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의문사 1호’ 최종길 서울대 교수

道雨 2011. 11. 1. 12:35

 

 

 

 유신 반대시위 제자들 보듬다

           … 간첩으로 몰린 ‘교수의 죽음’

 

 

김정남의 ‘증언, 박정희 시대’ ② ‘

 

의문사 1호’ 최종길 서울대 교수 <상>

» 1973년 10월16일 중앙정보부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숨진 최종길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의 죽음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포악성을 예고하는 ‘의문사 1호 사건’이었다. 사진은 70년부터 2년간 연수했던 하버드 옌칭연구소 시절 교정에서 찍은 것으로 ‘마지막 모습’이 됐다.

 

제자사랑이 정권 저항으로

독일 유학뒤 서울대 교수
경찰의 학생 불법연행 맞서
“정권 폭거에 항의해야” 주장

 

73년 10월 중정에선 무슨일이

유럽거점 간첩단 54명 발표
“최종길 교수, 자백뒤 투신”
부검의 입막고 사인 은폐시켜

 

끝내 밝히지 못한 의문사

사제단 1년뒤 “고문치사”
진상규명·중정 해체 요구에도
긴급조치 서슬에 진실 묻혀

 

 

 

1973년 10월25일 김치열 중앙정보부 차장은 최종길 서울 법대 교수 등 동서유럽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당시 신문에서도 1면에 대서특필했다. “간첩단 54명을 적발, 이 중 3명을 구속 송치하고 17명을 불구속 송치했으며, 미체포 3명을 제외한 나머지 32명을 불문에 부쳤다. 이들은 공무원, 교환교수 등으로 유럽에 체재 중 북한 대남공작원에 포섭되어 직분과 전문분야별로 정부 주요기관을 비롯해 학원과 주요 기업체에 침투,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연합전선을 형성하려 했다. 이들 중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는 중앙정보부에서 구속 수사를 받던 중 간첩임을 자백하고 범행사실을 털어놓은 후 변소 창문으로 투신자살하였으며, 최 교수와 최근의 학원사태와는 관련이 없다.”



■ 간첩 없는 간첩단 사건

거창하게 “간첩단 54명 적발”이라고 했지만, 구속 송치된 것은 3명뿐이었고, 그나마 간첩죄가 아니라 억지로 씌워진 반공법 위반이 고작이었다. ‘간첩 없는 간첩단’ 사건이 급조된 것이었다. 최종길 교수의 죽음 은폐조작의 성격이 더 짙은 발표였다. 거기에다 굳이 최종길 교수와 최근의 학원사태와는 관련이 없다는 사족을 단 점이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다.

최종길은 해방 뒤 인천중학교(현 제물포고)에서 ‘유한흥국’(流汗興國)이라는 교육철학과 “학식은 사회의 등대요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가르침으로 유명한, 인천이 낳은 당대의 교육자 길영희 교장의 지도와 사랑 속에서 젊음의 꿈을 키웠다. 그는 1955년 서울 법대를 거쳐 대학원을 마친 뒤, 57년 낙후돼 있는 한국 법학계의 현실을 통감하면서 우리 법학을 하루빨리 선진 법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스위스 취리히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961년 그는 독일 쾰른대학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독일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해 모교인 서울 법대 교수가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학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제자들을 올바르게 교육하는 일에 전념하고자 했다. 그는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60여편의 연구논문을 썼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상황은 그가 편안하게 학자로서 포부를 펼치도록 가만두지 않았다. 대학 강의실에는 프락치들이 들어와 교수와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했고, 경찰을 비롯한 기관원들은 학교 안에까지 들어와 활보하면서 학생들을 마구 때리고 끌고 갔다. 그는 67년부터 도서관장과 학생과장 등의 보직을 맡으면서 유신 전후 한국 대학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그는 시위하는 학생들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고, 중앙정보부로 끌려가는 제자를 보고서는 “거기 가면 성해서 나오지 못한다는데…” 하면서 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농성할 때는 올라가 학생들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그는 교권의 숭배자였고, 그의 대학 사랑은 가히 신앙 수준이었다. 그에게 학원은 성전이었다.

그는 특히 학생 징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분명하게 소신을 밝혔다. 1973년 10월4일의 서울 법대 반유신 시위와 관련해서 열린 긴급교수회의에서 최 교수는 ‘학생들의 행동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과 연행 사태에 대해서는 “우리는 결코 스승으로서 모른체할 수 없다. 총장을 통해 대통령에게 항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최 교수의 죽음이 최근의 학원사태와 관련이 없다는 발표와는 달리, 학원사태와 관련해서 죽었다는 의문을 증폭시켰고, 뒤이어 고문치사설, 더 구체적으로는 고문 과정에서 기계가 오작동하여 심장파열로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최 교수의 죽음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의문사 1호’로 기록된다.

» 1974년 12월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주관한 ‘인권 희생자 추모미사’에서 ‘최종길 교수의 고문치사 사건’을 최초로 폭로한 사실을 전한 당시 <경향신문> 기사.

