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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 상품권을 임금으로 준 KBS. 열심히 일한 당신 상품권으로 받아라?

道雨 2018. 1. 15. 15:38




협찬 상품권을 임금으로 준 KBS




구인광고에도 버젓이 상품권 지급 명시한 공영방송 KBS의 이상한 관행…
판넬 광고로 받은 상품권 비정규직에게 급여로 지급



KBS 전국노래자랑 누리집/ KBS 불후의 명곡 누리집/ KBS 생존의 법칙 누리집/ KBS 연예가중계 누리집/ KBS 더유닛 누리집/ KBS 해피투게더 누리집




2015년 KBS 구성작가협의회 누리집에는 KBS 간판 예능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연예가중계>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 광고가 올라왔다. 제작사는 ‘KBS 본사’, 근무 형태는 ‘주5일 상근’이었다. 해야 하는 일은 ‘VCR 리서치’였는데, 놀랍게도 ‘페이’ 기준이 ‘상품권 지급’이었다(아래 사진 참조).



구인광고에 버젓이 상품권 지급 명시


KBS는 본사가 제작하는 프로그램 구인 광고에 버젓이 ’상품권 페이’ 지급을 적시했다. 오픈채팅방 ‘방송계갑질119’ 화면 갈무리




KBS 프로그램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 그때 상황을 잘 아는 한 예능 작가는 “KBS는 신입 작가를 ‘자료 조사원’이나 ‘지원 작가’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데, 실제 하는 일은 타 방송사의 막내작가 업무이다. <연예가중계> VCR 리서치는 기존 코너 말고 기획 코너를 준비하며, 거기에 필요한 자료 조사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KBS도 버젓이 ‘2~3년차 작가님들 중 가운데 쉬고 있는 분’의 지원을 요구했다.


이는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2016년 KBS 본사가 제작하는 <아침마당>도 3개월 이상 일할 구성작가를 ‘아르바이트’로 구하며, 고료를 “회사 내규에 따라 백화점 상품권으로 매주 10만원 지급”이라고 고지했다. 회사 내규로 임금을 상품권으로 지급한다는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고지한 것이다.


<한겨레21>이 제1195호 표지이야기(‘열심히 일한 당신 상품권으로 받아라’)를 통해 방송계의 불법 관행인 ‘상품권 페이’ 문제를 폭로한 뒤, 기사의 주요 사례로 등장한 SBS뿐 아니라 KBS 등 공영방송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와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시작한 KBS 예능프로그램에서 작가로 일했던 A는 “구인을 할 때부터 고료를 문상(문화상품권)으로 준다고 했다. KBS에서 막내 작가를 구하며 (임금을) 문상으로 주는 게 워낙 흔한 일이어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상을 주기 위해 막내 작가 밑에 아예 인턴 작가를 뒀던 KBS 프로그램도 있었다”고 말했다.


KBS <연예가중계>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했던 B의 증언도 비슷하다. 그는 “아나운서 의상을 주로 담당하며 임금을 상품권으로 받았다. 많을 때는 주당 20만원, 적을 때는 10만원을 상품권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만 그렇게 받았거나 그 프로그램만 그랬으면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KBS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스타일리스트들이 상품권으로 임금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겨레21> 보도를 본 뒤에야 “2~3개월 뒤에 정산을 하고, 상품권을 바꾸는 수수료를 내가 감당했던 일이 억울한 일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 밖에 방송계 비정규직들이 모인 ‘방송계갑질119’ 오픈채팅방에는, KBS 프로그램인 <불후의 명곡> <해피투게더>, 파일럿으로 제작됐던 <생존의 법칙> 등에서 일했던 방송노동자들이 “페이를 상품권으로 받았”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상품권으로 받은 금액은 단기 아르바이트는 주당 10만~30만원, 한 달 120만원까지 다양했다.


그 많은 상품권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와 관련해 방송사의 고위 관계자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품권 협찬은 보통 방송 맨 뒷부분에 판넬(패널) 광고 형태로 나가는 업체들이 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고 참여한 분들에게 사례’로 나가야 하지만, 실제 운용은 다르게 되고 있다.”

