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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석굴암에 대항 옛 신문기사들

道雨 2007. 9. 20. 18:10

석굴암에 대항 옛 신문기사들

 

"석굴암 홍예석은 원래 있었다"

 

석굴암 홍예석의 흔적


성낙주씨 1910년 무렵 사진 공개

 

경주 석굴암 홍예석(虹霓石. 무지갯돌)이 1913년 일제의 보수공사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일제가 고의로 만든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석굴암을 연구해온 성낙주(成樂胄.52) 서울 중계중 국어교사는 이를 입증하는 증거로 1913년 제1차 보수공사 이전에 촬영됐음이 분명한 석굴암 사진을 공개했다.

 

석굴암 본존불이 안치된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측에는 팔각 기둥이 각각 설치돼 있고, 이 두 기둥은 홍예석이라는 아치형 돌로 연결돼 있다.

 

이 홍예석에 대해 지금까지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원래 석굴암에는 없었으나 일제가 마구잡이로 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만들어 넣은 것이니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아왔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어떤 학자는 심지어 "1913년 일제가 보수할 때 본존불 시야를 가리려는 악의에서 이런 짓을 했으며, 그럼에도 1960년대에 우리 손으로 보수를 할 때도 바로 잡지 않고 그대로 두어 오늘에 이르렀다"고까지 했다.

 

성 교사가 법보신문 1월4일자를 통해 공개한 이 사진(가로 8.4 x 12.5㎝)은 초기에 촬영된 석굴암 사진 중 거의 유일하게 갓을 쓰고 도포를 쓴 조선인 남자 모습을 화면에 담고 있으며, 나아가 무엇보다 홍예석이 있었던 흔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특히 크다고 성 교사는 평가했다.

즉, 초기 석굴암 관련 사진 대부분이 본존불 모습을 전면에서 포착한 데 비해 성 교사가 최근 입수한 이 사진은 전실 남쪽 석축 바깥에서 카메라 앵글을 맞추어 촬영됐다.

 

따라서 이 사진에는 정면 기준 오른쪽 돌기둥 위에서 안으로 돌출한 부분인 이른바 '첨차석' 측면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마침 뚫린 지붕 구멍을 통해 햇볕이 스며드는 바람에 첨자석의 구조가 확연히 보이고 있다.

사진에 의하면 첨차석 단면은 양끝이 귀처럼 뾰족하게 솟아있는데 반해 중앙 부분은 홈이 나 있다.

 

성 교사는 이것이야말로 홍예석을 얹었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일제가 일본신사 입구를 지키는 도리의 누키를 모방해 없던 홍예석을 만들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된 실정이었다"면서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석굴암과 동시에 축조된 불국사의 연화교와 칠보교를 연결하는 무지개 다리를 볼 때도 홍예석이 없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김태식 기자 2006-01-04 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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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석굴암 주실 지붕구조 판명 의미

 

 

경주 석굴암은 해발 500여m나 되는 토함산 중턱에 자리한다. 거기에다 멀리 동해 바다를 조망하고 있다.

이런 곳은 해풍(海風)과 골바람은 물론 안개와 눈비, 그로 인한 습기, 이에 더해 동절기 동파의 위협에 상시 노출되기 마련이다. 1962년도 기상자료에 따르면 토함산 일대는 강우 일수가 134일, 강설일수가 40일에다 안개 일수는 123일, 결빙일수는 110일에 달했다.

 

그렇다면 석굴암 건축자들은 이런 지리적 기상 악조건을 어떻게 해결하려 했을까. 지금도 의아스런 대목이 특히 주실의 지붕 처리 방식이다. 더구나 그 지붕이 당시 아시아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순전한 석재를 덮은 초유의 돔 양식이라는 점에서 궁금증은 더욱 높아진다.

 

조사 결과 주실 돔 지붕은 모두 108개가 되는 석재를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108번뇌가 대표하듯 짙은 불교적 색채가 묻어나는 구조인 셈이다.

이런 구조에서 신라 건축가들은 아마 108개나 되는 석재 틈새를 끊임없이 스며들 빗물이나 눈 녹은 물을 차단하려 했을 것이며, 나아가 혹한기에는 실내 온도를 어느 정도는 유지해야 했을 것이다.