■ 그는 왜 죽어야 했나

최 교수의 의문의 죽음은 유신정권의 포악성을 알리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보다 두달 앞선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고, 10월2일부터는 유신 이후 최초로 유신 반대 투쟁이 학원가를 중심으로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 이듬해의 ‘긴급조치 1, 4호 사태’로 발전하는 것이다. 최 교수의 죽음은 이 유신 반대 투쟁의 예봉을 꺾기 위해 유신권력이 일련의 공작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부검은 사망진단서나 시체검안서도 없이 이루어졌으며 중앙정보부는 부검의를 궁정동 안가로 불러 보안을 당부하는 형식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증거인멸을 위해 부검감정서 원본의 반출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최 교수의 의문사가 이후 일어나는 일련의 의문사와 다른 점은 그 주검이 화장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의문사 주검을 서둘러 화장해서 증거까지 인멸하는 관행이 아직 정착되기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최 교수는 결코 간첩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민법,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상과 연구의 핵심은 사유재산제도를 창달하기 위하여 그 기초를 탐구하는 물권법이었다. 더욱이 소유권 이론에서 그 극한적인 영역인 물권적 기대권까지 보호하고자 주장하였다. 1972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최 교수와 만났던 에드워드 베이커 교수는 “그는 차라리 우익적인 인사였다”고 했다. 변호사 강신옥은 “최 교수의 죽음은 자신의 양심뿐만 아니라 타인의 양심까지 지키려 했던 한 지식인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는 차다예프의 말을 인용해 최 교수야말로 “나라를 사랑하는 데 눈을 뜨고 사랑하고, 입을 열고 사랑하고, 귀를 열고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 사제단 ‘고문치사’를 폭로하다

“최종길 교수는 고문치사되었다. 최 교수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고문치사되었다. 많은 사람의 증언과 해외언론의 보도가 이를 밑받침하고 있다. 이렇게 죽어간 사람이 최종길 교수 한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다. 인권유린의 수부(首府) 중앙정보부 등은 마땅히 해체되어야 하며, 인권유린을 인정하는 모든 법적, 제도적 장치는 철폐되어야 한다.”

이 글은 1974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일을 맞아 명동성당에서 열린 ‘인권회복을 위해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회’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발표한 ‘우리의 인권 주장’이란 제목의 성명 제2항 전문이다. 이것이 73년 10월19일 최 교수 사망 이후 국내에서 최초의, 공개적인 의문 제기요, 진상규명 요구였다. 이 성명을 듣는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고문치사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가 대단했던 중앙정보부를 해체하라는 요구는 당시로서는 언감생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73년 10월 불의와 독재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분노가 학원에서 폭발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당신의 제자들인 학생들을 연행, 구속하였습니다. 어찌 그뿐이었습니까.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몸서리치는 폭행을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했습니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들도 데려다가 똑같이 폭행을 자행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당신께서는 교수회의에서 정보부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할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이 일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일이 될 줄은 당신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당신의 자살은 날조된 것입니다. 당신이 고문치사 당하셨다는 소문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당신이 전기고문에 의한 심장파열로 돌아가셨다는 말도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 이제사 우리는 다 같이 모여 통곡으로 당신을 추모합니다.”

이 글은 74년 12월18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최종길 교수와 떠난 모든 형제들을 위한 추모미사’에서 역시 사제단이 최 교수에게 바친 추도사의 일부분이다. 감히 최 교수를 위한 추모미사를 계획적으로 명동성당에서 연 것이다. 이날의 미사는 신현봉 신부를 비롯한 사제단의 공동집전으로 진행되었다. 강론을 맡은 문정현 신부는 “최종길 교수는 고문기계의 오작동으로 고문치사되었다. 최종길 교수를 고문치사케 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중앙정보부는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오태순 신부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추모미사에는 그동안 철저하게 외부접촉을 제한받았던 최 교수의 부인 백경자씨도 아들 광준과 딸 희정을 데리고 명동거리를 배회하다가 성당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백씨는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 “남편은 숨진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입에 오르내릴 수 없는 누명을 쓰고 갔습니다. 하느님만이 당신의 죽음을 아실 것이며, 저는 예수님 앞에서 그 죽음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절규했다. 그날 부인을 기도회에 나오도록 연락한 것은 신학교 출신의 박기용(고전고대문헌연구소장)씨였다.

12월10일의 사제단 성명, 18일의 문정현 신부 강론 원고와 추도사의 초안을 썼던 나는 벅찬 감동과 흥분, 그리고 두려움을 안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는 사제단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모험이요 용기였다.

이에 앞서 10월24일 함세웅 신부는 명동성당 인권회복 미사 때, 제의방에서 제임스 시노트 신부로부터 10월9일치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제롬 코언 교수(당시 하버드대)의 글 ‘한국의 우울한 1주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최 교수가 1년 전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치사되었다는 의혹이 그 글에는 담겨 있었다. 사제단은 이를 계기로 최 교수 고문치사 사건을 공개적으로 거론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최 교수 사건을 추적하여 12월10일에는 성명으로, 18일에는 추모미사를 봉헌하기에 이른 것이다.

1975년 3월1일에는 한국기독교교수협의회(회장 안병무)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최 교수의 사인을 당당히 밝히라고 또 한차례 요구했지만,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아래서 진상규명 노력은 더 확대되지 못했다. 그리고 박정희의 사후 80년 ‘서울의 봄’ 때 서울 법대생들에 의한 진상규명 노력이 잠깐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만약 최 교수 사건을 두고 국민들이 떨쳐 일어나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다면, 그 이후 이땅에서 그렇게도 많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온 권력기관에 의한 의문사를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나치 치하에서 독일 국민들의 경험을 다시 한번 우리가 반복한 꼴이다. 처음에 독일 국민들도 나치에 반대하던 신부가 끌려가고, 목사가 끌려가고, 그리고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이 끌려가 처형당해도 그것이 단지 남의 일이라고 방관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내 남편, 내 아들, 내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던 것이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