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안동 임청각과 석주 이상룡,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

道雨 2018. 5. 12. 12:16




[임기상의 역사산책 68]석주 이상룡, 식솔을 끌고 항일운동에 뛰어들다


임청각 바로 앞에 중앙선 철로가 지나가고 있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일제,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을 훼손하다

보물 제182호인 조선시대의 목조 건물 임청각(臨淸閣).
설립 당시에는 99칸 규모였지만 마당에 중앙선 철로가 지나가면서 지금은 70칸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 집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배출되자,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문중을 중심으로 안동시민들이 반발하자 집 일부를 허물고 마당으로 철길을 내버렸다.
철길이라면 대개 직선이 원칙인데, 일제는 이 집을 훼손하려고 10여 km를 더 돌아 3개의 터널을 뚫고 옹벽과 축대를 쌓아 두 번이나 급하게 휘면서 마당으로 철로를 뚫은 것이다.
이 때문에 바로 앞에 놓인 낙동강과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잃어버렸다.

임청각 전경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 집에서 태어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일제가 이를 갈 만 하다.

신돌석 장군 휘하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한 이상동,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이봉희, 만주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이승화, 만주 유하현 경학사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 일제의 팽창에 실망해 자결한 이준형, 신흥무관학교 자금 조달과 비밀결사 신흥사에서 활약한 이형국, 서로군정서 특파원을 지낸 이광민, 압록강 연안의 일본 경찰 주재소와 세관을 습격한 이병화가 모두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이들을 이끈 인물은 이 집안의 종손이자 주인인 석주 이상룡이다.
이상룡은 고성 이씨의 종손으로 퇴계학의 적통을 계승한 유학자이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자 가야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나 한계를 깨닫고 만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그를 따라 50여 가구가 서간도로 망명길에 올라 치열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이 집안에는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가 9명이 배출된다.

고성 이씨의 가계도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석주 이상룡, 이회영 집안을 따라 재산을 정리하고 서간도로 망명하다

우당 이회영 일가가 압록강을 건넌 직후인 1911년 1월 5일.
이상룡은 임청각 내 군자정 옆의 연못을 지나 언덕 위 가묘로 향했다.
선조들의 위패에 살아 생전 마지막이 된 절을 올렸다.

저녁에 집을 나선 이상룡은 경성에 도착해 우강 양기탁을 만나 독립운동 전략에 대해 논의한 뒤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떠났다.
1월 25일 신의주역에 가족들이 도착했다.
맏아들 이준형이 맨 앞에 서고 맨 뒤에는 동생 이봉희 부자가 부녀자와 아녀자들을 보호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은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전 재산을 정리해 서간도로 망명했다.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 일가가 집단 망명을 위해 신의주에 집결한 것이다.
이틀 후 이상룡 일가는 발거(썰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현에서 마차 두 대를 타고 1차 집결지인 횡도촌에 도착했다.
횡도촌에는 처남인 백하 김대락 일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망명객들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집결해 한인촌을 만들었다.
1911년 4월 추가가의 뒷산인 대고산에 수백여 명의 망명객들이 모여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이주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기관으로 '경학사'를 조직했다.
경학사 대표에는 이상룡이 추대되었다.
경학사는 취지서를 통해 "아아~ 사랑할 것은 조선이요, 슬픈 것은 한민족이로구나"고 천명하며,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 신흥무관학교 설립하고, 서로군정서 지휘하다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다

경학사가 중심이 되어 통화 인근의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서간도 일대에 독립열이 고조되자 일종의 임시정부인 군정부가 조직됐다.
군정부 총재로 취임한 이상룡은 상해에서 탄생한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름을 '서로군정서'로 바꾸고 상해임정의 지도를 받아 무장독립투쟁을 벌여 나갔다.


상해임시정부 청사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서로군정서는 2개 연대를 두었고, 그 아래에 6개 대대를 조직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나갔다.

한편, 상해임시정부는 1925년 여름 이상룡에게 초대 국무령으로 부임해달라고 요청했다.
내각책임제의 국무령이면 지금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상룡은 1년도 안돼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온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계파 갈등, 내분을 보고 환멸을 느낀 것이다.
 

