전시였다.
캔버스에 담긴 제주민중항쟁사
제주도 탐라미술인협의회의 출범은 4·3 미술의 역사적 관점과 현실주의 전망을 새롭게 여는 계기가 됐다. 이 단체는 1993년 9월18일 이호테우해수욕장에서 창립했다. 1994년 1월25일 창립전 ‘맑은 바람전’을 계기로 현실주의 미술을 주창하며 ‘현실의 잘못된 상태를 차례로 폐기해나가기 위해 진솔하게 탐구하고 행동하는 예술의 실천적인 현실운동’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 단체의 설립 배경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전국적으로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면서 미술과 사회운동의 연대적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미술운동계는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993년 탐라미술인협의회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 미술분과위원회로 재편되면서 제주 지역 민중미술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4·3미술제는 4·3을 미술로 형상화한 정기 미술행사로 탐라미술인협의회의 주력 사업이다. 4·3미술제는 그림패 바람코지의 ‘4·3 넋살림전’을 계승해 발전시킨 것이다. 1994년 4월 열린 제1회 4·3미술제를 기점으로 2018년 제25회를 맞는다. 4·3미술은 역사에 묻힌 제주의 비극적 역사를 미술로 표현해 대중화하기 위해 리얼리즘 창작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제1회 4·3미술제 ‘닫힌 가슴을 열며’전, 제2회 ‘넋이여 오라’전까지는 제주 미술인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앙데팡당(심사나 시상식이 없는 자유 출품 전시회) 형식으로 열렸으나, 제3회 ‘4·3 그 되살림과 깨어남의 아름다움’전부터는 탐라미술인협의회 회원전으로 전환해 단독 개최하다 최근 몇 년 전부터는 회원전과 작가 선정을 하는 예술감독 제도로 바뀌었다.
성년을 넘긴 ‘4·3미술제’의 과제
이제 4·3미술제는 성년을 넘겼다. 초기에는 경찰의 감시를 받아가며 작은 판화 위주로 작품을 제작했고, 걸개그림 등 현장 집회용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 ‘놀이패 한라산’과 공조하며 생활 현장이나 대학 야외 전시도 마다하지 않았다. 미술의 목적과 실천을 민중성과 현장성에 두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미술이 역사를 외면하거나 민중의 아픔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핀 꽃도 아름답지만 그 꽃을 가꾸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소중하다. 역사는 자꾸 나쁜 쪽으로 기울어가며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의 꽃은 사람들이 돌보지 않으면 순식간에 시들게 마련이다.
어느덧 4·3 70주년을 맞는다. 올 4월은 4·3미술 행사도 풍성하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탐라미술인협의회의 4·3미술제 외에, 4·3평화재단이 3월26일부터 국내외 작가를 초빙해 대규모 기획전을 연다.
김유정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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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자이니치와 4·3
4·3 희생자를 선별하지 말라
민단·총련이 공동으로 기념하는 일본의 ‘제주4·3 70주년’
희생자에서 배제된 ‘항쟁 지도부’… 한국 정부가 풀어야
36년 동안 이어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극한 혼란 속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에게 일본은 더 나은 삶이 보장된 ‘신천지’였고, 차별은 당할지언정 학살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도피처’였다. 그렇게 일본으로 흘러든 이들이 제주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이른다. 제주 출신 자이니치(재일 동포)들이 가족과 친지에게 보내온 돈은 1980년대까지 제주 경제를 뒷받침하는 한 축이었다. 이들의 끈질기고 위엄 있는 삶은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일부다.
제주4·3 70주년을 맞이해 일본에서도 각종 위령제나 기념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4·3 위령제와 기념행사는 일본에서도 4월 연례행사로 정착된 지 오래지만, 70주년을 맞은 올해엔 예년보다 각별한 열의와 기운이 넘친다.
일본의 4·3운동
먼저 3월10~11일 이틀 동안 일본 오사카에서 ‘국제사회와 제주4·3―일본에서 보는 시각’이라는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제주에서 열리는 70주년 추모식엔 일본에서도 200명 넘는 방문단이 참가한다. 또 일본 도쿄에선 4월21일, 오사카에선 4월22일 대규모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다. 오사카에선 올가을을 목표로 독자적인 4·3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 밖에 4·3의 진실을 전하는 영화 상영, 패널 전시회, 학습회 등 다양한 행사가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준비돼 있다. 올해 일본의 4·3 70주년 기념사업은 예전에 없던 규모와 다양성을 자랑하는 사업이 될 것 같다.
