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진주강씨와 정당매 : 강회백, 강석덕, 강희안, 강희맹

道雨 2018. 7. 2. 12:34





진주강씨 : 강회백, 강석덕, 강희안, 강희맹



단속사지 정당매(政堂梅)

 

 

남효온의 智異山日課에 ‘지리산단속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절 안 모퉁이에 최문창(崔文昌)이 독서하던 방이 있다. 절의 마당에 매화 두 그루는 고려시대 정당문학(정당문학)을 지낸 강통정(강회백)이 심은 것이다. 그 매화나무가 4, 5년 전에 말라 죽었는데, 그의 증손인 용휴선생(강구손 1450~1505, 강희맹의 아들)이 다시 심었다.

 

김일손의 頭流紀行錄에 이 절의 승려가 말하기를 “신라의 신하 유순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단속’(斷俗)이라 이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누각에서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고 전한다.

강문경공(강맹경)의 조부 통정공(강회백, 1357~1402)이 젊은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할 때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자,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자손들이 대대로 북돋워 번식시켰다고 한다.



* 강맹경 : 강우덕(강회백의 둘째 아들)의 아들.

 


단속사 정당매(인재 강희안, 1417~1464)


우리 선조 통정공께서 소년시절 지리산 단속사에서 글을 읽으실 때, 손수 매화 한 그루를 뜰 앞에 심으셨다. 그리고 시 한수를 지으셨다.

 

천지 기운 순환하여 끓임 없이 돌고 돌아,

섣달에 핀 매화에서 천심을 보네.

은나라 국솥에 맛낼 매실이,

부질없이 산중에서 피었다 또 지누나.

 

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임금 곁에 계시면서 정사를 바로잡고 조화를 이루어, 임금을 보필하고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으셨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시참이라 하였다.

 

단속사의 승려들이 공의 덕을 생각하고 재주를 사랑하며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끝내 잊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매화를 공처럼 대하여 해마다 뿌리에 흙을 북돋워 잘 자라도록 돌보았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도록 전해져 ‘정당매’라 불린다.


* 강회백의 손자인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에 정당매에 관해 기록이 있음.

 

 

정당매 시문후(탁영 김일손, 1464~1498)


지난해(1489년) 영남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두류산을 유람할 생각으로 먼저 단속사에 들렀다. 누각 앞에는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키가 10자 남짓 되었다. 그 아래에 오래된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반 자쯤 남아 있었다. 승려가 그것을 가리키며 ‘정당매’(政堂梅)라고 하였다. 그렇게 이름 붙여진 까닭을 묻자, 승려가 말하기를 “강통정이 어릴 적에 손수 심은 것입니다.

 

그 뒤 벼슬길에 나아가 정당문학에 이르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당이 세상을 떠난 지 1백여 년 뒤에 매화나무도 죽었습니다. 증손 용휴가 아버지(강희맹)의 명을 받들고 와서 그 유적을 찾아보았습니다. 죽은 매화나무를 보고 슬픈 마음이 북받쳐 그 곁에다 새로 나무를 심었는데 벌써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정당만 자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화나무도 자손을 두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단속사 정당매(남명 조식, 1501~1572)


절도 중도 쇠잔하니 산도 옛 산이 아니로세

고려의 임금, 집안 단속 잘하지 못하였네

추울 때 피는 매화 조물주의 잘못으로

어제도 꽃 피우더니 오늘 도 꽃을 피우누나.

 

제단속사 정당매(명암 정식, 1683~1746)


자그마한 연못가에 있는 정당매

상국의 남은 자취 아직도 역력하네.

꽃의 일은 인간사처럼 그릇되지 않아

봄바람에 어김없이 그대로 피어나네

 

 

경상대 최석기 교수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읽다보니, 선조들의 유람기에 단속사와 정당매가 많이 나온다. 가까이 있음에도 그 폐사지를 한번도 가 보지 않았는데, 마침 매화가 만개한 계절인지라 급하게 단속사지를 다녀왔다.

