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 이후, 다시 문제는 민주주의다
지난해 12월3일에 시작되어 123일간 지속된 윤석열의 내란극이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통령 윤석열은 파면되었다.
파렴치, 무사유, 몰상식, 반지성으로 무장한 한 비루한 인간이 펼친 야만의 향연이 끝났다.
그가 권력의 최정점에서 벌이는 추태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됨에 안도한다.
세계 언론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타전하느라 바쁘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인들이 “민주화 이후 최초의 계엄 시도를 단호히 거부했다”고 전했고, 뉴욕타임스는 “쿠데타 시도에 대한 한국의 대응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도 윤석열 파면 선고는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역사적 결정”이라고 상찬했다.
미국 네티즌의 댓글도 재밌다.
“한국 법관들 빌려주면 안 되겠냐. 트럼프 탄핵만 하고 바로 돌려줄게.”
우리는 분명 위대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윤석열의 탄핵과 파면은 한국 민주주의 운동사에 새로운 장을 더했다.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10 민주항쟁, 2017년 촛불혁명에 이은 2025년 ‘빛의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찬란한 역사를 확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마냥 자랑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의 혁명사는 4·19혁명으로 끝났어야 했다.
위대한 민주주의의 역사란 기실 거듭된 군사반란 역사의 이면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리도 허약한가.
윤석열은 파면되었으나, 윤석열 내란세력은 파면되지 않았다. 그들은 건재하다. 행정부, 입법부, 법조계에 폭넓게 서식하고 있는 이 내란세력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 구조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내란세력을 청산하지 않는 한, 한국 민주주의는 상시적 위기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다시 민주주의다.
헌재 판결의 핵심도 바로 민주주의 문제였다.
윤석열의 죄는 무엇보다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에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가한 데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의 원인을 찾고, 이를 근원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시대적 과제라 할 것이다.
이 나라엔 민주주의의 정착을 가로막고 내란세력을 존속시켜온, 뿌리 깊은 세가지 구조가 존재한다.
첫째, 파시스트를 키우는 교육 구조다.
한국 교실에서 12년 동안 교육받으면 민주주의자가 되기보다는 파시스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을 무한히 경쟁시키고, 끝없이 우열을 나누며, 우월한 자가 지배하고 열등한 자가 복종하는 질서를 당연시하는 교실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새겨넣는다. 경쟁-우열-지배의 논리야말로 파시즘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수구-보수 과두지배의 정치지형이다.
보수를 참칭하는 수구 정치집단이 거대 양당 체제의 한 축을 독점함으로써 안정적으로 파시스트적 정치를 펼치고, 하시라도 민주주의를 부정할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내란 사태 이후 국민의힘이 보인 태도는, 그들이 군사파시즘의 후계 정당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폭로한다.
셋째, 정치적 이념보다 지역적 이해에 따르는 지역주의 구조다.
내란 사태 초기에 내란에 동조하는 국민의힘이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에 앞서는 불가사의한 현상은, 지역주의가 한국 민주주의의 결정적 장애물임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이처럼 한국의 ‘민주주의호’는 파시스트를 키우는 교육제도, 수구 정치집단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주는 정치지형, 정치이념보다 지역감정을 앞세우는 지역주의라는 3중의 암초에 걸려 좌초될 위험 속에 있다.
파시스트적 경쟁교육은 민주적 존엄교육으로, 수구-보수 과두지배는 보수-진보 경쟁체제로, 지역주의 정치지형은 이념중심 정당 체제로 개혁해야 한다.
윤석열 파면으로 민주주의가 승리했다. 그러나 ‘어떤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는 말인가.
‘광장 민주주의’의 승리가 ‘일상 민주주의’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우리 민주주의가 더욱 확장되고, 심화돼야 한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결국 미완의 민주주의에 근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의 극단적 보수성은 정치 민주화의 결함에, 한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특권은 사회 민주화의 결여에,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는 경제 민주화의 부재에, 권위주의와 폭력성은 문화 민주화의 결함에 근본 원인이 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로 귀착된다.
보수적 정치, 차별적 사회, 불평등한 경제, 권위주의적 문화는, 이제 정치 민주화, 사회 민주화, 경제 민주화, 문화 민주화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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