돌이켜보면, 줄기차게 이어져온 일본의 ‘4·3운동’에서도 40주년(1988년), 50주년(1998년), 60주년(2008년) 등 10주기 사업들이 늘 운동의 큰 고비가 돼왔다. 4·3을 다룬 대하소설 <화산도> 저자 김석범이나 조선사 연구의 선구자 고 가지무라 히데키(1935~1989) 등이 준비한 40주년 기념 강연회에는 500명 넘는 시민들이 참석해 일본 4·3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4·3 유족이 대거 참석한 50주년 행사는 일본 4·3운동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됐다. 60주년 때엔 100명 규모의 제주 방문단이 고향을 찾는 모습이 일본 《NHK》 장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일본 전국에 방송됐다.
일본 4·3운동의 발자취와 성과에 비추어볼 때 올해 70주년은 어떤 의의가 있을까. 70주년을 앞둔 일본 4·3운동의 지향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글에서는 일본 4·3운동의 과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000년 만들어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은 제10조에 ‘대한민국 재외공관’에 피해자와 유족 피해 신고를 접수하는 ‘신고처’를 설치하는 조항을 담았다. 이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등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를 진상 규명하는 다른 과거사 관련 법률에는 볼 수 없는 규정이다. ‘재외공관’이라 되어 있지만, 여기서 ‘재외’는 주로 일본을 뜻한다. 4·3과 재일동포 사회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규정이라 하겠다.
일제강점기에 오사카와 제주를 잇는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라는 이름의 여객선 직항로가 만들어지면서, 1930년대 중반 제주도 인구의 약 4분의 1(5만여 명)이 일본에서 살게 됐다. 오사카엔 자연스럽게 제주도 출신자들의 확고한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일본과 한국의 경계를 넘는 제주도 주민의 생활권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사카, 일본 속 작은 제주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많은 제주인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가 4·3 전후의 혼란을 피해 다시 오사카 등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GHQ)은 일단 한반도로 귀환한 한국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도항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기에 이 시기 한국인의 도일은 밀항이라는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 기록 등 이 시기의 밀항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면, 4·3을 전후한 시기(1947~49년)에 대략 5천~1만 명의 제주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4·3의 진상 규명은 밀입국자를 포함해 만들어진 재일동포 사회를 외면해서는 결코 완결될 수 없다.
‘4·3 콤플렉스’라 일컫는 4·3 체험자의 좌절감이나 심리적 굴절도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재일 제주인 사회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권력에 저항한 대가로 4·3 체험자들은 너무나 크고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들은 자신이 겪은 일에 입을 굳게 다물고, 정치 자체를 기피하거나 금품에 집착하는 특성을 갖게 됐다. 반대로 권력이나 조직에 과잉 충성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일본에서도 4·3을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압력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제주도 출신자가 많은 오사카에선 이런 공기가 짙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일본 4·3운동은 이런 침묵의 벽이나 압력을 무너뜨리고, 4·3을 누구나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조사하고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4·3운동은 한국에서 이뤄진 여러 진전에 보조를 많이 맞춰왔다고 할 수 있다. 2003년 말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공권력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한 것은, 재일동포 사회 속 침묵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통령의 사죄는 일본 4·3운동의 진전과 더불어 재일동포 사회가 냉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4·3의 체험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크게 넓혔다.
일본의 4·3운동은 지금 최후의, 그러나 결코 낮지 않은 장벽에 맞닥뜨려 있다. 재일동포 사회는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와 달리 ‘일본 사회’라는 하나의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2001년 한국 헌법재판소는 4·3특별법에 대한 우익 세력의 위헌 소송에 기각 판단을 내리면서도 다음과 같은 부대의견을 달았다. 즉, ‘사령관급 공산무장 병력지휘관 또는 중간간부’ 혹은 무장봉기에 ‘주도적·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은 4·3특별법이 정하는 ‘희생자의 범위’에서 배제돼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4·3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집행기관인 ‘4·3위원회’도 이 헌법재판소의 의견에 따라 무장봉기를 주도한 남로당 ‘핵심 간부’나 무장대 ‘수괴급’은 희생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희생자 선별 기준을 정했다.