지급된 상품권은 한 프로그램이 끝날 때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신 분께는 ○○○○에서 백화점 상품권을 드립니다”라는 코멘트에서 언급된 그 상품권이라는 얘기다. 이 상품권의 경우 광고주가 방송사에 일종의 ‘변형 광고’를 하며 ‘현물 협찬’ 형태로 보내온 것으로, 당연히 방송사가 직접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다.


‘판넬 광고’ 혹은 ‘대판’이라고 하는 이런 협찬 고지는 방송통신위원회 규칙 제4호 ‘협찬 고지에 관한 규칙’에 따른 것이다. ‘방송 제작에 관여하지 않는 자로부터 방송프로그램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필요한 경비·물품·용역·인력 또는 장소 등을 제공’받았을 때, ‘프로그램 종료와 함께 그 협찬주의 명칭 또는 상호 등을 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 규칙에 따라 방송사는 ‘방송프로그램의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필요한 경비·물품·용역·인력 또는 장소’를 협찬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는데, 이를 현물이 아닌 ‘상품권’으로 받는다.



KBS PD “구성작가는 노동자 아냐”


필요한 제작 경비의 일부를 협찬받는 것이지만 이는 변형된 형태의 ‘광고 영업’이다. 한 방송업계 관계자는 “협찬이지만 사실상 광고다. 지상파 방송의 경우 아침 방송이나 전국을 도는 프로그램에 이런 광고들이 많다. 광고주 입장에서 이런 식의 협찬은 가성비가 좋다”고 말했다.

직접 광고를 제작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지만, 판넬은 따로 광고를 만들지 않아도 되고, 업체 이름이 음성으로 나가 비용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시청률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판넬 광고는 50만원에서 많게는 500만원 이상의 금액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프로그램이 서너 개의 판넬 광고를 유치하면 매회 상당한 액수의 상품권이 협찬되는 셈이다.


현행 방송법상 KBS는 광고 영업을 코바코(한국방송진흥공사)를 거쳐 대행 영업해야 하지만, 이렇게 받는 협찬 상품권은 사실상 예외로 인정돼 방송사의 수익이 된다.

방송계 경력이 수십 년차에 이르는 현장 스태프들조차 상품권의 출처와 규모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은, 방송사가 쉬쉬하며 이렇게 받는 상품권의 실상을 정확히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KBS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던 다수의 비정규직 스태프들은 “KBS의 경우 <전국노래자랑>에 워낙 많은 상품권 협찬이 들어와 이를 다른 프로그램들 스태프들의 인건비로 쓴다”고 말했다.


방송사 정규직 제작PD들은 방송 스태프들에게 통화(돈)로 지급되어야 하는 임금을 상품권으로 주는 현실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비정규직 스태프에게 문화상품권으로 임금을 준 KBS의 김아무개 PD는 <한겨레21>에 보낸 ‘항의성 메일’에서 “‘방송사 갑질’에 관한 근래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공감”한다면서도 “상품권 대체 지급은 방송사 제작 현장의 구조적인 문제에 따른 오랜 관행”인데, 상품권을 임금으로 지급한 자신의 사례가 “방송사 갑질 기사로 인용되어, 매우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 항변했다.

그는 임금을 상품권으로 준 현실에 대해 ‘방송 제작 시점에 이미 메인 작가와 협의했고, 지급 시점 역시 정상적이었으며, 임금을 대체하는 상품권 지급은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관행’이었다며 “구성작가는 근로자가 아니므로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을 근거로 “작가료를 임금이라고 보고 근로기준법 위반을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보도”라고 지적했다.



KBS “실상 파악에 시간 걸릴 것”


한 사람의 노동자성을 확인하려면 사안별로 해당 PD가 작가의 업무 수행 과정에 지휘·감독을 하는지 등 사용-종속 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사용-종속 관계가 인정된다면, 어떤 형태의 계약을 맺었는지와 관계없이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된다.

KBS는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다수 프로그램에 만연한 상품권 페이와 관련한 실태를 묻는 <한겨레21>에 “제작 현장의 문제라 관련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며, 실상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답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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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당신 상품권으로 받아라?