 

 

 

단속사지 정당매를 찾아가다


2011. 3. 29, 어천을 지나 청계 가는 웅석봉계곡의 길가에는 이국적 이름인 샛노란 히어리가 만개했다. 청계저수지 아래로 조금 내려가니 단속사지 안내판이 서 있다. 길가의 평지인 단속사지는 민가가 들어서 있고, 그 중간에 보물 제72호와 제7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서쪽 탑 앞에 매화나무 몇 그루가 꽃을 피우고 있으며, 석탑 앞으로 두어 집 앞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삼층석탑이나 당간지주 보다 ‘정당매’를 보고 싶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보고 온 인터넷 지도에는 정당매가 석탑 앞에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 곳에는 남명선생시비가 서 있다. 밭두렁 아래 글자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길쭉한 돌덩이가 비스듬히 서 있는데, 옆의 안내석이 없다면 누가 알아보겠는가?

 

贈山人惟政(단속사에 들린 사명당에게 준 시)

 

꽃은 조연의 돌에 떨어지고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탑 뒷집 마당의 할머니께 물어 본다. “할머니 정당매가 어디 있어요?”

“그 죽은 나무 저 뒤로 가 보시오”, “아 예...” 정당매가 죽었을까?

 

 

서쪽 탑 옆으로 난 골목을 조금 들어서니 거창한 안내돌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 시커멓게 박제한 죽은 줄기에서 새 생명을 이은 한 가지가 매화를 피워서 향기를 내뿜고 서 있다. 왼편엔 비각이 서 있고, 뒤로는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매향을 맡아본다. 5~600여년을 이어온 매향인가? 매화가 150살을 넘으면 고매(古梅)라 부른다는데...거창한 안내돌에는 630여년전 통정공 회백과 통계공 회중 형제가 이곳 단속사에서 수학할 때 심은 매화나무로, 원정공 하즙선생의 원정매와 남명 조식선생의 남명매와 함께 산청삼매(山淸三梅)로 불린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탁영 김일손의 ‘정당매 시문후’에 의하면 통정공이 심은 매화나무가 죽어 그의 증손 강용휴가 새로 심은지 10년이 되었다는 해가 1489년이니 올해로 522년이 된다. 아무튼 500년이 넘은 매화나무가 죽어가면서 한 가지에 새 생명을 남겨둔 셈이다. 주위에 정당매 씨를 받아 혈통을 이었으면 좋으련만, 무지하고 멋을 모르는 세속인들이 얕고 가벼운 개량종 매실나무를 심었다.

 

왼편의 작은 비각은 ‘政堂梅閣’(정당매각)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고, 안에는 두 기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오른편 비는 '정당문학통정강선생수식매비', 왼편은 '통정강선생수식정당매비'라고 쓰여 있다. 만개한 정당매 주위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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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회백


[정의]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백부(伯父), 호는 통정(通亭). 할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강군보(姜君寶)이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강시(姜蓍)의 아들이다. 강종덕(姜宗德), 강우덕(姜友德), 강진덕(姜進德), 강석덕(姜碩德), 강순덕(姜順德)을 아들로 두었다.


[활동사항]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부사·첨서사사(簽書司事)를 역임하였다. 1385년 밀직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지밀직(知密直)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에 조준(趙浚), 서균형(徐均衡), 이지(李至)와 함께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린 것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겸 이조판서에 있을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 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 兼 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이 때 정몽주(鄭夢周)의 사주를 받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이 조준·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 대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는데, 1392년(공양왕 4) 정몽주가 살해된 후, 처음에는 형인 강회계(姜淮季)가 공양왕의 부마였기 때문에 탄핵을 면했다가, 곧 진양(晋陽)에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저술]
『통정집(通亭集)』이 있다.




강석덕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아버지는 동북면도순문사 강회백(姜淮伯)이며, 심온(沈溫)의 사위이고, 아들이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이다.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신온의 딸)의 여동생과 혼인하여, 세종과는 동서지간이 되며, 따라서 세종의 아들들(문종, 세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에게는 이모부가 됨.

강희안, 강희맹과 세조(수양대군)는 이종사촌간이 됨.


