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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기형도와 시인의 어머니

道雨 2018. 3. 30. 17:10

 

 

 

시인의 어머니

 

 

 

이런 기사가 났다.

 

-글 깨친 기형도 시인의 어머니, 팔순 돼 아들 작품 앞에 앉다

 

시인의 어머니는 아들이 쓴 시는 뜻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수녀님의 시는, 성경 말씀으로 써서 그런지 알겠는데, 아들 시는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말한 수녀님은 시인 이해인 수녀다.

그럴 만도 하다.

아들의 시는 그 시대 가장 예민한 청춘들의 바이블이었다.

 

사람들은 아들의 25주기였던 지난해 아들의 어느 시가 가장 좋으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없다고 답했다. 아들 생각이 나서 보기가 싫었다고 했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이 쓴 엄마 걱정은 기억한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소리꾼 장사익이 음을 붙여 노래로 부른 덕에 어머니도 아들의 시를 알게 됐다.

열무 삼십단, 그건 내가 한 거니까. 아들이 그걸 시로 썼구나, 그랬지. 그래도 머리에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어요.

 

시를 잘 모르는 시인의 어머니이지만, 아들이 자랑스럽고 그립다.

우리 아들 시가 교과서에도, 텔레비전에도 나와요. 어디든 꼭 나오더라고요.

엄마 걱정은 중학교 1학년 교과서 10여종에 실려 있다.

 

 

장옥순(82)씨의 아들은 요절 시인 기형도(1960~89).

장씨는 24일 서울 방배동 서울시교육연수원에서 열린 성인 문자해득(문해)교육 프로그램 졸업식에 참석했다. 금천구가 운영하는 18개월 과정을 마치고 초등학력을 인정받은 장씨는 교육 이수자들 가운데 최고령이다.

 

장씨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일제 식민지 시절 양학당에서 잠깐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다.

유명 시인의 어머니가 글도 못 깨쳤다는 얘기를 들을까봐, 문해교실을 다닌 1년 반 동안 주변에 아들 얘기를 하지 않았다.

수강생 전원이 참여한 시화전 때도 자작시를 쓰지 않고 이해인 수녀의 시를 적어 냈다. 시인 엄마라는 말이 나올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둔 16일 선생님에게 <기형도 전집>을 선물하기 전까지 장씨는 자신을, 아들을 숨겼다.

 

그래도 선생님에겐 감사하단 말씀을 드려야 할 거 같아서 아들의 시를 선물로 드렸죠. 근데 그거 때문에 이렇게 들통이 날 줄 몰랐네요.

졸업식 전날 금천구 시흥5동 주민센터에서 만난 장씨가 웃으며 말했다. 문해교실 교사 윤영희(54)씨는 평소에도 과묵하셔서 왔다가셨는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했다.

 

기형도 시인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28만부(53), 10주기에 나온 <기형도 전집>7만부(26)가 팔렸다.

아들과 함께 25년을 함께 산, 어린 아들이 시장 간 엄마를 기다리던 경기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옛집은 장씨가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안양천 너머로 내려다보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아들 시가, 무슨 시가 좋다는 게 머리에 들어오는 게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음달 7일 아들의 26주기가 되기 전에 시집을 펼쳐볼 요량이다.

 

 

 

 

<한겨레신문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등록 : 2015.02.25 00:58수정 : 2015.02.25 08:39>

 

[출처] 시인의 어머니|작성자 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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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걱정

 

                                                                                                    -   기 형 도  -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

 

 

 

 

 

 

 

* 기형도

 

연평도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주 어렸을 적에 큰 비만 오면 고립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던 광명시 소하동으로 이사를 왔으며, 이 후 연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었던 29세의 젊디 젊은 청년 기형도는, 시집을 준비하고 있었던 무렵인 8937일 저녁, 맥주를 마신 후 종로 2가의 심야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숨진 채로 발견된다. 유전성 뇌졸중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 안개 의 도입부 , 기형도 -

 

 

 

 

이 시에 등장하는 샛강이 바로 그가 살았던 지역의 안양천이다. 기형도가 어렸을 적 그의 집안은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가 뇌졸중 증세로 고생을 하다가 그의 표현대로 약병에서 알약들이 쏟아지는 것처럼 쓰러졌기 때문이다.

