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용공(조작) 사건

난 당신이 조작한 걸 똑똑히 알고 있다. '때린 놈이 발 뻗고 자는 세상'

道雨 2021. 1. 30. 13:11

난 당신이 조작한 걸 똑똑히 알고 있다

 

[피해자 구술, 수상한 섬 수상한 이야기 14] 때린 놈이 발 뻗고 자는 세상

 

화해는 무엇일까. 누군가 손을 내민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남영동 1985>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근안에게 22일간 전기고문, 물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당한 김근태 전 의원은 그의 앞에 무릎 꿇으며 용서를 구하는 이근안을 끝내 용서하지 못한다. 왜일까? 그는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와 왜 화해하지 못했을까.

이근안은 1988년 온갖 불법 체포, 고문을 자행한 혐의로 수배되었고, 도피 생활 11년 만에 자수했다. 자수 후 검찰 조사에서 1985년 김근태 의원뿐만이 아니라 수십 명의 간첩 사건 관련자에게 고문을 자행했다고 인정했다.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던 이근안을 찾아간 김근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전 경감이 제게 '눈을 감을 때까지 용서를 빈다'라고 했지만, 이 양반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눈물을 안 흘리는 것이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 두려움은 많이 가셨지만 1980년대 중반에 무참하게 짓밟혔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면회가 끝난 후 돌아와서 이근안 전 경감의 용서를 빌고 싶다는 이야기가 진심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조금 괴로웠다.
- 김근태 "용서 빈 이근안, 진심이었을까" 심경 토로, <한겨레> 2006. 11. 07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라는 거짓말

 

▲  고문의 흔적을 보여주는 오경대씨. 그는 지금도 고문후유증으로 다리와 어깨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강광보의 구술 = "고문했던 놈들에게 내가 그랬어. 나 이제 징역 살고 나왔고 시간이 흘러서 나보다도 당신들이 내가 간첩이 아닌 걸 잘 알 것 아니냐고 하니까 웃으면서 피하더라고. '아이, 강광보씨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그러면서 막 피하더라고."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하는 수사관들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수사관들은 간첩으로 조작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피해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들이 자신들이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수사관들의 조작을 똑똑히 지켜본 피해자들이 '시대를 잘못 만났다'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사관들의 태도에 더욱 분노하는 이유다.

강광보의 구술 =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수사관들이 자기들도 조작이란 걸 안다는 걸 알거든. 왜 그러냐 하면 내 경우에는 조사과정에서 수사관 세 사람이 교대로 조사를 하는데, 하루는 젊은 수사관이 신문을 갖고 와서 뭐라고 하냐면, '당신 월남파병 때 동네에서 선전하면서 김대중이가 월남 파병하는 거 반대하니까 당신도 동네에서 선동하면서 하지 않았냐' 하는 거야. 나는 절대 그런 일 없다고 대들었거든. 그러는데 고참이 들어와서 가만히 듣고 있더니, 그거 몇 년도 사건이냐고 묻는 거야. 젊은 수사관이 신문을 보여주니 68년도로 나오거든. 그래서 고참이 뭐라고 하냐 하면 '야, 이놈아. 68년도면 이 사람(강광보)은 일본에 있을 때잖아' 하면서 그거는 빼라고.

또 한 번은 내가 일본에서 제주도로 와서 일본 사촌 형에게 전화를 했거든. 잘 들어왔다고. 수사관이 조사할 때 나더러 일본에 전화한 일이 있느냐고 해서 사촌 형님에게 전화했다고 했거든. 그런데 조사 과정에는 백부님이 나에게 간첩 교육을 시켰다고 만들었거든. 그러니까 수사관들이 한국에 왔으면 교육을 시킨 백부님에게 전화를 해야지 왜 사촌 형에게 했냐고 하는 거야. 그래서 숙부나 사촌 형이나 다 한마을에 살고 있고, 내가 한국 들어올 때 사촌 형이 많이 도와줬으니까 사촌 형에게 전화를 했다고 했지.

아, 그래도 수사관 이놈들은 '백부가 널 교육시켰으니까 백부에게 전화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막무가내로 하니까 내가 '마음대로 하시오'하고 더 이상 대꾸를 안 했거든. 한 시간쯤 지나서 젊은 놈이 나가더라고. 전화국에 가서 확인했나 봐. 아무리 확인을 해봐도 사촌 형에게 전화한 건 나오는데 백부에게 전화한 건 안 나오거든. 나중에 돌아왔는데 얼굴 빨개져 가지고 와서는 나한테 이놈 거짓말한다고 막 난리를 치는 거야. 당신들이 그렇게 조작하니까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자기들도 머쓱하니까 나를 때리기도 뭐하니까 나한테 침을 뱉더라고.

자기네도 그것이 조작이란 걸 알면서도 수사를 하면서,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 헷갈려할 때가 있더라고. 이게 코미디도 아니고 뭐야. 이렇게 웃기게 간첩 만드는 나라가 어딨어."