방송업계의 ‘을·병·정’ 프리랜서 스태프들에게 상품권으로 임금 주는 방송사들
‘갑질119’ 카톡 채팅방에 쏟아진 갑질 백태… 방송사 “과거 일… 사실관계 확인 중”






임금과 상품권.
언뜻 비슷하게 들리지만, 본질적으론 완전히 다른 사회적 의미가 있는 말들이다. 임금은 노동의 대가다. 노동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노력이자 자기실현을 위한 가치 활동이다. 근로기준법상 임금은 통화(돈)로 지급해야 한다.

상품권은 다르다. 상품권은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아니면 경품으로 지급된다. 상품권은 한 개인이 살아가기 위해 확보해야 하는 ‘모든’ 재화와 용역과 교환될 수 없다. 도서상품권으로는 책을 살 수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방송사는 극단적인 격차를 지닌 현장이다. 특 A급 출연료를 받는 개그맨이 회당 출연료 2천만원을 받으며 하루에 두 회분 녹화를 하곤 4천만원을 받을 때, 그를 찍는 20년차 경력의 카메라맨은 25만원을 받는다. 오늘도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졸아붙다 못해 타버릴 것 같은 누군가들의 열정을 연료 삼아 신기루 같은 연기를 내뿜는다. 이런 갑질 저런 갑질들이 기막힌 모습으로 폭로되지만, 방송계에서 벌어지는 갑질은 산업 전체에 걸쳐 층층이 구조화되어 있단 점에서 압도적으로 잔혹하다.


<한겨레21>은 방송계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2주 동안 ‘방송계갑질119’ 카카오톡 오픈채팅방(https://open.kakao.com/o/gOk7PnD)에 올라온 사연들을 심층 취재하며, 10여 명의 방송계 ‘을’과 ‘병’과 ‘정’을 만났다. 이들이 쏟아낸 수많은 사연 가운데 우선 ‘상품권 임금’을 고발한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임금은 아주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면 돈으로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방송계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신분을 ‘프리랜서’란 세련된 이름으로 고쳐 부르며, 공공연히 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한겨레21>은 방송계 ‘을병정’들의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때까지 후속 보도를 계속 이어가겠다.


_편집자



KBS, MBC, SBS, CJ E&M 등 주요 방송사 모두 비정규직 스태프에게 상품권 페이를 지급하고 있었다. KBS 제공/ 정용일 기자/ 한겨레 자료/ CJ E&M 제공




나는 을도 아니고 병이었다. (임금으로) 상품권을 받겠다, 안 받겠다는 것을 결정할 권한 같은 건 애초부터 내게 없었다. 방송사가 주면 받고, 안 주면 할 수 없는 게 이 바닥이다. 상품권으로 받을래, 돈으로 받을래 묻곤, 상품권으로 받을 거면 지금 주고, 아니면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밀려 있던 6개월 임금 가운데 900여만원을 4개월이나 늦게 몰아서 백화점 상품권으로 받았다.”



20년차 촬영감독의 날품팔이


 

출연자가 인기 기준에 따라 회당 많게는 수천만원을 받을 때, 촬영 스태프는 1일 20여만원 안팎의 날품팔이로 일한다. KBS 제공



A는 20년차 베테랑 촬영감독이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도 방영 중인 SBS의 한 인기 예능프로그램에서 2016년 7월까지 촬영감독으로 일했다. 그가 일할 당시 그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수십 명의 스태프 가운데 본사 직원은 달랑 PD 세 명뿐이었다.

방송을 실제 제작하는 이들은 외주제작사 소속이거나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스태프였다. A씨는 그중에서 프리랜서였다. SBS는 프리랜서들을 제3의 회사 소속으로 넣어두고, 그 회사와 도급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데려다 썼다.


촬영 현장의 출신 계급과 성분이 복잡한 만큼, 임금을 정산받는 방식 역시 제각각이다. 서로 얼추 알지만 자세히는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본사 직원들은 당연히 정해진 월급에 수당을 더해 받는다. 방송사 정규직 PD들은 연차가 좀 쌓이면 억대 연봉을 받는다.

출연자와 작가들은 무조건 방송 1회분으로 월급을 정산한다. 출연자는 시청률에 직접 영향을 주는 ‘인기’가 기준이고, 작가는 ‘연차’로 서열화된다.

