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충렬사와 착량묘
# 통영 충렬사(忠烈祠)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8년 후인 1606년(선조 39) 제7대 수군통제사 이운룡이 이순신 장군의 충절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어명을 받아 건립한 사당이다.
충렬사(忠烈祠) 현판은 현종 임금이 1663년에 내린 사액 현판으로, 문정공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1670년에 제51대 수군통제사 김경이 동재와 서재를 지었고, 1681년에는 제60대 수군통제사 민섬이 충렬묘비(忠烈廟碑)를 세웠다.
충렬묘비는 각 면이 평평하게 손질된 길쭉하고 네모진 형태이다. 비문은 1614년 좌의정 이항복이 지었던 여수 ‘이충무공 대첩비’의 비문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1695년(숙종 21)에 수군통제사 최숙이 경충재를 증축하여 서당을 개설하고 지방민의 자제들을 교육했으며, 같은 해 최숙의 뒤를 이은 통제사 김중기가 숭무당을 창건하고 장교 3인을 차출하여 사무 · 관리를 담당하도록 하는 한편, 통영시 산양읍에 소재하는 연대도를 사패지로 받아 전답을 마련하여 사당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1795년 정조 임금이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를 발간하게 하고 어제(御製) 제문을 하사했으며, 1840년에는 이충무공의 8대손 이승권 제172대 수군통제사가 강한루와 영모문을 세웠다.
조선시대 후기인 1868년 대원군이 전국에 서원철폐령을 내릴 때에도 통영 충렬사는 보존하도록 했다.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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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충렬사는 사당을 비롯하여, 동재, 서재, 경충재, 숭무당, 비각, 전시관, 강한루 등 건물 17동과 5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충렬사는 충무공을 비롯한 휘하 장병의 위령을 위해,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드리고 있다.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는 탄신기념제, 그리고 한산대첩축제, 고유제를 전통 제례의식으로 봉행한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부터 관청의 지원이 중단되자, 지방주민들이 뜻을 모아 ‘충렬사 영구보존회’를 조직하여 향사 및 관리를 해 왔으며, 1951년에는 ‘재단법인 통영충렬사’를 설립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충렬사는 1973년 6월 11일 사적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 중정일(中丁日) : 중정일이라 함은 음력으로 월중 10~20일 사이에 드는 정일(丁日)로서, 천간(天干: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네 번째 날이다. 보통 서원에서는 음력으로 2월과 8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냄.
# 통영 충렬사 팔사품(八賜品)
충렬사 팔사품(八賜品)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지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자, 신종(神宗) 황제가 이순신에게 보내 준 여덟 가지의 물품이다.
통영 통제영에 300여 년 동안 보관되어 오던 팔사품은, 1895년(고종 32) 통제영이 해체되면서 이순신의 사당인 통영 충렬사로 옮겨져 봉안되었다.
아산 현충사 성역화 작업이 마무리된 1969년에 현충사로 옮겨졌으나, 통영지역 주민들의 요청으로 다시 충렬사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나라 황제가 보낸 팔사품은 8종류의 물품 15점이다.
구체적으로는 도독인 · 호두령패 · 귀도 · 참도 · 독전기 · 홍소령기 · 남소령기 · 곡나팔 등 여덟 가지 군대용 의장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독인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가지 유물은 각 2개씩이어서 전체 유물의 수는 총 15점이 된다.
팔사품은 1966년 3월 4일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순신이 생전에 사용한 유물은 아니지만, 명나라에서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 주는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팔사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ㆍ도독인 1개
도독인(都督印)은 구리로 만든 길이 15.1cm, 폭 7.8cm, 높이 1.8cm의 도장이다. 도장은 뚜껑이 있는 함에 보관되어 있는데, 함에는 ‘황조어사인’이라 쓰여 있다.
ㆍ호두령패 1쌍
호두령패(虎頭領牌)는 길이 31.8cm의 팔각형 형태로 생긴 나무패로, 군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한쪽에는 검은 칠을 하고 ‘영(令)’ 자를 새긴 다음 붉은색으로 메웠고, 다른 쪽에는 분칠을 하고 ‘대장(大將)’ 두 글자를 썼다.
ㆍ귀도 1쌍
귀도(鬼刀)는 전체 길이 137.9cm, 칼날 길이 83.3cm, 너비 7cm의 의장용 칼이다. 칼자루에는 용(龍)의 머리와 귀신머리가 새겨져 있다.
ㆍ참도 1쌍
참도(斬刀)는 길이 180.2cm, 너비 6cm의 칼이다. 칼자루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상어껍질로 싼 후 붉은 칠을 하고 소가죽으로 감았다. 칼집도 나무로 만들었다.
ㆍ독전기 1쌍
독전기(督戰旗)는 전쟁터에서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지휘관이 사용하는 깃발이다. 남색 비단 바탕에 붉은 비단으로 ‘독전(督戰)’의 두 자를 오려 붙였고, 한가운데에는 ‘범군임적불용명자처참(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 즉 ‘군사가 적을 만났을 때 명령에 따르지 않은 자는 처단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ㆍ홍소령기 1쌍
홍소령기(紅小令旗)는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데, 붉은 비단 바탕에 남색 비단으로 ‘령(令)’ 자를 붙였다. 홍소령기는 문관에게 영을 내리는 신호 깃발이다.
ㆍ남소령기(藍小令旗) 1쌍
남소령기는 홍소령기와 마찬가지로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데, 남색의 비단 바탕에 홍색으로 ‘령(令)’ 자를 붙였다. 무관에게 영을 내리는 신호 깃발이다.
ㆍ곡나팔 1쌍
곡나팔은 구리로 만든 나팔로 목이 구부러진 모습이어서 곡나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통영 착량묘(鑿梁廟)
착량묘(鑿梁廟)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착량’이란 ‘파서 다리를 만들다.’는 뜻이다.
당포해전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 참패를 당한 일본수군이 쫒겨 도주하다가,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에 좁게 연결되어있는 협곡에 도달하여, 돌과 흙을 파서 다리를 만들어 도망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순신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긴 이 지역 주민들은, 장군의 충절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착량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초가를 짓고, 충무공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정성껏 그를 모셔온 것이 이 사당의 시초가 되었다.
이 사당은 1877년 충무공의 10세손 통제사 이규석이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착량묘’라 했으며, 이곳에 호상재(湖上齋)도 같이 지어 지역주민들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교육공간으로 삼았다.
착량묘는 비바람으로 퇴락된 채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이래, 198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정화사업을 벌여, 동재와 고직사(庫直舍), 외삼문, 일각문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9년에 동재를 지었고, 1980년에는 고직사를 새로 지어 서원(書院)의 형태를 갖추었다.
현재 경역은 면적 899㎡이며, 건물은 사당, 서재, 동재, 고직사 등 4동의 건물과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정동에 있는 통영 충렬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향사를 봉행하며, 이곳 착량묘에서는 매년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이 순국한 날에 기신제(忌辰祭)를 봉행한다.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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