 

그렇게 간첩으로 조작되어 가지 않아도 될 감옥에서 6년 가까이 살아야 했다. 긴 수감 시간을 보내고 출소한 뒤 그를 조사했던 수사관이 찾아왔다. 

 

강광보의 구술 = "그렇게 조작해서 간첩이 돼 가지고, 교도소 살다 나와 가지고 3일인가 지나니까, 나 조사했던 수사관들이 왔더라고. 나를 고문한(때린) 수사관은 안 오고, 조사했던 수사관이 왔더라고. 고생 많았다고 하길래 내가 웃으면서 말했거든. '난 이제 징역 살고 나왔고 이젠 지나간 일인데, 당신들이 내가 간첩인지 아닌지 알 것 아니냐. 당신들이 조사를 했으니까.' 그러니까 막 웃으면서 '강광보씨 시대를 잘 못 만났다'고 막 웃더라고. 그러니까 본인들은 다 알고 있지. 조작이라는 걸. 꿰맞추려고 하니까 억지로들. 다 그래요."

 

김근태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근안의 진의를 의심했던 것은 피해자이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이근안은 진심으로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이근안은 2013년 1월 7일 자 <서울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간첩을 소탕하며 공적을 쌓고 국가에서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다가,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에 씹다 버린 껌이 되니, 처음에는 분한 마음도 들었다. 나라를 위해서만 일했는데, 시대가 바뀌었다고 이런 취급을 받나 싶어 억울하기도 했다'라고 했다. 그는 또 고문을 예술이라고도 했다.

 

무릎 꿇었던 사과는 기만이었다. 아니 과거 고문했을 당시보다 더욱더 커다란 가해, 2차 가해였다.

 

강광보의 구술 = "지금은 덤덤해. 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응어리가 남아 있어. 보안대 자리가 아파트로 변하니까, 옛날 그 시절이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거잖아. 그 당시 그런 생각 들더라고. 나는 어차피 일본의 백부님이 조총련과 관계있고 일본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의심받는 것이지만,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을 단지 나를 안다는 이유만으로 잡아다 놓고 고문하고 때리고... 면상을 때리고 그랬나 보더라. 여기로 불러서. 그 사람들도 거짓 진술서 썼더라고. 그 사람들이 무슨 죄야. 나 때문에 그렇게 곤욕을 치렀으니 내가 미안하지."

강희철의 구술 = "그때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다가 실황 조사 간다고 가고 나서 출소해 가지고 거기(산지 등대)에 한두 번 가봤는데, 옛날 그때 등대는 그대로 있는데 나머지 집터나 그런 건 변해버리고 등대만 남아있더라고. 이번에도 오랜만에 갔어요. 그런데 거기 가기가 싫어요. 왜냐면 옛날 생각 되살아나니까."

 

때린 놈이 발 뻗고 자고, 맞은 놈은 편히 못 자는 세상

 

▲  김평강, 강광보, 강희철이 자신을 고문했다고 주장하는 수사관 김아무개씨가 살고 있는 제주시 자택. 그들은 그렇게 한 지역에서 살고 있지만 사과는 없었다.
 

 
고문한 수사관이 피해자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시대를 잘못 만났으니 운이 없다고 생각해라.' 길을 걷다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하는 일도 운이 없어서인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회와 국가가 그 책무를 다하지 않아 생긴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리인을 선출하고, 그들이 올바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의 세금을 성실히 국가에 납부한다. 그렇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공무원이 도리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했는데도 시대 탓을 할 수 있을까? 공권력의 잘못을 '시대를 잘못 만난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 민주 시민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시대를 잘못 만났다는 말은 법과 질서가 없는 야만의 시대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시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부정과 일탈을 저지른 자들이다. 시민을 짓밟고 총과 칼로 권력을 잡은 이들이 잘못이다. 시대를 어지르고, 시민을 탄압해 놓고 어찌 운이 없다는 말로 치부하는가.

 

강광보의 구술 = "옛날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부분은 있는데 지금에 와서는 담담해요. 솔직히 어떻게 보면 수사관이 나보고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그랬는데, 시대를 잘못 만나면 간첩이 되고 잘 만나면 간첩이 안 되는가. 우리가 86년도 사건인데, 나는 1월, 강희철은 5월인가 6월. 이렇게 조작 간첩이 생겼는데,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한 명도 들어온 사람이 없어. 그러면 노태우가 된 다음엔 갑자기 조작 간첩이, 85~86년이 최고로 많이 들어왔거든, 박정희 때는 70년대 중반에 재일교포 학생들, 그러면 그렇게 많던 조작 간첩들이 어떻게 보면 우리가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갔는데... "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못 잔다'고 했던가. 그렇게 가해자가 불편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때린 놈이 발 뻗고 자고, 맞은 놈은 편히 못 자는 것이 실상 아닌가. 때린 놈은 진급하고, 훈장 타고, 정치인이 되는 등 승승장구하지만, 맞은 놈은 하루를 걱정하며, 자식 인생 망치는 잠 못 자는 놈이 된다.

 

[변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