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글

사소한 분노

道雨 2015. 11. 10. 12:05

 

 

 

사소한 분노

 

 

 

4인제 족구 시합을 하는데 줄기차게 한쪽 방향으로만 공격이 이어진다. 운동이 젬병인 김 대리가 위치한 곳이다. 공격측에서 볼 때 김 대리는 ‘구멍’이다. 그곳을 집중 공략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 하지만 구멍의 당사자인 김 대리에게 그 시간은 악몽이다.

 

요즘 우리가 사는 곳에서 두드러진 풍경이 그와 닮았다. 일리있는 비판의 탈을 쓴 비난과 분노가 ‘구멍’에 해당되는 이들에게 집중된다. 약한 고리가 있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사정을 두지 않는다. 억울하게 자식 잃은 부모의 고통을 조롱하고, 몰카에 찍힌 피해 여성의 행실을 신체검사 하듯 까발린다. 누군가의 사과에 대해 빠르면 진정성이 없다고, 느리면 양심이 없다고 몰아친다. 식인 물고기처럼 살점을 발라낼 듯 공격한다.

 

권력자의 결정적 허물엔 눈을 감고, 연예인들의 실수나 규칙 위반 따위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결사적으로 참견한다. 사소한 문제를 방관하면 제대로 된 세상이 될 수 없어서 그렇다는 나름의 이유, 말은 좋다. 하지만 그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은 외면한 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꼭 50년 전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고백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만 화풀이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혁명시인 김수영의 고백이어서 무게가 남다르지만, 시인의 자책과 요즘의 사소한 분노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성찰이 있느냐 없느냐다.

 

요즘엔 누가 걸렸다 생각되면, 축적된 지식도 자기 위치도 식인 물고기식 비난을 위해서 총동원한다는 느낌이다. 내 속의 찌꺼기 감정을 배설하기 위해서 돌진하는 특공대 같다.

 

지나친 공격성은 만성적 좌절에 대한 리액션일 때가 많다. 만성적 좌절이 아예 국민정서로 굳어진 것 같은 시절이니, 공격성의 범람이 의외는 아니다.

문제는 지나친 공격성의 목표가 애먼 ‘구멍’으로만 향한다는 데 있다. 뺨을 때린 이가 권력자일 경우 거기에 정면대응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다른 데 가서 적의를 드러낸다. 내가 맞을 때 가만히 있었던 사람, 위로가 어설펐던 사람이 과녁이 된다.

 

왜 우리 사회는 유독 연예인에게만 엄격하냐는 속설의 정답은 공포의 유무다.

우범지역에서는 차량접촉사고가 나도 시비가 붙지 않는다. 신변에 위협을 느껴서다.

자칭 고소왕이라는 어떤 변호사의 파렴치함에 진저리쳐도, 그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혹시 모를 귀찮은 후환 때문이다.

 

상습적인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는 맞을 때의 지옥 같은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피해자가 되는 공포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으로 가해자의 위치를 선택한다. 그러려면 ‘구멍’에 해당하는 이들을 귀신처럼 찾아내는 감각이 필요하다.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 게 다 잘못된 건 아닐 것이다. 꼭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구멍’에 해당되는 어떤 이를 죽일 듯 물어뜯는 일을 정의로운 분노로 포장하는 일은 비겁하다. 자기 공포를 감추기 위한 졸렬한 짓이다. 혹시 내 분노나 비난이 그런 종류가 아닐까 한번만 멈칫해도 식인 물고기 같은 비난의 광풍은 잦아든다. 한번도 멈칫하지 않고 그냥 내달리면, 단두대를 고안한 이의 운명처럼 결국 내가 똑같이 물어뜯긴다.

 

 

시인 김수영은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의 행위를 옹졸한 반항이라고 표현했다.

그러고 나서 물었다.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적으냐 / 정말 얼만큼 적으냐’.

 

 

우린 지금 티끌보다 작아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사람인데.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