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초라한 견찰(犬察)

道雨 2011. 5. 27. 13:40

 

 

 

               초라한 견찰(犬察)
 
지난 1995년 12월18일치 <한겨레> 기자 칼럼에 특이한 발언이 실렸다.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

 

누가, 무슨 뜻으로 한 얘기일까?

발언의 당사자는 검사.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그해 11월30일 서울지검에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가 갑작스럽게 설치되자, 검찰 내부의 자조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는, 이른바 ‘견찰(犬察)론’이다.

 

검찰은 자신을 스스로 비하할 만도 했다.

이미 12·12에 대해선 기소유예를, 5·18에 대해선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마당에,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과거를 부정하는 수사를 하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견찰은 국민의 박수를 받았다. 전두환·노태우 쿠데타 세력을 사법적으로 단죄해 ‘거악’을 척결하는 공을 세웠다.

97년 4월 대법원에서 반란죄, 내란죄, 뇌물죄 등이 적용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5억원이 확정됐다.

검찰 수사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지금도 뻔뻔스럽게 쿠데타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설치고 다녔을 테니, 검찰은 삽살개나 진돗개 노릇은 톡톡히 한 셈이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견찰이라는 단어가 요즘 불쑥불쑥 떠오른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뒤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종익 전 케이비(KB)한마음 대표,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넣었다가 1심에서 2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대학강사 박정수씨 등을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데 이번에 떠오른 개는 행색이 영 초라하다. 삽살개나 진돗개 근처에도 못 미친다. 위엄도 용맹함도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틀어쥔 대한민국 검찰이 몰두한 상대가 거악은커녕 힘없는 민간인들인 탓이다.

 

검찰은 주인 입맛에 맞지 않는 존재를 물어뜯는 데만 열을 올렸다. 자신의 품격은 뒷전에 팽개쳤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종익 전 대표는 총리실 불법사찰의 희생자다. 1년여 동안 불법사찰과 수사를 당하고 갖은 압력에 시달리다 멀쩡한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났다. 정신적 충격과 불안감으로 일본 도피 생활까지 했다.

 

그 피해를 보상받아도 시원찮을 마당에 이번엔 회삿돈 875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법정에 서야 한다.

김 전 대표가 실제 횡령을 했는지는 법원이 판단하겠지만, 검찰은 그를 기소하기 위해 그야말로 이 잡듯 수사를 했다. 케이비한마음의 장부를 모두 뒤진 것은 물론이고, 돈이 쓰인 곳을 확인하기 위해 김 전 대표한테서 경조사비를 받은 사람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소명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수사의 출발점이 된, “김 전 대표의 비자금이 참여정부 실세에게 흘러갔다”는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의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김 전 대표를 뒤지듯 불법사찰 행위자들을 조사했다면 사찰의 몸통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박정수씨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그를 처벌하기 위해 검찰은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요란을 떨었다.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당하는 망신을 샀고, 그래도 기어이 징역 10월을 구형했다.

정권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애시당초 논란이 되지 않았을 사안이다. 그러다 결국은 국제적 조롱까지 받았으니, 아무리 충성스럽다고 주인이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영국의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의 팬사이트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 쥐에게 자유를!’(Free The Korean Rat!)이라는 제목으로 박씨 구명운동을 벌이며 창작·표현의 자유를 무리하게 옥죄는 검찰을 비웃었다. 이런 수사에 박수를 치는 국민은 없다.


스스로 초라해지고 비웃음을 사는 검찰을 지켜보는 건 씁쓸하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라도 제대로 거악을 물어뜯는 검찰, 그래서 박수도 좀 받고 그나마 품격을 지키는 검찰을 보고 싶다.

 

<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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