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음악 관련

우리 가곡 '비목'에 얽힌 이야기들

道雨 2008. 2. 19. 18:10

 

 

                                           비 목

                                                              -  한명희 작시,   장일남 작곡 -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머어언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 1977년, 내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처음 배치 받은 곳이 강원도 화천이다. 나는 그곳에서 약 4년 3개월 정도를 근무하였다.

  당시 우리 부대에서는 화천 지역의 전방 부대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백암산에 관측소를 운용하고 있어서 가끔 백암산 정상을 다녀오곤 하였다. 

 

**  1964년, 중동부 전선의 백암산 비무장지대에서 육군 소위 한명희는 잡초가 우거진 산모퉁이에서 이끼 낀 채 허물어져 있는 돌무덤을 발견하였다. 녹슨 철모가 뒹구는 무덤 머리에는 십자가 모양의 비목(碑木)이 세워져 있었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하는 가곡 <비목>은 이렇게 탄생한, 무명 용사에게 바치는 헌시(獻詩)이다. 

 

***  강원도 화천군에서는  1995년에 비목 공원을 조성하였고, 1996년부터 매년 호국의 달인 6월에 비목문화제를 개최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2008년도에는 비목마라톤도 계획되어 있다.

 

 

 

 

           비목, 그 숨겨진 이야기 

 

   40년 전, 막사 주변의 빈터에 호박이나 야채를 심을 양으로 조금만 삽질을 하면, 여기 저기서 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왔으며, 땔감을 위해서 톱질을 하면 간간히 톱날이 망가지며 파편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순찰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군데군데 썩어빠진 화이버며, 탄띠 조각이며, 녹슬은 철모 등이 나딩굴고 있었다.
  실로 몇개 사단의 하고 많은 젊음이 죽어갔다는 기막힌 전투의 현장을 똑똑히 목도한 셈이었다.

  그후 어느날 나는 그 격전의 능선에서 개머리판은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 왔다. 그러고는 깨끗이 손질하여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가없는 공상을 이어가기도 했다.

  전쟁 당시 M1 소총이 아닌 카빈의 주인공이면 물론 소대장에 계급은 소위렸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산화한 것이다.
  일체가 뜬 구름이요, 일체가 무상이다.
  처음 비목을 발표할 때는 가사의 생경성과, 그 사춘기적 무드의 치기가 부끄러워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었는데, 여기 一無라는 이름은 바로 이때 응결된 심상이었다.

  이렇게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어느날, 초가을의 따스한 석양이 산록의 빠알간 단풍의 물결에 부서지고, 찌르르르 산간의 정적이 고막에 환청을 일으키던 어느 한적한 해질녘, 나는 어느 잡초 우거진 산모퉁이를 돌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며,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더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필경 사람의 손길이 간 듯한 흔적으로보나, 푸르칙칙한 이끼로 세월의 녹이 쌓이고 팻말인 듯 나딩구는 썩은 나무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결코 절로 쌓인 돌이 아니라,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런 육군 소위의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 많던 젊은 장교의 마지막 증언장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제 이야기가 여기쯤 다다르고, 그때 그시절의 비장했던 정감이 이쯤 설명되고 보면, 비목 같은 간단한 노래가사 하나쯤은 절로 엮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감성적 개연성을 십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정이 남달라서도 아니요, 오직 순수하고 티없는 정서의 소유자였다면, 누구나가 그같은 가사 하나쯤은 절로 빚어내고 절로 읊어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 그때 그곳의 숨김없는 정황이었다.
  그후 세월의 밀물은 2년 가까이 정들었던 그 능선, 그 계곡에서 나를 밀어내고, 속절없이 도회적인 세속에 부평초처럼 표류하게 했지만, 나의 뇌리, 나의 정서의 텃밭에는 늘 그곳의 정감, 그곳의 환영이 걷힐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 가곡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쏟던 의분의 시절, 그 때 나는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작곡가 장일남으로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 몇편을 의뢰받았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내 머리속에 스치고간 영상이 다름아닌 그 첩첩산골의 이끼 덮인 돌무덤과 그옆을 지켜섰던 새하얀 산목련이었다.

  나는 이내 화약 냄새가 쓸고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의 이름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따라 순절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사실적인 어휘들을 문맥대로 엮어갔다. 당시의 단편적인 정감들을 내 본연의 감수성으로 꿰어보는 작업이기에 아주 수월하게 엮어갔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되어 쌓였네

  이렇게 해서 비목은 탄생되고 널리 회자되기게 이르렀다.
  오묘한 조화인양 유독 그곳 격전지에 널리 자생하여 고적한 무덤가를 지켜주던, 그 소복한 연인 산목련의 사연은 잊혀진 채, 용사의 무덤을 그려본 비목만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한 셈이며, 지금도 꾸준히 불려지고 있다.

  비목에 얽힌 일화도 한두가지가 아닌데, 가사의 첫 단어어인 "초연"은 화약연기를 뜻하는 초연(硝煙)인데, "초연하다" 즉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오불관언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때는 비목(碑木)이라는 말 자체가 사전에 없는 말이고 해서 패목(牌木)의 잘못일 것이라는 어느 국어학자의 토막글도 있었고, 비목을 노래하던 원로급 소프라노가 "궁노루산"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한 일이 있었다.

  궁노루에 대해서 언급하면, 비무장지대 인근은 그야말로 날짐승, 길짐승의 낙원이다. 한번은 대원들과 함께 순찰길에서 궁노루 즉, 사향노루를 한 마리 잡아왔다. 정말 향기가 대단하여 새끼 염소만한 궁노루 한 마리를 잡았는데 온통 내무반 전체가 향기로 진동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그날부터 홀로 남은 짝인 암놈이 매일 밤을 울어대는 것이었다.