 

이 후 시인의 어머니는 텃밭에 열무를 심어 시장에 내다 팔았고, 어린 소년 기형도는 하루 종일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걱정하던 기억을 시로 적었으며, 지금은 그 시가 광명시 체육공원의 시비 위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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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의 삶

 

196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은 황해도였으나 한국전쟁 중 연평도로 건너왔다. 1964년 일가족이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이사했다. 당시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재민들의 정착지로 도시 근교 농업이 성한 농촌이었다. 1967년시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성실한 부친 덕분에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다.

 

1969년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가계가 기울어 모친이 생계를 꾸리게 되었다. 1973년신림중학교에 입학했고, 1975년 바로 위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76년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교내 중창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79년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에 입학했다. 교내 문학 서클 〈연세문학회〉에 입회하여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시작했다.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시상하는 〈박영준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 입선되었다.

 

1980년 정법계열에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했다. ‘80년의 봄’을 맞아 철야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하고 교내지에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했다가 조사를 받았다.

1981년 병역 관계로 휴학하고 대구·부산 등지를 여행했으며, 방위로 소집되어 안양 인근 부대에서 근무했다. 안양의 문학 동인인 〈수리〉에 참여해서 동인지에 「사강리」등을 발표했다. 시작에 몰두하여 초기작의 대부분을 이 때 쓰고 습작을 정리했다.

 

1982년 전역하여 양돈 등 집안일을 도우면서 창작과 독서에 몰두했다. 이 때 「겨울 판화」, 「포도밭 묘지」, 「폭풍의언덕」 등 다수의 시와 소설을 썼다.

1983년 3학년으로 복학하고,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시상하는 〈윤동주문학상〉에 시 「식목제」로 당선되었다.

 

1984년중앙일보사에 입사하고, 1985년 시 「안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2월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수습 후 정치부로 배속되었다.

1986년 문화부로 자리를 옮기고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문학과 출판을 담당하면서 관련 인사와 활발하게 교유했다. 1987년 여름에 유럽을 여행하고, 1988년 여름휴가 동안 대구·전남 등지로 여행했다.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자리를 옮겼다.

 

1989년 3월 7일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3월 9일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5월에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90년 1주기를 맞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을 살림출판사에서 출간했다.

 

 

* 기형도문학관

  - 경기도 광명시 오리로 268(소하동 산144)

 

                        

 

 

 

기형도 문화공원 내 기형도 문학관이 문을 열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안개'라는 시로 신춘문예에 당선한 기형도 시인(1960-1989)의 앞날은 비록 그가 걸어온 시대에 비해 창창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기자로 세상의 밝음과 어둠을 물어 나르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시를 사랑하던 독자들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실로 어이없는 현실이었다. 그날 오후 버스 라디오에서 그의 비보를 듣고 얼마나 믿을 수 없었던지 그 가슴 먹먹하던 날이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그 무렵, 젊은이라면 그렇듯 스물다섯의 나도 기형도 시인의 시에 깊이 빠져 새벽까지 그의 시어(詩語)를 따라 쓰기를 거듭했던 때였다.
 
 
지독한 가난과 아버지와 누나의 죽음, 얼룩진 시대의 아픔을 읽어나가는 감성과 날카로운 예지는 그의 담대한 필체를 거듭나게 했지만 그 때문인지 낙원상가 허름한 극장에서 그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남겼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루머는 주로 정치권과 연관돼 퍼져나갔다. 의문사... 왜 하필 서른 살 생일을 엿새 앞둔 그날 그곳이었는지, 시간이 흘러 뒤늦게 뇌졸중이라는 사인이 발표될 정도로 그의 죽음은 그만큼 말을 아껴야 하는 사회에 던져진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자필 원고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학관이 문을 연다는 소식에 며칠 동안 고민했다. 광명시 소하동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었고 요즘 오른팔의 염증이 더해져 키보드만 간신히 두드릴 뿐 거의 팔을 쓰지 못하는 상태라 개관식을 볼지 안 볼지를 결정하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행사를 몰랐으면 모를까 집에 그대로 있는 것도 편안치 않을 것 같아 집을 나섰다. 한때 그의 시를 사랑했던 팬이자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보탤 수 있는 요절 시인에 대한 예의라 생각하면서.
 