이른바 ‘북쪽’, 즉 총련계 재일동포 중에는 ‘핵심 간부’나 ‘수괴급’에 해당할 만한 관계자나 그 친족·자손이 적지 않다. 4·3특별법에 근거해 이뤄진 재일동포 사회의 희생자 신고 접수가 애초 예상보다 부진했던 것도 공식화된 ‘선별’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재일동포 사회의 이런 특수성을 고려할 때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앞으로 절실한 과제로 부각될 것이다. 4·3 무장봉기를 ‘반역’으로 보는 시각이 공적인 논리와 기준으로 지속되는 한, 재일동포 사회에서 4·3을 둘러싼 침묵의 압력도 지속될 것이다.
물론 ‘남로당’이라는 공산주의 정당이 대한민국 정권 수립 과정에 무력까지 써가며 저항했던 만큼 항쟁 지도부를 포함한 모든 희생자의 명예를 공식적으로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선·단정 반대 투쟁이 왜 제주도에서만 유일하게 ‘무장투쟁’으로 치달았는지 숙고해야 한다. 즉, 4·3 무장봉기는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탄압이면 항쟁이다’는 무장대의 주장에서 드러나듯, 미군정 아래서 친일 경찰과 우익 청년들이 제주에서 휘두른 횡포에 자위적 반항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혈연적 유대로 맺어진 도민 대다수도 그런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외부의 폭력이 혹독할수록 그 저항의 방법도 격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명예회복
2006년 6월 4·3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군인과 경찰도 ‘희생자’로 인정해야 할지에 관한 법제처의 판단이 있었다. 당시 법제처의 판단은 “군경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제주일보> 2006년 6월20일치). 이데올로기적 극한 대치를 상대적으로 파악하는 이런 시각은 당시 무장대에도 적용돼야 한다. 무장대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해방 정국의 과도기적 혼란 속에서 분출된 이데올로기와 정의의 관념을 지금의 기준으로 재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화해와 상생의 정신과 어긋난다. 어쨌든 모든 4·3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공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한, 재일동포들에게 4·3 해결은 여전히 미완일 수밖에 없다. ‘모든 4·3 희생자의 명예회복’이야말로 70주년을 지향하는 일본에서 4·3운동의 핵심적 과제다.
촛불혁명을 이어받은 새 정부 아래서 4·3 70주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재일동포에게 더없는 행운이다. 일본에서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그해 일본 4·3운동의 전환점이 되는 50주년 행사가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가 있던 이듬해(2004년)에는 1천여 한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56주년 기념행사(오사카)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민단·총련의 지단장급·지부위원장급 임원들이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려,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화합’의 행사로 진행됐다.
10년 가까운 보수·우파 정권 아래서 4·3운동 성과물에 대한 극우세력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래서 운동 역시 수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16년 겨울 촛불혁명을 거친 한국 사회엔 정의로운 사회 개혁의 기운이 넘치고 있다. 다시금 과거사 재정립 흐름이 고조될 것이 전망된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은 새 정부 아래 개헌 논의와 관련해 “헌법이 개정되면 그동안의 헌재 결정도 바뀌어야 한다. 헌법 재판은 사회 변화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연합뉴스> 2018년 2월8일치). 물론 이 발언은 4·3에 대한 헌법 판단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개헌 논의의 쟁점 중 하나는 “대한민국의 법통”이라는 맥락에서 1948년 정부 수립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2001년 4·3 항쟁 지도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도 영원불변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70주년이 놓아야 할 시금석
올해 70주년 일본 행사에 10년 만에 민단과 총련 임원들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또 제주방문단에 오랫동안 한국 입국이 어려웠던 ‘조선적’ 동포들도 참가하게 됐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서 진행 중인 4·3 70주년 기념행사는 촛불혁명이 열어놓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남북 화해의 뜻을 담은 행사라 할 수 있다. 물론 참다운 화해는 항쟁 지도부를 포함하는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 없이는 성사될 수 없다. 70주년 행사가 그 시금석이 될 것을 기원해 마지않는다.
문경수 리츠메이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