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찰을 붙이세요
- 오 봉 렬 -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집사람이 해운대여고 밑 시립도서관 옆에서 '학생체인'이라는 문구점(선물, 문구, 팬시, 악세사리 등)을 운영하고 있을 때 일이다. 나는 제대 후 뒤늦게 다시 공부하느라(한의대 재학 중) 가게가 바쁠 때(아침, 저녁 및 야간)만 잠시 일을 거들어주곤 하였다.
여고생들은 대체로 학년별로 등교와 하교시간이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항시 시간에 쫓긴다는 것이었다. 버스 노선도 적어서 봉고차로 등하교하는 학생들이 많다보니 봉고시간에도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게는 낮에는 한가했지만 등하교시에는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여학생들로 인해 잠시동안 북새통을 이루기 일쑤였다. 문구나 악세서리 등 본인이 쓸 물건은 포장할 필요가 없지만, 친구나 선후배 등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것은 예쁘게 포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바쁜 와중에 포장을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래서 웬만한 것들은 진열된 물건과 같은 것을 여러 개 준비해 두고 미리 포장해두기도 하였다. 또한 학생들은 선물할 것을 전날 야간에 하교시 미리 지정해서 주문하고 다음날 아침에 찾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한 것이 많을 때는 밤늦게까지 포장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밤 10시 경,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여고생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은 북새통 속에서 한 여학생이 옆쪽 벽에 걸린 물건(액자 종류였던 것으로 기억됨)을 가리키면서 포장해 달라고 하였다. 바로 포장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기에, 집사람은 그 여학생의 이름을 묻고 미리 잘라놓은 작은 네모난 종이에 그 학생의 이름을 적은 뒤 스카치테이프를 붙여서 그 여학생에게 주며 말했다.
“학생, 이거 명찰 붙여 놓으세요”
그리곤 다른 학생들의 주문을 받고 물건을 내주고 돈을 받는 등 정신이 없었다. 잠시동안 혼잡한 시간이 흐른 뒤 썰물처럼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마침내 한 명의 학생만이 남았다. 그런데 그 마지막 남은 학생은 아까 벽에 걸린 액자를 주문한 학생이었다.
집사람이 학생에게 물었다.
“아니 학생 왜 아직 안 갔어요?”
그 여학생은 약간 계면쩍은 듯이 대답했다.
“아까 아줌마가 명찰 붙이라고 해서...”
그러고 보니 아뿔싸! 그 여학생의 가슴에는 아까 집사람이 적어준 명찰이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원하는 물건(벽에 걸려 있는)에 붙이라고 써준 명찰을 자기 가슴에 붙이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상상해보시라!
교복을 입은 예쁜 여고생이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투박한 흰 종이에 검은 매직으로 휘갈겨 쓴 명찰을 스카치테이프로 가슴에 붙여 달고 있는 모습을.
“아니 학생, 액자에다 붙이라고 줬더니만...”
집사람과 나, 그리고 그 여학생 모두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그 여학생은 일순간 계면쩍은 듯(또는 창피함, 부끄러움)이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즐거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그 여학생의 맑고 고운 순진함에 마음이 흐뭇해지며,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즐거운 추억으로 재생시켜 주는 그 여학생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가게를 많이 사랑해준 해운대여고 학생들과 여타의 학생들, 그리고 이웃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울러 내가 제대하여 뒤늦게 공부하는 동안 내 학비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고생한 아내에게도 더욱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며, 이 기회를 빌어 사랑의 마음을 전해본다.
2004. 11. 16 - 진료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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