 
 
그는 연평도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시흥군(현재 광명시 소하동)에서 자랐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 '엄마 걱정'은 바로 소하동에 살던 그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 작품이다. 어머니가 야채 행상에 나섰던 유년기의 가난에 담긴 슬픔은 읽는 이들에게도 애틋함을 느끼게 하는 시다. 그래서 소리꾼 장사익 씨가 그 시를 읽고 노래로 만들어 불렀고, 언젠가 그의 공연장에 그를 찾아온 기 시인의 어머니와 껴안고 울음을 나눈 사연도 가진 작품이다. 그 인연으로 10일 열린 기형도 문학관 개관식에서도 장사익 씨는 '엄마 걱정'을 구슬프게 불러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참으로 인연의 맞닿음은 우연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데 광명시 소하동과의 인연이 또 신기하다. 소하동은 절친이었던 대학 친구 가족이 부산에서 올라와 첫 둥지를 튼 곳이어서 친구가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여러 번 그곳으로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다. 사실 이번에도 그 동네가 생소했다면 그 먼 거리를 무릅쓰고 달려가지도 않았을 텐데 친구와의 추억도 되새길 겸 기꺼이 다시 찾게 된 것이다. 물론 기형도 문화공원은 고속도로 근처여서 예전 그 친구의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낯익은 친구의 집을 찾아가듯 마음이 가볍기까지 했다.
 
 
 
'영원한 청춘' 시인으로 불리는 고(故) 기형도 시인은 요절한 다른 시인들에 비해 지금까지도 그의 문학을 기리는 사람들과 꾸준한 연대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의 작품과 넋을 기리고자 오래전부터 계획해온 광명시와 광명시 문인들, 그리고 시민들과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이 모두 하나 되어 그의 문학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꾸준히 펼쳐왔다. 그 결과로 광명시는 마침내 2014년부터 추진한 기형도 문학관을 개관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상 3층 건물인 기형도 문학관은 유족의 뜻에 의해 1층 전시 공간 이외엔 시집 전문 도서관과 북카페, 문학도를 위한 습작실 등 광명 시민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꾸몄다. 1층에는 전시실, 2층 북카페 및 도서자료실, 다목적실, 3층에 강당과 창작체험실, 수장고 등이 마련되었다. 상설 전시실에는 기형도 시인의 자필 일기장, 육필원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상패 등 유족이 기탁한 유품 130여 점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으며 60여 점의 유품이 전시되었다.
 
특히, 기형도 시인의 대표 시인 '안개'는 텍스트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표현하였다. 이밖에 기획 전시실에는 기형도 시인의 생전 사진 20여 점이 공개되고, 유명 작가들이 낭송한 기형도 시를 듣고 대표 시를 필사할 수 있는 체험 코너도 준비돼 있다.
 
기형도 문학관 명예 관장은 기 시인의 누나 기향도 씨가 맡았다. 개관식엔 양기대 광명시장을 비롯해 시인의 모친 장옥순 여사와 누나 기향도 관장 등 유족과 지역 주민, 문우 등 100여 명이 참석해 기쁨을 같이하며 그를 기렸다. 문인으로는 시인의 대학 은사 정현종 시인을 비롯, 소설가 성석제, 원재길, 김태연과 시인 신현림, 황인숙 등이 참석했고 고인이 참여했던 '시운동' 동인 박덕규 시인도 자리를 함께했다.
 
 
연세대 후배인 우상호 의원은 축사에서 "순수한 젊은이였던 기 시인을 잊지 말자"며 "기형도 형은 늘 대학노트에 빽빽이 쓴 시를 제게 보여주곤 했다"면서 "형에게 시를 주로 언제 쓰느냐고 물었더니, 신촌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많이 구상했다고 했는데 아마 안양천 주변의 풍경에서 시를 많이 얻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내가 그의 죽음을 처음 들었던 것도 신촌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였다는 게 생각나자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뭔가가 꿈틀거려 그 상황을 모면하느라 어찌나 애썼던지. 사실 스물다섯의 내게 그의 시는 너무 어둡고 슬퍼서 그의 시집을 펼치기만 하면 곧 침울해지곤 했다. 나보다 겨우 네 살밖에 많지 않았던 젊은 그에게 세상은 왜 그다지도 환하고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가슴이 답답해지곤 해 그가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이 같은 듯 다르게 느껴지던 지난날이었는데 오늘에 이르고 보니 그는 나보다 몇십 년은 앞서 세상을 짚어나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겪은 생의 무게가 그토록 그를 어둠에 갇히게 했다면 정녕 그것은 누구의 탓이었을까. 그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던 우리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의 시비(詩碑)가 늘어서 있는 공원을 둘러보며 그에게 묻고 싶었다.
 