작가들은 그들끼리의 말로 ‘연공법’(연차×주당 10만원, 예를 들어 4년차 작가의 경우 4×10만원을 주당 임금으로 받는다. 그래서 월 단위로 방송이 4번 나가면 160만원, 5번 나가면 200만원을 정산받는다.)을 임금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카메라, 장비, 거치팀 등은 그런 게 아예 없다. 그냥 ‘장비’ 취급을 받으며 일한 날수만큼만 임금을 받는다. 하루에 2회분을 찍었더라도 임금은 1일치 날삯을 받는 식이다.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날품팔이다.


A는 날삯 임금조차 6개월 동안 받지 못했다. 방송사는 왜 임금을 안 주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시청률이 잘 안 나와서’ ‘제작비가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짐작할 뿐이다. 이유를 알아봤자 소용도 없다. 사정을 안다고 임금을 줄 것도 아니고, 따지고 들면 일이 끊길 게 뻔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업무는 계속됐다. 보통 일주일에 사나흘을 대기했다.

“내일부터 촬영 있어요, 3일 비워주세요”라는 연락이 오면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떤 날은 연예인의 스케줄이 갑자기 안 맞아서, 어떤 날은 현장에 나갈 본사 PD가 없어서, 촬영이 미뤄졌다. 층층이 갑들이다보니 어떤 갑의 일정과 심기 때문에 촬영이 연기됐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마냥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프리랜서라지만 대기하는 동안은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대기도 분명 업무인데, 촬영을 못하면 임금이 계산되지 않는다. 그럴 땐 차라리 회당 계산으로 월급을 받는 작가들이 속이라도 편한 것 같아 부러웠다. A는 촬영이 잡혔다가 취소되고 또 취소되어서 본 피해가 얼마인지 정확히 계산하지 못한다.



그나마 수수료 7.7% 떼야 현금화

 

그 예능 프로그램을 관둔 계기는 결국 돈이었다. 방송사는 새로운 출연자와 찍은 7일치 촬영분이 방송되지 않으니, 임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찍으라는 지시나 ‘불방’하겠다는 판단은 본사 PD의 권한이다.

A는 그래도 “일은 했으니 돈은 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했다. 꿈쩍도 하지 않을 걸 알았지만, 그런 항의조차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평상시에는 날삯으로 계산하며, 미방송분에 대해선 왜 회당 기준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행여 못 받은 돈에 불똥이 튈까 7일치를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그만뒀다.


밀린 돈을 주겠다고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뒤였다. 방송사 쪽에선 대뜸 상품권 얘기부터 꺼냈다. ‘상품권으로 받을 거면 지금 주고, 아니면 내년에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것에 급급하던 A의 귀에 ‘내년에 주겠다’는 말은 ‘떼먹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 얘기를 준비해놓고 A를 부를 때부터 애초 선택권은 A에게 없었다. 밀린 임금 900만원을 백화점 상품권 두 종류로 나눠 받았다.


10만원권 90장.

A는 1년여가 지났지만 상품권을 받고 나오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이 들었다. 기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방송사가 이런 곳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을 계속해야 했기에, 여전히 선후배들이 그 방송사, 그 프로그램, 그 PD를 ‘슈퍼갑’으로 모시며 종속돼 있기에. A는 기자와 만나면서도 이들 걱정에 속내를 쉽게 털어놓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A는 상품권을 현금화하는 방법을 알아봤다. 큰 방송사 근처에는 어김없이 상품권 ‘깡’을 해주는 가게들이 있다. 서울 목동에는 스포츠조선 건물 옆 골목과 오목교역 2번 출구 앞에 있다.

그런데 수수료가 문제였다. 7.7%를 떼야 현금으로 바꿔준다. 900만원을 바꾸면 69만3천원이 사라진다. A는 수수료가 아까워 바꾸지 못했다. 아직도 그때 받은 상품권을 가지고 다니며 쓴다.



