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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 공화국, 코리아

道雨 2010. 6. 25. 16:46

 

 

 

 

금속활자 공화국, 코리아



 
인류 역사 문명의 창 금속활자

중세유럽, 금속활자 발명가로 알려진 구텐베르크는 일찍부터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존경을 받고 있고 이보다 78년 빠른 고려의 금속활자 발명은 최근 IT·정보 산업의 강국이미지와 함께 지난 20세기말부터 전 세계인들에게 의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우리가 알고 있는 금속활자 인쇄술에 부여된 문명사적 가치와 세계 최고란 평가는 구텐베르크의 후광에 기댄바가 크다. 즉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근대화다.” 라는 논리로 종교혁명이나 시민혁명, 과학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선조들의 금속활자에 대한 가치를 설명하지만, 서구의 논리에 의존하다 보니 “개발에 편자처럼” 어색하기만 하고 궁색하기만 하다. 우리 인쇄술에 대한 자생적自生的 연구와 접근이 부족한 탓이다.

“금속활자 인쇄술”이라는 전통문화(과학기술)의 분야는 소위 “책을 인쇄하는 수단이나 방법” 이외에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분야이다. 책이 지식과 정보를 담는 그릇임에도 책에 담긴 지식과 정보가 동시대同時代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었는가에 대한 접근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활자를 주조하고 조판하는 기술이나, 활자별 간본刊本이나 활자의 서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 당대인에게 책의 효용성에 대한 문제는 학제간學際間이나 통섭統攝의 문화사적 접근이 필요한 분야이다. 이를 통해 우리 활자 인쇄술이 한국사와 동아시아사, 세계사에 이르는 영향관계를 명료하게 논리화 시킬 수 있다면 그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이기도 하다. 이도오伊東·야마다山田 등의 『과학기술사사전』에서 세계 과학기술사 속에 세종시대의 창조적 성과를 설명하며 1,400년에서 1,450년까지 주요업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29건, 중국이 5건, 일본이 0건, 이외 동아시아 28건으로 정리한 사실이 있다. 이중 한국의 29건 가운데 그 시기에 주조된 금속활자인 계미자(1403), 경자자(1420) 갑인자(1434) 등이 포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창의를 중시하는 시대에 자못 의미 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금속활자의 발명

최초의 주자인쇄 기록은 고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보인다.

“인조仁祖(1123~46)때... 명하여 고금古今의 동이同異한 글을 모아 헤아려 절충해서 책 50권을 이루게 하였다. 그것을 명하여 『상정예문詳定禮文』이라 하고 세상에 유행케 하였다... 여러 해를 지나오면서 간탈자결簡脫字缺하여 상고하여 살피기가 어려웠는데... 천도遷都할 때에 예관이 허둥지둥 경황이 없어 내래賚來하지 못하였는데... 마침내 주자鑄字로써 28본을 인성印成하여 여러 관아에 나누어 주어 보관하게 하니...”

라는 기록을 통해 금속활자의 사용이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최초의 주자인쇄는 『상정예문』이 처음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간인刊印이 고종 21년(1234)부터 28년(1241) 사이이니 이 시기에 활자 인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고려사』의 서적점書籍店과 관련해서 “공양왕恭讓王 4년(1392)에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여 주자鑄字로 서적書籍을 간인하는 일을 담당하는 영승令丞을 두니...”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서적점은 문종文宗 때 설치되어 고려 말에 이르러 서적원으로 바뀌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명칭과 직제가 변했지만 주요 임무는 주자로 서적을 간행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상정예문』이전에도 주자인쇄가 존재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케 하는 것이다. 활자로 책이 인쇄되기 이전에 활자의 존재나 이를 관장하는 기구나 조직 등이 존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중국의 필승畢昇이 교니활자를 발명한 비슷한 시기에 고려에서도 실제 주자인쇄가 이루어졌는지는 현재로선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활자 주조관청의 설치, 주자소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활자 인쇄술을 계승·발전시켜 “금속활자 공화국”이라 부를 정도로 다양한 활자를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서적을 출판하거나 활자를 주조하는 관청도 고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태종(1403)은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중국의 『시경』,『서경』등을 자본으로 동활자 수십만 자를 주조하고 이를 조선 최초의 활자인 ‘계미자癸未字’라 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권근權近의 발跋을 보면,