생애 및 활동사항

태종 초에 음사(蔭仕)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으며, 공조좌랑으로 재직 중이던 1416년(태종 16)에 천추사(千秋使)가 가지고 간 무역품 중에서 공조가 납품한 은이 가짜로 판명됨에 따라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세종 초에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인수부소윤(仁壽府少尹)에 승진되어 집의를 역임하였고, 일시 면직되었다가 1441년(세종 23) 우부승지로 복직되었다.

그 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44년에 호조참판으로 승진, 이듬해에 대사헌, 1446년에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어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국상에 참여하였다.

1447년 개성부유수로 출사했다가 1449년 중추원사로 입조하였고, 1450년(문종 1) 동지중추원사, 이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1455년(세조 1)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면서 가자(加資)되었다.

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고 청렴강개하였으며,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저서로는 『완역재집(玩易齋集)』이 남아 있다.




강희안


본관은 진주.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 이조판서를 지낸 석덕(碩德)의 아들이고, 좌찬성 희맹(希孟)의 형이다.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4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서주부(司贍署主簿)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돈녕부주부·이조정랑·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1443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1445년 최항(崔恒) 등과 더불어〈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주해했다. 또한 1444년 신숙주(申叔舟) 등과 같이 〈고금운회 古今韻會〉를 번역했으며, 1447년에는 신숙주·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동국정운 東國正韻〉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사헌부장령·지사간원사 등을 두루 거치고 1454년(단종 2)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이해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팔도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1456년에는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그는 관계하지 않았다는 성삼문의 진술로 화를 면했다. 이어 1463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예술세계

동생 희맹과 함께 일찍부터 시·그림·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시·서·화의 삼절로 일컬어졌다. 그의 시는 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가를 들었으나 문집은 전하지 않는다.


글씨는 전서(篆書)·예서·팔분(八分)에 두루 능하여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趙盟頫)에 비견되기도 한다. 1445년 세종이 보옥을 얻어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의 8자를 새겨 옥새를 삼았을 때 글씨를 썼으며, 1455년 주조한 을해자의 글씨도 그가 썼다.


그림은 남송의 원체화풍(院體畵風)과 명초의 절파화풍(浙派畵風)을 받아들여, 웅장한 모습의 산수를 주로 그렸던 당시의 추세·기법과는 다른 작품을 그렸다.

예컨대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에서는 주변의 산수가 배경에 불과하고 수면을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의 그림은 흔히 송나라의 유용·곽희에 견주어진다. 그러나 "서화는 천한 기술이므로 후세에 전해지면 다만 이름에 욕될 뿐이다"라고 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 養花小錄〉이 있으며, 그림으로는〈고사관수도〉·〈교두연수도 橋頭烟樹圖〉·〈산수인물도〉·〈고사도교도 高士渡橋圖〉·〈강호한거도 江湖閑居圖〉 등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강지돈녕석덕묘표 姜知敦寧碩德墓表〉와〈윤공간공형묘비 尹恭簡公炯墓碑〉가 전한다.




강희맹



뛰어난 문장가이며 공정한 정치를 하여 세종·성종 때 모두 총애를 받았다.

본관은 진주. 자는 경순, 호는 사숙재(私淑齋)·무위자(無爲子),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지돈녕부사 석덕(碩德)의 아들로, 희안(希顔)의 동생이다.


1447년(세종 29) 18세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68년 남이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1473년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이조참판·판돈녕부사·우찬성을 거쳐 1482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부지런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공정한 정치를 했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한편으로 아첨하며 자기 공을 자랑한다는 비방도 들었다. 경사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뛰어난 문장가였고 민요와 설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소나무·대나무 그림과 산수화를 잘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재 일본의 오쿠라[小倉] 문화재단에〈독조도 獨釣圖〉가 남아 있다.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예종실록〉을 편찬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 晉山世稿〉를 엮었다.

세조 때 〈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 때는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서례〉 편찬에 참여했다.

금양에 있을 때 자신의 경험과 견문을 토대로 지은 농업에 관한 저서로 〈금양잡록 衿陽雜錄〉이 있고, 당시 골계전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촌담해이 村談解頤〉가 있다. 그밖에 서거정이 편찬한 유고집 〈사숙재집〉 17권이 있다.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대원각사지비>라는 전액을 강희맹의 글씨로 새겼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비는 마모가 심하여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데, 다행히 비문의 내용이 《속동문선》에 실려 있다. 보물 제3호로 1963년 1월 21일 지정됐고 서울시 종로구 종로 99 탑골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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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과 강희맹의 그림

 

 

 

강희안

 

                     강희안,「고사도교도」, 견본채색, 22×22㎝,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초기의 문인화는 서화를 다루는 선비들의 논리가 문화를 선도했을 따름이지 회화적 변혁은 보이지 않았다.

