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 위한 ‘애국반상회’라니
반상회는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아 있는 ‘식민의 유산’이자 ‘유신의 잔재’다.
일제가 전시체제 아래서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것이 이른바 ‘애국반상회’다. 박정희 정권은 5·16 쿠데타 이후 이 반상회를 되살렸고, 유신시대인 1976년 5월부터 매월 25일을 ‘정례 반상회의 날’로 지정해, 온 국민이 의무적으로 참가하도록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반상회의 성격이 주민들 간의 친목 도모나 공동 관심사 논의의 장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런 관료주의적 행사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한술 더 떠서 반상회를 아예 정부 정책의 홍보 마당으로 삼겠다고 나섰다.
교육부가 “25일 열리는 반상회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홍보해 달라”는 공문을 행정자치부에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날로 높아지자, 반상회까지 동원해 여론몰이에 나선 것이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제와 유신의 추억 되살리기’가, 드디어 ‘애국반상회’ 부활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독재정권의 미화가 출생 배경인 반상회가, 바로 그 시대를 미화하려는 역사 교과서 만들기 홍보를 위해 활용되고 있는 것도 참으로 비극적이다.
정부의 방침은 반상회를 주민 친목은커녕 오히려 싸움의 장으로 만드는 철없는 행동이기도 하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으로 이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반목과 대립의 늪에 빠져 있는지는 정부가 더 잘 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 교과서 문제를 반상회 메뉴에 올리는 것은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같다. 주민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면서 자칫 동네 이웃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아무리 박근혜 대통령 비위 맞추기에 혈안이 돼 있는 공무원들이라고 하지만, 국민끼리 멱살잡이를 시키겠다는 작정을 하지 않고는 내놓을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이 23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정화에 반대해 집필 거부 선언을 한 서울대·고려대·서강대·이화여대 교수들 중 지금까지 역사 교과서 집필에 한 번이라도 참여한 분이 없다”고 말한 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검인정 교과서를 펼쳐 필진 명단만 살펴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안인데도 엉뚱하게 사실 왜곡을 한 것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계속 높아지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대학가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교수들의 집필 거부 선언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으로서는 어떻게든 이들 교수들을 폄하하고 집필 거부 선언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로 세상을 속이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한쪽으로는 일제와 유신 시대의 유산까지 들고나오고, 또 다른 한쪽으로는 거짓말까지 일삼는 이 정부의 모습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 2015. 10. 26 한겨레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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