상품권으로 협찬받는 방송사


 

최근 비정규직 작가들을 중심으로 방송작가노동조합이 출범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방송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감독급’ 촬영 스태프는 보통 하루에 25만~30만원을 받는다. 그 밑으로는 일당이 20만원, 15만원으로 떨어진다. 10년 전과 비교해 오르기는커녕 거의 반토막이 났다. 방송사 경영이 어려워서 그렇다고 하는데 정규직들의 임금이 반토막 났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A 같은 촬영 스태프들이 한 달에 일할 수 있는 날은 평균 보름 남짓이다. 20년차 촬영감독인 A가 버는 돈은 한 달에 300만원 안팎이다. 물론 그보다 못 버는 달도 많다.


정산은 이달에 한 일을 2~3개월 뒤에 주는 방식이다. 운이 나쁘면 프로그램 종영까지 기다릴 때도 있다.

4대 보험은 당연히 안 되고, 근로소득세 원천징수로 3.3%를 떼어간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종합편성채널의 촬영은 하루 20시간 동안 이어질 때도 있다. 그렇게 찍어봤자 근로일수는 하루로 계산된다. 업계 용어로 디졸브(장시간 노동을 하느라 잠들지 못한 채 아침이 와버리는 상태) 상태가 찾아온다. 20시간 연속 촬영 스튜디오 녹화는 2회분이다.


방송사는 A에게 임금 900만원을 상품권으로 주며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상품권이 가면 안 된다”며 회계 처리를 위해 복수의 개인정보를 알아오라고 요구했다. 본사 행정팀에서 직접 수령 확인 연락이 갈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900만원의 상품권은 A의 가족 5~6명에게 배분된 것으로 처리됐다.


그 회계 처리가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A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상품권이 어떻게 협찬되는지, 제작비 일부가 왜 상품권으로 결제되는 것인지도 잘 모른다. 본사가 직접 불러놓고, 알지도 못하는 도급업체에 소속된 것으로 행정 처리가 된다는 것만 안다. 방송사 역시 그런 회계 처리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이에 대해 SBS 쪽은 “기본적으로 임금은 상품권으로 지급되지 않는다”며 “해당 사안은 2016년도의 일이라 회계 정산이 끝나 예능운영팀에서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상품권으로 제작비를 충당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묻자, SBS 쪽은 “(본사가) 협찬을 받는 과정에서 상품권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최근 들어서는 현금 협찬을 많이 받는 추세”라며 “외주사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임금이 상품권으로 지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방송계 종사자 절반 ‘상품권 페이’ 경험

 

이른바 ‘상품권 페이’는 A만 겪은 예외적 문제가 아니다. <한겨레21>이 만난 10여 명의 방송계 종사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상품권으로 임금을 받아본 경험이 있었고, 모두가 ‘상품권 페이’를 알고 있었다. ‘상품권 페이’를 주는 방송사 역시 KBS, MBC, SBS, CJ E&M 등 주요 방송사였다.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아예 막내작가 등을 구인할 때, ‘고료: 상품권 지급’이라고 명시할 정도로 뻔뻔해졌다.


KBS에서 방송된 한 파일럿 교양 프로그램에서 일했던 10년차 작가 B는, 프로그램이 정규 편성에 실패하자 임금을 문화상품권으로 받았다. 백화점 상품권은 현금화할 때 7.7% 수수료를 떼지만, 문화상품권은 10% 수수료를 뗀다. 방송사 쪽은 이를 감안해 100만원을 받아야 했던 B씨에게 1만원권 문화상품권 115장을 건넸다.


문화상품권을 적법하게 현금화할 수 있는 방법은, ‘컬처랜드’ 사이트에 상품권을 온라인 등록하고, 이를 현금으로 환급받는 것뿐이다. 문화상품권 뒷면의 스크래치를 일일이 벗겨내 코드를 입력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따른다.

B는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 문화상품권 스크래치를 벗겨내며 ‘방송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나마 문화상품권은 현금화할 수 있는 한도가 한 달 100만원이어서, 15만원은 바꾸지 못한 채 서랍에 넣어두었다.


B의 경우도 A와 마찬가지였다. “당장 받으려면 상품권을 주고, 기다렸다 받으면 현금으로 주겠다고 해서 상품권을 받았다”는 것이다.