미학 이론에 토대를 둔 창의성 표출이나 뚜렷한 회화이념이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시 서 화를 같이 하는 여흥이나 즉흥적인 유한의 감정을 즐겼다.

사군자와 같은 제한된 소재에 그쳤으며 양식에서도 문인화와 화원화의 구별이 없었다.

 

 

 

 

  강희안,「산수도」, 97 ×53㎝ ,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강희안,「고사관수도」,15세기 중엽, 23×16㎝, 국립중앙박물관

 

 

강희안의 대표작인「고사관수도」는 고작 2호 크기에도 못 미치는 아주 작은 수묵 소품이다.

이 작품의 양식을 놓고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는 논란이 없지 않았다.

논란은 절파의 선구였던 대진(戴進)과 활동무대가 다른 동시대 인물이란 점에서 발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파풍에 가깝다는 것이지 절파양식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든 고사관수도는 독특한 미학의 세계를 이루었다.

강희안이 품은 고결한 선비의 망중한과 심오한 천리가 담긴 작품이다.

 

 

 

 

 

강희맹

 

 

강희맹「독조도」15세기후반, 132×86, 도쿄국립받물관

 

 

문장에서는 형인 강희안보다 뛰어났지만 정치에 바빠 서화작품에는 형만큼 천착하지 못했다.

후일 에조 총수가 되어 도화원 제조를 겸임하면서 조선초기 화단을 이끌었다.

현존하는 작품은 이「독조도」가 유일하다.

화풍은 조선초기 양식을 반영해 복합적인 양상을 띄는 것이 특징이다.

근경만 압축시킨 화면 구성이 남송 원체화풍에 속한다는 평이 보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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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




1개요
                               

강희맹은 세종부터 성종대까지 6대에 걸쳐 관직생활을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문신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그림도 잘 그린 인물이다.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경국대전≫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그가 남긴 ≪금양잡록(衿陽雜錄)≫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농서이다.

선대부터 대대로 왕실과 인척 관계를 이루고 당대 훈신들과 혼인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세조와 성종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2가계와 성장

강희맹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으로, 1424년(세종 6) 강석덕(姜碩德)(姜碩德)과 세종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여동생인 청송(靑松) 심씨(沈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강희맹의 증조부는 강시(姜蓍)(姜蓍), 할아버지는 동북면 순무사(東北面巡撫使) 강회백(姜淮伯)(姜淮伯)이다. 강시(姜蓍)는 공양왕과 사돈 관계였으며, 강회백은 고려 말 유신들과 사상적 지향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개국 과정에서는 이성계 세력과 반대 입장을 취하여, 장(杖) 1백 대와 함께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상세정보 

  
그러나 개국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하윤 등이 태종이 실권을 잡으며 중용되자, 강회백 역시 이때에 중용되었으나, 비교적 이른 나이인 46세의 나이로 1402년(태종 2) 사망하였다. 상세정보 


강회백에겐 다섯 아들 강종덕(姜宗德)·강우덕(姜友德)· 강진덕(姜進德)·강석덕(姜碩德)·강순덕(姜順德)이 있었는데, 이중 강희맹의 아버지인 넷째 강석덕(姜碩德)은 심온(沈溫)의 사위가 되어 상세정보  세종과 동서지간이 됨으로써, 강희맹은 문종, 세조 등의 이종사촌이 되었다.


한편 강석덕의 동생 강순덕(姜順德)은 태종이 총애하던 이숙번의 사위가 되었다. 이런 혼인 관계는 정계에서 중요한 토대가 되기도 하였지만, 역으로 태종대 말에 이숙번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세종대 초반 심온이 숙청되었을 때 도리어 곤란한 처지가 되어, 강석덕과 순덕 모두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강희맹은 강석덕이 정치적으로 곤궁한 때인 1424년(세종 6)에 태어났는데, 3세도 되기 전에 강순덕의 양자로 입양되어 경기 일원에서 성장하였다.