 

석굴암 연구가 성낙주 씨가 발굴ㆍ공개한 1912년 석굴암 관련 화보집은 이런 의문을 어느 정도 풀 수 있는 답을 주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석굴암 각 장면을 33장에 수록한 이 사진첩 중 하나가 바로 석굴암 주실 전면을 담고 있는데, 이 사진을 통해 주실 지붕은 비로소 우리에게 가장 명확한 자료로써 그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사진에 의하면 주실 지붕은 맨 위층에 기와지붕이 마치 고깔처럼 덮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아마도 주실로 빗물 등이 침투하는 것을 1차로 차단했을 것이다.

 

한데 이 기와층 아래로는 짙은 토석층이 두터운 층을 형성하다가 그 중간쯤에 또 다른 기와층이 드러나고 있다. 빗물 따위에 대한 2차 방어선이었던 셈이다.

이 2차 기와층 아래로는 다시 두터운 토석층이 이어지고 있다. 이 토석층은 석재 돔과 연결되고 있다. 사진 발굴자인 성씨는 이 2차 토석층과 돔 석재가 맞닿은 부분에도 3차 기와층을 부설한 흔적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어떻든 돔을 구성한 석재 위로는 적어도 2-3m에 이르는 토석층과 기와층이 적어도 각각 2단 이상 번갈아 덮여 있었음이 드러난다.

성씨도 지적하고 있듯이 1912년 무렵 이 토층 상태가 곧바로 통일신라시대 초창기 당시의 구조라고는 곧바로 단정할 수는 없다.

 

석굴암에 대한 새로운 자료라고 해서 그것이 공개될 때마다, 그런 자료를 공개하는 학계나 언론사는 늘상 그 자료가 석굴암의 원형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아무리 새로운 자료가 공개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자료가 담고 있는 그 당시의 모습일 뿐이며, 그것을 확대해서 `원형'이라는 낭설을 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공개된 석굴암 사진은 그것이 담고 있는 정보 대상 시기가 1912년 무렵에 그치기는 하지만 석굴암을 둘러싼 오래된 체증 중 하나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상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연합뉴스/김태식기자   2005-01-08 1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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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전실 수호상은 6개였다"

 

석굴암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겠다는 계획에 대해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가운데 석굴암 전실이 현재와 같은 구조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진이 발견돼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최근 52억원을 들여 석굴암을 보존하기 위해 석굴암 부근에 모형을 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929년 일본인 미술사가인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지은 ‘조선 경주의 미술(朝鮮慶州之美術)’에 수록된 사진은 석굴암 전실에 있는 8부중상(八部衆像·불법을 수호하는 불교 신들의 조각상)이 지금과 같은 8개가 아니라 6개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8부중상이 전실 좌우로 4개씩 세워져있는 것과 달리 이 사진엔 좌우로 3개씩만 있다. 세번째 조각상 옆엔 돌을 직각으로 쌓아놓아 네번째 조각상 2구는 없었다는 것이 명확하다. 사료수집가 이순우씨가 최근 확인한 것.

그동안의 석굴암 사진은 전실 외부에서 찍은 것이어서 네 번째 조각상의 존재 여부가 불명확했다. 그러나 이번 사진은 전실 내부에서 찍은 것이어서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책이 1929년 출간됐지만 사진은 일제가 1913년 석굴암을 보수하기 전의 모습을 담고 있어 1910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카무라는 특히 이 책에서 ‘4번째 조각상 2개는 1913년 보수공사시 조선총독부가 부가했다…이는 추악의 극이며 실로 대담함 추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도 1910년대에 이미 ‘문제의 두 상은 석굴의 부근에서 발굴한 것으로, 무슨 근거로 추가를 감행했는지 궁금하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국내 전문가들은 이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을 보수하면서 문제의 불상 두 개를 전실 입구쪽 좌우의 세 번째 불상 옆에 직각으로 꺾어 연결해 붙였다.

 

1964년 보수공사 때 이것이 잘못됐다고 보고 구부러진 부분을 직선으로펼쳐놓았고 이후 어느 것이 맞는지를 놓고 논란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양측의 견해 모두 8개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 사진을 살펴본 문명대 동국대 교수(불교미술사)는 “꺾였는지 직선인지는 여전히 의문사항이지만 일단 1913년 보수 직전 6개였을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이광표 기자  2002-02-27 18:32 >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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