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경찰의 치명적 유혹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첫 검찰총장 후보자 세 명의 사전검증을 경찰에 맡겼다고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정보경찰을 없애지 않겠구나, 라고.
최근에는 청와대와 여당의 핵심들이 했다는 말이 바람결에 들려온다. ‘국가정보원의 국내정보 수집 기능이 사라진 상황에서 정보경찰마저 없애면 우린 어떻게 정부를 운영하라는 말이냐.’
이쯤 되면 알아차려야 한다. 없애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의존도가 심해지겠구나, 라고.
너무 성급한 결론인지도 모른다. 아니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다.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와 정보경찰의 음습한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풍경의 부조화를 일개 민간인에 불과한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경찰청 정보국장 방에는 A4 종이 수백장에 이르는 ‘일일정보보고’가 날마다 쌓인다. 전국의 3천여 정보경찰들이 올린 보고를 추린 것들이다. 정보경찰들은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 기업, 언론사, 시민단체, 학교 등을 출입처로 나눠 매일 정보를 생산한다. 때론 정부 정책이나 특정 이슈에 대한 여론 탐문 같은 기획 정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정보경찰들이 물어 온 정보를 팀장을 비롯한 간부가 ‘데스킹’해서 위로 올리는 과정은 언론사의 기사 생산 과정과 흡사하다. 중요한 정보는 청와대로 올라간다.
개인정보와 기관정보는 좀처럼 구분하기 어렵다. 기관정보를 캐 들어가기 시작하면 개인정보로 연결되고, 개인정보의 합이 기관정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경찰 정보는 정부 기관이나 기업, 주요 개인을 망라한 사찰 보고서나 다름없다.
국정원이나 국군기무사령부, 그리고 이명박 정부 시절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어쩌다 일탈 행위로 민간인 사찰을 했다지만, 경찰의 정보조직은 민간인 사찰이 주요 업무인 조직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정말 아찔한 것은, 이들이 열심히 하면 할수록, 현대 민주국가의 존재 의의에 해당하는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는 침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국민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은 이럴 때 일을 열심히 해야 할까, 대충 해야 할까.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처럼, 국가가 공무원에게 이런 딜레마를 안겨주는 것 자체가 죄악은 아닐까.
세월호 유족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 등 경찰 정보조직의 사찰 행위가 종종 드러났지만, 국정원이나 기무사에 견줘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동안 청와대의 경찰 정보 의존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이나 기무사, 공직윤리지원관실이 경찰보다 더 내밀한 ‘맞춤형’ 정보를 양산했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보고서를 워낙 좋아해서 퇴근 뒤에도 가져가서 읽었다고 한다.
청와대가 많이 의존하면 할수록 정보경찰에는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공직윤리지원관실이 그랬듯, 반드시 ‘오버’하게 돼 있다.
만약 고위공직자 인사검증 등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상 조직이 필요하다면, 중앙인사위원회를 되살리거나 청와대 특별감찰관실을 강화하는 등 공개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면 어떨까.
다른 나라 사례를 참고하면서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기시감과 싸우는 정부다. 참여정부의 실패와 싸우고, 노무현의 단점과 싸운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성공적이다. 기시감이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가본 길을 다시 가는 셈인데, ‘가지 않은 길’ 위주로 걷고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대통령이 아픈 유족을 안아만 줘도 감동하던 시절은 지났다.
각론의 계절로 접어들면 구체적인 행정의 꽃들이 피고, 정원사의 진정한 실력도 드러날 것이다.
이재성 사회1 에디터
sa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9650.html#csidx5e867857eb09184b96389dd7e4cc6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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