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2

홍재 정조 이산

홍재 정조 이산 -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군사(君師)라고 자처한 제왕 # 홍재(弘齋) : “군자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조선에서 임금은 제왕인 동시에 한 사람의 유학자였기 때문에, 호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선비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정조는 스스로 다양한 호를 지어 자신의 뜻과 철학을 세상에 드러냈다. 홍재(弘齋),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 등, 정조가 남긴 호는 다른 어떤 선비들의 호보다 독특하고 다채롭다. 정조는 임금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학자에서 찾았던 사람이다. 정조가 가장 먼저 사용한 호는 왕세손 시절 자신이 거처하던 동궁의 연침(燕寢, 침소 혹은 침전)에 이름붙인 ‘홍재(弘齋)’였다. ..

여유당(與猶堂) 정약용(丁若鏞)

여유당(與猶堂) 정약용(丁若鏞) - 남인(南人)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 여유당(與猶堂) : “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여유당(與猶堂)은 다산(茶山)과 함께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대표적인 호. 그가 생전에 저술한 500여 권의 서적을 모두 모아 간행한 전서(全書)의 제목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그의 고향 마을 생가에 오늘날에도 걸려 있는 당호(堂號) 역시 여유당(與猶堂)이다. 여유당이란 호는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남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정약용은 친가와 외가 모두 남인의 명문가였다. 그의 친가 직계 조상들은 8대가 연이어 문신의 꽃이라 하는 옥당(玉堂, 홍문관)에 오를 정도로 대학자를 다수 배출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