B는 “외주제작사 PD들이 (급한 김에) 제작비를 본인 카드로 선결제했는데, 이 비용을 추후에 상품권으로 결제해주겠다던 지상파 방송도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작가 C는 “본사 PD의 지시로 프로그램에 삽입되던 애니메이션을 고정으로 제작하는 업체에 주마다 150만원씩 상품권을 지급했다. 그 업체뿐만 아니라 지미집(크레인 같은 구조 끝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아래에서 리모컨으로 촬영을 조정하는 무인 카메라) 대여 같은 고정 비용 역시 상품권으로 안겼다”고 말했다. 임금이라고 생각했다면 돈으로 주는 게 당연했을 텐데,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사 PD는 언제나 “장비 썼다, 지미집 썼다”고 말했다. 사람이 아닌 장비한테 대여료를 주는 거니까 상품권도 문제없다는 투였다.



축의금을 상품권으로 주기도


 

방송사 비정규직 대량 해고 철회와 구조조정 중단을 외치고 있는 방송 비정규직노동자들. 류우종 기자



방송계 언저리에서 상품권과 관련해 희한한 경험을 하거나 목격했다는 얘기는 무수했다. 흔한 예로 외주제작사의 누가 결혼식을 하면, 본사 PD들이 축의금을 상품권으로 주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한 외주제작사 직원은 “본사 PD들은 주머니 쌈짓돈 쓰듯 상품권을 운영할 수 있나보다 생각했다. 외주사 직원끼리는 농담으로 ‘그거 쓰지 말고 본사 직원 결혼할 때 우리도 상품권으로 축의금 하자’고 말했다”며 씁쓸해했다.


지난 1월1일 새벽, 700여 명이 가입된 ‘방송계갑질119’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누군가 “지금 일하고 계신 분?”이란 글을 올렸다. 그러자 홀로 고독했던 듯 수십 개의 인증샷이 후두둑 떠올라왔다. 새해 첫새벽 해가 떠오르길 기다리던 방송 노동자들이 그 방에 숨죽이고 있었다.


이들은 장비가 아니다. 거기 원래 있어야 하는 카메라는 더더욱 아니다.

근로기준법 제43조는 ‘임금 기준의 4대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임금은 반드시 ‘통화로, 직접, 전액, 정기적으로 지급’되어야 한다. 이를 어기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지니 강력한 처벌 규정이다. 이 규정을 공영방송이, 다시 좋은 친구가 되겠다며 파업을 불사했던 방송이, 콘텐츠 혁신을 주창하는 지상파 방송이 모두 어기고 있다.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집행위원은 “방송사들이 감히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주기 위한 시스템을 법으로 계속 만들어왔는데, 공적 책임이 있는 방송사들이 이 보호로부터 하청 노동자들을 제외하기 위해 프리랜서란 이름을 관행 삼아 분배 정의를 어기고, 가장 약한 이들에게 고통을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김유경 노무사도 “방송사가 이들을 뭐라고 부르건,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노동자라고 본다면, 임금을 상품권으로 지급하는 것은 근로기준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교수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갑질’이란 사회적 코드가 “약자를 돌보지 않는 폭력적 국가와 사회 위에 군림하는 독점기업의 지배가 낳은 풍경”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지금까지 국가 단위의 방송 정책은 언제나 위를 향했다. 한류를 증진하고, 방송 산업을 활성화하는 것만이 주요 과제였다. 정권이 교체되어 방송을 정상화하겠다는 움직임이 거세지만, 위를 개혁하겠다는 것이지 아래의 어려움을 돌아보겠다는 것은 아니다.



공허한 ‘공정방송’ 외침

 

지상파 방송과 외주제작사의 관계는 곪을 대로 곪았고, 소수 지상파 정규직들은 하나의 계급이 되어 을·병·정인 외주제작사 직원들을 착취하고 있다.

불공평한 구조 위에서 쏟아지는 ‘공정방송’이란 구호는 공허하다.

<한겨레21>이 만난 방송계 을·병·정들은 자신들을 “방송사의 사노예”라고 말했다. 이 노동자들이 방송업계에서 ‘시민권’을 획득할 방법은 무엇일까.

임금을 상품권으로 주는 방송사들을 이제 사회가 ‘징벌’해야 하지 않을까.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