  덩치나 좀 큰 짐승이 울면 또 모르되, 이것은 꼭 발바리 애완용 같은 가녀로운 체구에 목멘 듯 캥캥거리며 그토록 애타게 울어대니, 정말 며칠 밤을 그 잔인했던 살상의 회한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더구나 수정처럼 맑은 산간계곡에 소복한 내 누님 같은 새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면, 그놈도 울고 나도 울고 온 산천이 오열했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이란 가사의 뒤안길에는, 이같은 단장의 비감이 서려 있는 것이다.

  6월이면 반도의 산하는 비목의 물결로 여울질 것이다.
  그러나 우직한 촌놈기질에 휴가나와 명동을 걸어보며 눈물짓던 그 턱없는 순수함을 모르는 영악한 이웃, 숱한 젊음의 희생위에 호사를 누리면서 순전히 자기탓으로 돌려대는 한심스런 이웃 양반, 이들의 입장에서는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시퍼런 비수는커녕 어이없는 우격다짐 말 한마디에도 소신마저 못펴보는 무기력한 인텔리겐차, 말로만 정의, 양심, 법을 되뇌이는 가증스런 말팔이꾼들, 더더욱 그같은 입장에서는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풀벌레 울어예는 외로운 골짜기의 이름없는 비목의 서러움을 모르는 사람, 고향땅 파도소리가 서러워 차라리 산화한 낭군의 무덤가에 외로운 망부석이 된 백목련의 통한을 외면하는 사람, 짙푸른 6월의 산하에 비통이 흐르고 아직도 전장의 폐허속에서 젊음을 불사른 한많은 백골들이 긴밤을 오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 겉으로는 호국영령을 외쳐대면서도 속으로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가련한 사람, 아니 국립묘지의 묘비를 얼싸안고 통곡하는 혈육의 정을 모르는 비정한 사람, 숱한 전장의 고혼들이 지켜낸 착하디 착한 이웃들을 사복처럼 학대하는 모질디 모진 사람, 숱한 젊음의 희생아닌 것이 없는 순연한 청춘들의 부토위에 살면서도 아직껏 호국의 영령앞에 민주요, 정의요, 평화의 깃발 한번 바쳐보지 못한 저주받을 못난 이웃들이여, 제발 그대만은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죽은 놈만 억울하다고 포연에 휩싸여간 젊은 영령들이 진노하기 전에!

 
 
 
 
 
  화천 비목공원 (강원 화천군)
비목공원
위    치 : 강원 화천군 화천읍 동촌1리  
개    요 : 화천은 자기 고장을 소개하는 케치프레이즈로 가곡 "비목(碑木)의 고장을 내세우고 있다.
           군의 북쪽이 휴전선과 맞닿아 있고 곳곳에 전적지가 많이 남아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전적
           관광지는 평화의댐 전적관광지와 파로호 전적 관광지이다.
           평화의댐은 1987년 2월부터 1988년 5월까지 15개월에 걸쳐 축조된 댐으로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에 따라 수공에 대비하기 위해 국민들의 성금으로 쌓은 댐이다. 
           평화의댐은 95년, 96년, 99년 수해 시 홍수조절 기능이 입증되면서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평화의 댐 한 켠에는 비목공원이 조성되어 여행자들의 나들이를 돕고 있다.
           국민적인 가곡 "비목"의 탄생지가 바로 이곳이다.
비목(碑木)시비파로호 전경

사연은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화의댐 북방 14km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한 청년장교는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이끼 낀 무명용사의 돌무덤 하나를 만난다. 녹 슨 철모, 이끼 덮인 돌무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새 하얀 산목련,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깊 은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그는 돌무덤의 주인이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을 거라는 깊은 애상에 잠긴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넋을 기리는 "비목"의 가사는 이렇게 탄생되었고 이 노래는 70년대 중반부터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기 시작했다. 가사를 쓴 초급장교가 바로 한명희씨이다. 주차장 입구에 "비목" 노래비가 서 있어 방문자들은 누구나 한번씩 그 앞에 서서 가사를 되새겨 본다. 현재 비목공원에는 기념탑 외에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들 이 십여 개 서 있어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비극의 아픔을 되새기게 해준다. 화천군에서는 매 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이곳 비목공원과 화천읍내 강변에 들어서있는 붕어섬 등에서 "비목 문화제"를 개최한다. 진중가요, 시낭송 등으로 짜여진 추모제, 비목깎기 대회, 주먹밥 먹기 대회, 병영체험, 군악퍼레이드 등이 나흘간 펼쳐진다. 평화의 댐에서 양구 땅으로 넘어가면 제 4땅굴과 을지전망대 등의 안보교육장이 기다리고 있다. 평화의 댐을 돌아본 후 파로호 전적관광지도 가 볼만 하다. 파로호는 1944년 화천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로 산 속의 바다라고도 불린다. 호수에는 쏘가리, 잉어 등 70여종의 민물고기 가 서식한다. 한국전쟁 당시 화천댐 사수를 위해 중공군 3개 사단을 수장시킨 처절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 다. 훗날 이곳을 방문했던 고 이승만 대통령은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에서 "파로호" 라는 친필을 썼다. 그 이후부터 호수 이름이 파로호라고 지어졌다. 현재 전망대, 안보관 등 이 들어서 있고 월하 리태극의 시조비도 세워져 있다.
월하 리태극 시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