◈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혼란에 빠진 서간도…이상룡, 절망 속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다


만주군벌인 장작림의 부대. 일본군에게 밀리자 주민들을 상대로 강도짓을 벌인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독립운동은 일대 위기에 처했다.
일본군의 토벌도 문제지만,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과 후퇴하는 중국 군벌 휘하의 군인들의 행패가 문제였다.
중국군 패잔병들은 일본군에 쫒기면서 민가를 뒤지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 와중에 숱한 독립운동가들과 이주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패잔병들은 조선인 마을에 몰려와 "너희가 왜 일본을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뺏기게 하느냐?"며 "우리도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일본의 만주 침략과 동지들의 희생을 지켜본 이상룡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 병석에 누웠다.
이상룡이 병중이란 소식을 듣고 안동에서 아우 이상동이 찾아왔다.
귀국을 권하는 동생에게 이상룡은 "나 죽기 전에는 여기를 못 떠난다.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나만 들어갈 수 없다. 나 죽고 나거든 남은 가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이어 아들 손자 등 가족들 앞에서 유언을 남겼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서는 안 된다. 우선 이곳에 묻어두고서 기다리도록 하거라"
석주 이상룡은 1932년 6월 15일 길림성 서란현에서 74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이상룡 일가의 망명과 귀국길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임종 엿새 후 이상룡 후손들은 귀국을 서둘렀다.
일행은 70여 명이었다.
망을 보며 조심스럽게 관을 모시고 길림으로 가다 또 수백 명의 중국 패잔병들을 만나 온갖 수모를 겪었다.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와 광복된 조국 땅에 다시 모시기를 기약하며 초상을 치렀다.
다들 관이 땅에 묻히는 것을 보면서 "이 어른이 무슨 영이 있는 모양이야~"라고 탄식했다.

후손들은 천신만고 끝에 길림에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경성을 들른 뒤 삼복더위에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문중 사람들이 대전과 김천, 예천까지 마중나왔다.
안동역에는 100여 명의 족친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일본 경찰이 알려준 것이다.


◈ 이상룡 후손들, 일본 경찰의 감시와 가난 속에서 역경을 이겨내다

26살에 고성 이씨 종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이상룡 선생의 손자 며느리인 허은 여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라의 운명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친정도 시가도 양쪽 집안은 거의 몰락하다시피 되어 있었다. 양가 일찍 솔가하여 만주벌판에서 오로지 항일투쟁에만 매달렸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 며느리인 허은 여사. 서거하기 전에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남겼다.



허은 여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통한이 뼈에 사무친 것은 양가가 몰락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국인 모두 몰락했다면 그것은 결코 통한이 될 수 없었다.

다시 그녀의 회고를 들어보자.
"그때 친일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좋은 학교에서 최신식 공부도 많이 했더라. 그들은 일본, 미국 등에서 외국유학도 하는 특권을 많이 누렸으니 훌륭하게 성공할 수 밖에. 그러나 우리같이 쫓겨다니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자손들의 교육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오로지 어른들의 독립투쟁, 그것만이 직접 보고 배운 산 교육이었다. 목숨을 항상 내놓고 다녔으니 살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그 허허벌판 황야에 묻힌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데...불모지에 잡초처럼 살았지"

이상룡 후손들은 귀국 후에는 일본 형사들한테 들볶였다.
1942년 9월에는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이 유시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일제가 싱가폴을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일본 경찰이 계속 따라다니며 변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기 때문에 모두들 가난에 시달리고, 자식들도 교육비가 없어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민주화가 되면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다.
이상룡 집안에서만 3대에 걸쳐 9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형제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와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당숙인 이승화 선생이 훈장을 받았다. 
이상룡 선생의 매부 박경종 선생과 처남 김대락 선생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상룡 선생의 겹사돈인 허씨 집안에서는 왕산 허위 선생과 그의 형제인 허훈. 허겸, 아들 허영 선생에게 훈장이 수여됐다.

더 큰 경사가 이상룡 집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룡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1990년 9월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되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96년 서울 현충원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중국과 국교가 체결되자, 이상룡 후손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유해를 봉환하게 되었다.
1990년 9월 13일 오후 4시, 김포공항 연도에 1,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묵도를 하며 대환영을 했다.
커다란 태극기에 덮인 이상룡 선생의 유해와 위엄에 찬 영정을 보자, 후손들 모두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2일간 참배객들의 조문을 받고, 25일 고향 안동으로 유해를 모셔갔다.
경기도와 충청도, 경상북도를 지나가는 연도에는 수많은 인파와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묵도하며 맞이했다.
각 도계와 안동 시계를 들어설 때는 마중 나온 각급 기관장들의 엄숙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고택 임청각에서 열린 안치 행사에는 안동 시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열이레 동안 한 많은 넋을 달래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된 후, 6년 후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옮겨졌다.

이상룡 선생의 영혼이 있다면, 광복된 나라에서 내 백성이 반겨주는 모습을 보고, 나라 빼앗겼던 설움이 다 풀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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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9. 안동 임청각

독립운동가 집안의 비장함, 집 안에 조상 위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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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8·15 경축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 촛불혁명으로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리고 첫 번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오늘, 그 의미가 유달리 깊게 다가옵니다.