개관식이 끝난 후 그의 혼을 부르기라도 하듯 울대에 힘을 주며 구성지게 부르는 장사익 씨의 노랫소리가 문화공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쩌면 이 자리에 그가 다녀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제 기 시인이 머물 곳이 한군데 더 생겨 기뻐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다른 계절에 다시 찾겠다는 약속을 했다. 기형도 문화공원과 문학관은 광명시 소하동 KTX 광명역 인근에 있다.(문의: 02-2621-8860)
 

<시니어리포터 이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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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찾아낸 기형도 시인의 미발표 시 중에서

 

 

 

 

 

 

                                                                  귀가

 

 

                     당신이 세수하신 물에선

                     항상 짠 냄새가 나요

                     가끔은 몇 개씩

                     조개껍질이 둥둥 떠 있어요

                     고양이털이 가늘게 부드러워

                     새벽에 흘린 코피가 아직까지 젖어 있고

                     집은 멀기만 한데

                     신발 끈이 자꾸만 풀어져요.

                     당신을 잊고 있는 밤이면, 어머니

                     우주비행사가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이

                     우리 집 꽃밭에 소리없이

                     별똥처럼 내려앉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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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회 여동생’에 막걸리 얻어먹고… 기형도가 건넨 詩 3편

 

1982년 지은 미발표 시 햇빛

“밥값 대신 수표 하나 써 줄게”… 방위병 복무시절 문학회 활동 중 써

 

 

 

* 기형도 시인이 1982년 한 여성에게 써서 건넨 미공개 연시(戀詩) 세 편 중 한 편. 박인옥 시인 제공

 

“(밥값 대신) 수표 하나 써 줄게.”

 

 

1982년의 어느 날,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하며 경기 안양의 수리문학회 활동을 하던 기형도 시인(1960∼1989·사진)이, 문학회와 가까이 지내던 한 살 어린 여성 A 씨에게 말했다. 그녀에게 라면과 막걸리를 얻어먹은 차였다. 기 시인은 그 자리에서 갱지에 볼펜으로 시를 써서 A 씨에게 건넸다.

 

“당신의 두 눈에/나지막한 등불이 켜지는/밤이면/그대여, 그것을/그리움이라 부르십시오/당신이 기다리는 것은/무엇입니까, 바람입니까, 눈(雪)입니까/아, 어쩌면 당신은/저를 기다리고 계시는지요/손을 내미십시오/저는 언제나 당신 배경에/손을 뻗치면 닿을/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읍니다”

 

A 씨가 보관해 오던 시가 19일 공개됐다. 박인옥 시인(한국문인협회 안양지부장)이 A 씨의 동의를 얻어 내놓은 것이다.  

 

당시 기 시인을 비롯해 박인옥 홍순창 유재복 등 수리문학회원들은 동인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안양의 헌책방 ‘독서당 수리’에 자주 모여 서로의 작품을 품평했다. 주머니가 가벼웠던 그들은 A 씨가 헌책방에 오면 라면이나 막걸리를 사달라고 자주 청했다고 한다.

A 씨는 1982년의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전철역 부근 선술집에 앉아 쭈그러진 냄비에 라면을 먹었다. 셋이서. 그리고 커다란 양은 사발에 막걸리를 마셨다. … 그의 24살의 눈을 기억한다.”

 

1989년 A 씨는 기 시인의 부고를 들었다.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 초판 2쇄를 샀고, 시집 뒤편에 기 시인이 시를 써 건넨 종이를 붙여 놨다.

 

“형도 오빠 작품이 제일 좋았어요(뛰어났어요).”

 

박인옥 시인이 동아일보에 전한 A 씨의 회고다. A 씨는 “형도 오빠가 저를 좋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굉장히 잘해 줬던 것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기 시인이 A 씨에게 ‘밥값 대신’ 건넨 시는 2편이 더 있다. 육필로 쓰인 이 시들은 경기 광명시에 건립 중인 기형도문학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당신에게/오늘 이 쓸쓸한 밤/나지막하게 노크할 사람이/있읍니까/…/나는 그대에게 최초로/아름다운 한 점 눈(雪)으로/서있을 것입니다”

 

 “…아, 하루에도 언제나/긴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그 강물에 당신의 영혼이/미역을 감는 밤/아세요./나는 언제나 당신의 주위에서/튀어올라 물보라치는/물비늘임을 그대는 아세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출처 : http://news.donga.com/3/all/20170620/84963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