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의 추억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달 북-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에게 “6자회담 재개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는 최근 일본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일본이 초조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반도 주변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데 우리만 아무 구실도 못하고 배제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 같은 것 말이다.
2003~2008년 사이에 가동됐던 6자회담은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 끼어들 기회를 열어준 다자 대화 틀이기도 했다. 6자회담 재개는 일본이 발언권을 행사할 공식 창구의 복원을 의미한다. 일본으로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된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이제 와서 10여년 전 6자회담을 소환할 이유가 있을까. 혹 일본의 조바심이 반영된 보도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애초 6자회담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북-미 직접대화’ 요구를 피하려고 고안해낸 것이다.
북한은 ‘핵 문제는 북-미 양자 문제’라며 처음엔 6자회담 참여를 거부했다. 이런 북한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원된 논리는 “6자회담 틀에서 북-미 양자대화를 하면 되지 않느냐”였고, 실제 6자회담에선 어떻게든 북-미 양자대화를 하려는 북한과 이를 하지 않으려고 피하는 미국의 신경전이 한동안 지속됐다. 북한이 북-미 직접대화 우선 정책을 버렸다는 얘긴 듣지 못했다.
객관적 현실도 달라졌다. 6자회담이 시작된 2003년 8월이나 ‘9·19 공동성명’이 나온 2005년 9월은 북한의 핵실험 전이다. 6차 핵실험까지 한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청와대 관계자도 6자회담 재개에 대해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가능하다면 남-북-미 정상회담을 하고, 그다음에 그보다 조금 안전한 장치들, 관련국들의 보증이 필요하다 싶으면 6자회담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본이 갑작스러운 정세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는 징후는 진작 있었다. 일본은 애초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 움직임에 불신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베 신조 총리는 2월 문 대통령이 평창올림픽을 명분으로 한-미 연합훈련을 연기하려고 하자, 문 대통령 면전에서 “훈련은 예정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내정간섭성 발언까지 했다. 당시 한-일 정상회담은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정면충돌로 냉랭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한 달 뒤 서훈 국정원장이 방북·방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찾았을 때 “남북관계의 진전과 비핵화 국면에서 변화를 가져온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에 경의를 표한다”고 180도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의 북-미 대화 제안에 ‘5월 북-미 정상회담 개최’로 적극 화답하고 나서자, 새로운 대화의 물줄기를 돌이키기 어려운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일본은 앞으로 북-일 접촉 등을 통해 정세 변화 국면에서 어떻게든 소외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일본에는 북한 위협론 등 안보 관심사도 있고, 납북 피해자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도 있다. 실상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 숟가락을 하나 얹으려는 노력을 포기한 적도 없다.
어떻든 정부가 북핵 문제를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라는 큰 틀에서 풀어내려는 구상을 갖고 있다면, 이 흐름에서 일본을 배제할 이유는 없다.
일본이 북-일 관계 개선 쪽으로 움직이도록 돕는 건 옳은 선택이다. 그렇지만 우리 문제에 이웃나라가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걸 받아줄 필요는 없다.
그래서 9·19 공동성명에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협상”을 “직접 관련 당사국들이 별도의 포럼에서” 하는 것으로 했다.
박병수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suh@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9647.html?_fr=mt0#csidxef404214ae48d53848ecd0ed284e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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