국민주권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닙니다. 백 년 전인 1917년 7월, 독립운동가 14인이 상해에서 발표한 대동단결 선언’은 국민주권을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천명했습니다.

경술국치는 국권을 상실한 날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주권이 발생한 날이라고 선언하며, 국민주권에 입각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했습니다.

마침내 1919년 3월, 이념과 계급과 지역을 초월한 전 민족적 항일독립운동을 거쳐, 이 선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국민주권은 임시정부 수립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의 이념이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려는 선대들의 염원은 백 년의 시간을 이어왔고, 드디어 촛불을 든 국민들의 실천이 되었습니다. 


광복은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석 자까지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자유와 독립의 열망을 지켜낸 삼천만이 되찾은 것입니다. 민족의 자주독립에 생을 바친 선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는 자식의 옷을 기운 어머니도, 일제의 눈을 피해 야학에서 모국어를 가르친 선생님도, 우리의 전통을 지켜내고 쌈짓돈을 보탠 분들도,모두가 광복을 만든 주인공입니다.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습니다. 직업도, 성별도, 나이의 구분도 없었습니다. 의열단원이며 몽골의 전염병을 근절시킨 의사 이태준 선생, 간도참변 취재 중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 선생, 무장독립단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 과학으로 민족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과학자 김용관 선생, 독립군 결사대 단원이었던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 우리에게는 너무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의 무대도 한반도만이 아니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연해주와 만주, 미주와 아시아 곳곳에서도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의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항일독립운동의 이 모든 빛나는 장면들이 지난 겨울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리고 우리 동포들이 있는 세계 곳곳에서, 촛불로 살아났습니다. 우리 국민이 높이든 촛불은 독립운동 정신의 계승입니다.

위대한 독립운동의 정신은 민주화와 경제 발전으로 되살아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하고 땀 흘린 모든 분들, 그 한 분 한 분 모두가 오늘 이 나라를 세운 공헌자입니다.


오늘 저는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그리고 저마다의 항일로 암흑의 시대를 이겨낸 모든 분들께, 또 촛불로 새 시대를 열어주신 국민들께, 다시금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저는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 날이 민족과 나라 앞에 닥친 어려움과 위기에 맞서는 용기와 지혜를 되새기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존경하는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경북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아흔 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 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명예뿐인 보훈에 머물지도 말아야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합니다. 친일 부역자와 독립운동가의 처지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더라는 경험이 불의와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하겠습니다. 최고의 존경과 예의로 보답하겠습니다. 독립운동가의 3대까지 예우하고 자녀와 손자녀 전원의 생활안정을 지원해서 국가에 헌신하면 3대까지 대접받는다는 인식을 심겠습니다. 


독립운동의 공적을 후손들이 기억하기 위해 임시정부기념관을 건립하겠습니다. 임청각처럼 독립운동을 기억할 수 있는 유적지는 모두 찾아내겠습니다.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끝까지 발굴하고, 해외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전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정부는 대한민국 보훈의 기틀을 완전히 새롭게 세우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은 나라의 이름을 지키고, 나라를 되찾고, 나라의 부름에 기꺼이 응답한 분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습니다. 그 희생과 헌신에 제대로 보답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젊음을 나라에 바치고 이제 고령이 되신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겠습니다. 살아계시는 동안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의 치료를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 참전명예수당도 인상하겠습니다. 

유공자 어르신 마지막 한 분까지 대한민국의 품이 따뜻하고 영광스러웠다고 느끼시게 하겠습니다. 순직 군인과 경찰, 소방공무원 유가족에 대한 지원도 확대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자긍심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보훈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하겠습니다. 애국의 출발점이 보훈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지난 역사에서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지 못해 국민들이 감수해야 했던 고통과도 마주해야 합니다.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고통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강제동원의 실상이 부분적으로 밝혀졌지만 아직 그 피해의 규모가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밝혀진 사실들은 그것대로 풀어나가고, 미흡한 부분은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마저 해결해야 합니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풀리면 남북이 공동으로 강제동원 피해 실태조사를 하는 것도 검토할 것입니다.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이 많습니다. 재일동포의 경우 국적을 불문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고향 방문을 정상화할 것입니다. 지금도 시베리아와 사할린 등 곳곳에 강제이주와 동원이 남긴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그 분들과도 동포의 정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해외 동포 여러분, 오늘 광복절을 맞아 한반도를 둘러싸고 계속되는 군사적 긴장의 고조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분단은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힘으로 우리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던 식민지시대가 남긴 불행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스스로 우리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커졌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도, 분단 극복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반도의 시대적 소명은 두말 할 것 없이 평화입니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통한 분단 극복이야말로 광복을 진정으로 완성하는 길입니다. 