생부 강석덕은 1428년(세종 10) 무렵부터 관직에 다시 진출하였고, 강희맹이 11살 때에 양근군사로 있으면서 희맹을 군학(郡學)에 보낼 것을 요청하였지만 양어머니의 반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상세정보 
하지만 늦게까지 학문에 입문하지 않고 있던 상태를 벗어나, 이듬해인 1435년(세종 17) 성유(省柔) 스님에게 배우기 시작하였고, 광교산(光敎山) 창성사(昌盛寺), 금주산(衿州山), 황산(黃山) 사나사(舍那寺) 등등 산사(山寺)에서 본격적으로 학업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1440년(세종 22) 이숙번이 사망하고, 상당한 재산이 양어머니 이씨에게 상속되었다. 이듬 해 1441년에 강희맹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의 친형인 강희안은 이 해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강희안은 3년 전인 1438년 사마시를 통과하였었는데, 이때부터 함께 합격한 서거정과 공부를 하였기에 왕래가 잦았고, 형을 통해 강희맹과 서거정 사이도 교분이 두터워졌다.

  
사마시에 합격한 후 양어머니 이씨가 강희맹에게 경상도 함양 지역의 농장을 포함한 일부 재산을 상속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강희맹은 함양에 잠시 체류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김종직 형제를 만나 평생을 지속하는 친분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사마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442년에는 안숭효(安崇孝)(安崇孝)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2년 후인 1444년 문과에 실패하였다. 이에 장인과 생부 강석덕이 모두 충순위(忠順衛)(忠順衛)를 거쳐서 음직(蔭職)으로 나아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강희맹은 사양하고, 1447년(세종 29) 24세의 나이로 문과 별시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좌주는 하연(河演)(河演)이었으며, 장원 급제를 축하하는 언문 편지를 수양대군이 보내기도 하였다.        


3강희맹 사안
                               

강희맹의 가계를 살피고 조선 전기 가족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강희맹사안(姜希孟事案)이라 불리는 논쟁이다. 이는 강희맹이 입양 후 한참이 지나 본종인 형 강희안의 후사가 끊기면서 그의 말년에 문제가 된 것이었다.

  
강희맹은 3세가 되기 전에 숙부인 강순덕이 후사가 없자 그 집안에 입양되었으며, 성장과정을 볼 때 이른 시기부터 숙부의 집에서 생장하였으며 숙모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형인 강희안이 후손이 없이 사망한 데에서 발생하였다.


강희안이 후손 없이 사망함으로써 생부인 강석덕의 후계가 끊기게 되자, 강희맹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강학손(姜鶴孫)(姜鶴孫)을 출계하여 강희안의 후사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를 두고 당시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1476년(성종 7) 6월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미 ≪경국대전≫에 입양에 관련된 조항이 있었으나, 강희맹의 사안 같은 경우에 대해서는 확실한 규정이 없었다.
이에 당시 의정부 육조당상과 전직(前職) 정승(政丞) 등 고위 관료들을 모아 이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는데, 당시 논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장자가 후사가 없이 죽었을 경우, 다른 사람에게 입후한 지자가 다시 자기 집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입장과, 이미 강석덕, 순덕 등 아버지들이 살아 있을 때 결정되었으며 양부를 계승해온지가 오래되었는데 이제 와서 이를 파하고 본종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정리상 불가하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희안이 장자로서 본종인데, 강희맹이 자신의 둘째 아들로 후사를 잇게 한 것은 대종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닌가 라는 점이었다.