“... 태종太宗 3년(1403) 봄 2월에 전하께서 좌우 신하에게 이르기를 ‘무릇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널리 전적典籍을 보아야 한다. 중국의 서적이 드물게 이르고, 판각본板刻本은 쉽게 훼손 되는데다가 또한 천하의 많은 서적을 다 출간하기가 어려우므로, 내가 동활자銅活字를 만들어 서적을 얻는 대로 필히 새겨 인쇄하여 널리 전하여 진실로 무궁한 이로움으로 삼고자 한다. 이에 내탕內帑의 돈을 다 내놓고서... 왕교王敎의 전승과 성수聖壽의 영원함도 이와 아울러 오랠수록 더욱 견고할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왕권의 안정과 통치를 위해 제일 먼저 서책의 수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활자주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태종은 이를 위해 고려의 서적원을 기반으로 주자소를 설치한다. 조선시대 주자소에서 주조되어 사용된 크고 작은 활자는 모두 40여종이 넘는다. 20~30년을 주기로 임금이 즉위하면 거의 예외 없이 새로운 활자가 주조되었다. 이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자신의 통치철학이 담긴 서적의 인쇄가 필요하여 활자를 주조한 까닭이다. 이외에도 국가의 대소사를 기념하기 위해 주자소를 비롯한 여러 관청에서 많은 활자를 주조하여 책을 인쇄하는데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활자 인쇄술과 서적 인쇄가 가장 발전한 시기는 14세기 세종과 17·8세기 영·정조 시대를 전후한 시기이다. 이때는 최고의 과학기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로 약 20여종의 활자가 집중적으로 주조되어 사용되었다.


금속활자 인쇄술의 꽃, 갑인자

갑인자는 1434년(세종16)에 경자자(1420)가 너무 가늘고 작아 보기가 어려워 다시 만든 활자로 위부인자衛婦人字라 하기도 한다. 김빈金의 발에 의하면,

 “...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천李에게 이르길, 경이 일찍이 감독하여 주자한 인본이 참으로 정교하고 좋았으나, 다만 아쉬운 것은 자체字體가 가늘고 촘촘하여 열람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니 대자본大字本으로 다시 주조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 경연經筵에 소장한 ≪효순사진孝順事實≫·≪위선암즐爲善陰≫·≪논어論語≫등의 책을 자본으로 삼고, 부족한 것은 진양대군晉陽大君 신臣 유가 그것을 써서 그 달(7월) 12일에 일을 시작해서 두 달 만에 주자한바가 20여 만자에 이르렀고, 9월 초 9일을 지나 비로소 인서印書를 시작하였는데 하루에 40여 지를 인쇄 할 수 있었으며...”

세종의 명에 의해 주조된 갑인자는 글자체가 부드럽고 아름다워 1434년 처음 활자가 주조된 후 조선 후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개주改鑄와 보주補鑄(1580년:庚辰, 1618년:戊午, 1668년:戊申, 1772년:壬辰, 1777년:丁酉)가 이루어졌다. 활자 주조가 완성된 해의 간지를 활자명칭으로 하기도 하지만 재주·삼주·사주 ·오주·육주 등의 갑인자 계열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초주갑인자는 보통 1434년에 주조된 갑인자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어버렸다. 갑인자는 금속활자 인쇄술이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활자로 활자주조에 참여한 인물들이 당대 최고의 과학자나 기술자였던 만큼 활자의 모양도 이전 활자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과학적이다. 조판도 밀랍이 아닌 나무 조각이나 종이 등으로 빈틈을 메우는 정교한 조립 형태로 하루 40여 지를 인출할 수 있었다고 하니, 고려 금속활자 인쇄술이 활자주조와 조판인출에 있어 계미자, 경자자를 거쳐 갑인자에 이르러 과학기술 발전과 더불어 최고로 발전하는 금자탑을 쌓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사적 시각에서 서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스스로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주어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바로 그러한 서적을 가장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금속활자 인쇄 이전에도 서적은 필사나 목판인쇄의 방법으로 존재했지만, 그것은 지배계층이나 종교인 등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전유물이었다. 금속활자 인쇄로 서적을 인쇄한 이후 서적은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 되었다.   


 글·사진 | 이승철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