  
영의정 정창손(鄭昌孫)(鄭昌孫) 등은 첫째와 둘째 지점에 있어서, 강희안이 후사없이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본가에 돌아와 제사를 받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둘째아들인 학손으로 하여금 희안을 잇게 하는 것은 입후를 중히 여기고 본종을 가볍게 여기는 처사이기에 부당하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우참찬(右參贊) 어유소(魚有沼)(魚有沼)·공조 판서(工曹判書) 김교(金嶠)(金嶠)·형조 판서(刑曹判書) 정문형(鄭文炯)(鄭文炯) 등은 첫번째 논점에 있어서 입후 관계를 파하고 본종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기는 하였으나, 정리상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바꾸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한편 병조참판 유권(柳睠)(柳睠) 등은 첫번째 논점에서 희맹이 입후한 것은 양가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의 일이고, 이미 부자의 윤(倫)을 정하였으므로, 희안에게 자식이 없다고 하여 귀종하는 것은 부당하며, 두번째 지점에서도 희맹의 둘째아들 학손이 대종을 잇는 것이 타당한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왕은 영의정 정창손 등의 의견이 옳다 하여 이에 따르기로 하였다. 다만 강희맹의 경우 입후한지가 매우 오래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본종으로 돌리는 것이 정리상 괜찮을까 라는 지점이 문제시되기는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창손 등의 의견에 따라 입양 관계를 파하고 본종으로 돌아갈 것으로 정한 것은, 대종을 중히 여겨야 한다는 입장을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이후 ≪경국대전≫ 예전(禮典) 입후조(禮典立後條)에 본가에 후사(後嗣)가 없으면 계후(繼後:양자로서 대를 이음)를 면하고 본가에 돌아가 봉사(奉祀)하라고 하는 파계귀종(罷繼歸宗) 규정으로 반영되었다고, 이는 ≪대전통편≫에까지 이어진다.        


4관직생활 전반기
                               

강희맹은 24세 장원급제 후에 종부시의 주부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후 감찰(監察)과 좌랑(佐郞)을 거쳐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강희맹은 관직 진출 후 3년도 되지 않아서 예조좌랑에 오른 것으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승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종 즉위년 11월 이숙번 재산 상속 문제로 분쟁이 생기면서, 그의 사위이자 강희맹의 양부인 강순덕이 의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 되어서 징계되었다. 이 때문에 강순덕에게 상속되었던 재산도 이숙번의 처이나 강희맹의 양외조모인 정씨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이러한 분쟁은 강희맹의 관로에도 영향을 미쳐 잠시 위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453년 10월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세조의 이종사촌이었던 강희맹은 자신의 품계를 뛰어넘어 더 높은 직책인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며, 세조가 즉위하면서 종형(從兄)인 강맹경(姜孟卿)은 좌익 공신(佐翼功臣) 2등에, 강희안과 강희맹 형제도 함께 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이렇게 세조의 정치적 성장과 함께 강희맹의 정치적 입지도 단단해 지는 듯하였으나, 친형인 강희안이 단종복위사건과 연루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고, 강희맹도 함께 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당시 세조의 비호로 화를 면하였으며, 집현전 직(集賢殿直)을 거쳐 판통례문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당상관으로 직전 단계였다. 이후 강희맹은 정식 승진이 아닌 방법으로 당상관인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전문시(箋文試)(箋文試)에서 우등한 성적을 거둔 것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발영시(拔英試)등준시(登俊試) 등에서 연이어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고위직에 손쉽게 진출할 수 있었다.

  
1463년에는 진하사로 중국 사행길에 다녀왔고, 이후 세자빈객, 예조판서를 거쳐 1467년에는 형조판서로 특배되었다. 세조 말년에는 도적이 창궐하였는데, 예종대에는 강희맹은 이와 관련한 사목 작성에 두 번이나 간여하기도 하였다.    

    
세조대 강희맹의 관로가 매우 순탄하고 빠르게 나아간 데에는, 세조와의 인척관계 뿐만 아니라, 세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466년 세조의 병이 깊었을 때 밤낮없이 간병에 힘씀으로써, 세조가 병에서 회복하며 그의 공을 각별히 인정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내게 제일의 신하 셋이 있는데, 한계희(韓繼禧)는 미묘(微妙)함이 제일이고 노사신(盧思愼)은 활달(豁達)함이 제일이고 강희맹은 강명(剛明)함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위는 후대에 ‘국왕에게 아첨한다’는 평가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5관직생활 후반기
                               

세조대의 관직의 경험을 탄탄히 한 이후, 예종과 성종의 즉위 과정에서 익대공신과 좌리공신에 각각 봉해지면서 훈신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게 된다. 다만 익대공신으로 지정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아서, 평소 남이와 불편한 관계였던 강희맹은 남이 사건의 조사 과정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공신으로 지정받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직접 상소를 올려 포함시켜 달라고 하였으나 거부되었고, 이후 예종이 재검토해서 3등 공신으로 추록하였던 것이다.    

    
강희맹이 익대공신 3등에 추록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신숙주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강희맹은 신숙주의 아들인 신면(申㴐)의 딸과 자신의 아들 강학손을 혼인시켰기에 인척관계였다.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이시애의 난(李施愛-亂) 이후로 추정된다.

  
성종 즉위 후에는 좌리공신 3등에 봉해지기도 하였는데, 이보다 더 의미있는 점은 성종대 내내 강희맹이 지속적으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직하였다는 점이었다. 즉 강희맹은 공신의 지위에 덧붙여 성종을 수시로 접할 수 있는 위치를 유지함으로써, 세조대 못지않은 신뢰를 성종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이는 두가지 사례에서 확인이 되는데, 성종은 익명의 투서로 강희맹을 공격하는 바가 있어도 늘 “나는 경을 의심하지 않고 경은 나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강희맹은 좌찬성(左贊成)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고, 그의 글을 모아서 서거정에게 문집을 간행토록 하였고, ≪사숙재집(私淑齋集)≫으로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신뢰의 한 단면이다.

  
한편 연산군이 어린 시절에 강희맹의 집에서 자랐다는 점이 이를 반영한다.. 당시 왕비 윤씨를 빈으로 강등시키려는 논의가 전개되는 등 정국이 어수선 하였기에, 병치료를 핑계로 원자인 연산군을 강희맹의 집에서 지내도록 하였다.        
이는 성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주위에 결혼관계 등으로 연결된 인적 네트워크가 상당히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에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강희맹은 성종 14년(1483) 2월 18일 병으로 죽었고, 향년(享年)이 62세이었다. 아들은 강구손(姜龜孫)(姜龜孫)·강학손(姜鶴孫) 둘이 있었다.


6강희맹의 업적과 금양잡록
                               

강희맹의 관직 경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예조에서의 경력이었다.

그에게는 “예조가 본관(本館)이나 다름없다”라고 평가될 정도였고, 양친의 복상 중인 상황에서도 최항이 ≪경국대전≫의 편찬과정에서 禮典의 편집을 위하여 강희맹의 기복(起復)이 필요하다고 건의할 정도였다. 따라서 성종 5년 ≪국조오례의≫를 간행하면서 편찬 책임을 맡고 서문을 작성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이외에도 당대 굵직굵직한 각종 편찬사업에서 활약하였다.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서삼경의 언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성종 때에는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등의 편찬에 모두 참여했다. 이 책들이 조선 초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정수라는 점에서, 그 참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강희맹은 형인 강희안과 마찬가지로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다고 하는데, 일본의 오구라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 아버지와 강지돈(姜知敦)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체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당대의 문장가로 언급할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났고,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고 전한다.

  
강희맹의 저술활동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은 ≪금양잡록≫이다. 이는 세종대 편찬된 ≪ 농사직설(農事直說)(農事直說)≫과 함께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농서다.

특히 ≪금양잡록≫은 ≪농사직설≫과 달리 관찬이 아니라 개인이 편찬하였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금양’은 경기도 금양현, 즉 지금의 시흥 지역으로서, 이곳에서 저자가 체험하고 보고 들은 것을 모아 저술하였다. 농가곡품(農家穀品)·농담(農談)·농자대(農者對)·제풍변(諸風辨)·종곡의(種穀宜)·농구(農謳) 등 총 6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물의 품종에서부터 농사법, 농사 정책, 풍수해 대비에 관한 것, 농사에 적합한 토양 등을 서술하였다.


또한 생활 주변에서 채집한 농요를 모아 정리한 농구십사장은 농민들의 애환과 당시 농정(農政)의 실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인조 때 신속(申洬)이 ≪농가집성(農家集成)≫을 만들 때, ≪농사직설≫·≪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四時纂要抄)≫와 함께 기본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집필자 : 이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