평화는 또한 당면한 우리의 생존 전략입니다. 안보도, 경제도, 성장도, 번영도 평화 없이는 미래를 담보하지 못합니다.

평화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없으면 동북아에 평화가 없고, 동북아에 평화가 없으면 세계의 평화가 깨집니다. 지금 세계는 두려움 속에서 그 분명한 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할 길은 명확합니다. 전 세계와 함께 한반도와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입니다. 정부는 현재의 안보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굳건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미국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안보위기를 타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안보를 동맹국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정부의 원칙은 확고합니다. 대한민국의 국익이 최우선이고 정의입니다.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은 안 됩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입니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북핵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와 미국 정부의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평화적 해결 원칙이 흔들리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한층 강화할 것입니다. 국방력이 뒷받침되는 굳건한 평화를 위해 우리 군을 더 강하게, 더 믿음직스럽게 혁신하여 강한 방위력을 구축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도록 군사적 대화의 문도 열어놓을 것입니다. 


북한에 대한 제재와 대화는 선후의 문제가 아닙니다. 북핵문제의 역사는 제재와 대화가 함께 갈 때 문제해결의 단초가 열렸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시험을 유예하거나 핵실험 중단을 천명했던 시기는 예외 없이 남북관계가 좋은 시기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북미, 북일 간 대화도 촉진되었고, 동북아 다자외교도 활발했습니다.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 문제의 주인은 우리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북핵문제 해결은 핵 동결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북한이 추가적인 핵과 미사일 도발을 중단해야 대화의 여건이 갖춰질 수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와 압박의 목적도 북한을 대화로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지, 군사적 긴장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도 우리와 미국 정부의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다. 


북한 당국에 촉구합니다. 국제적인 협력과 상생 없이 경제발전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북한에게는 국제적 고립과 어두운 미래가 있을 뿐입니다. 수많은 주민들의 생존과 한반도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리게 됩니다. 우리 역시 원하지 않더라도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더욱 높여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각 도발을 중단하고 대화의 장으로 나와, 핵 없이도 북한의 안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돕고 만들어 가겠습니다. 미국과 주변 국가들도 도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천명합니다.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 않습니다. 흡수통일을 추진하지도 않을 것이고, 인위적 통일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통일은 민족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합의하는 평화적, 민주적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북한이 기존의 남북합의의 상호이행을 약속한다면, 우리는 정부가 바뀌어도 대북정책이 달라지지 않도록, 국회의 의결을 거쳐 그 합의를 제도화할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밝힌 바 있습니다. 남북간의 경제협력과 동북아 경제협력은 남북공동의 번영을 가져오고, 군사적 대립을 완화시킬 것입니다.

경제협력의 과정에서 북한은 핵무기를 갖지 않아도 자신들의 안보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쉬운 일부터 시작할 것을 다시 한 번 북한에 제안합니다. 이산가족 문제와 같은 인도적 협력을 하루빨리 재개해야 합니다. 이 분들의 한을 풀어드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산가족 상봉과 고향 방문, 성묘에 대한 조속한 호응을 촉구합니다. 


다가오는 평창 동계올림픽도 남북이 평화의 길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남북대화의 기회로 삼고, 한반도 평화의 기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동북아 지역에서 연이어 개최되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2020년의 도쿄 하계올림픽, 2022년의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한반도와 함께 동북아의 평화와 경제협력을 촉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저는 동북아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이 기회를 살려나가기 위해 머리를 맞댈 것을 제안합니다. 특히 한국과 중국, 일본은 역내 안보와 경제협력을 제도화하면서 공동의 책임을 나누는 노력을 함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뜻을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우리는 한일관계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일관계도 이제 양자관계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사와 역사문제가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지속적으로 발목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새로운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 셔틀외교를 포함한 다양한 교류를 확대해 갈 것입니다. 당면한 북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서도 양국 간의 협력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일관계의 미래를 중시한다고 해서 역사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을 때 양국 간의 신뢰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동안 일본의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양국 간의 과거와 일본의 책임을 직시하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 노력들이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에 기여해 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일본의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일관계의 걸림돌은 과거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문제를 대하는 일본정부의 인식의 부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한일 간의 역사문제 해결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민적 합의에 기한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 진실규명과 재발방지 약속이라는 국제사회의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 원칙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일본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해외 동포 여러분,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내년 8.15는 정부 수립 70주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광복은, 외세에 의해 분단된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보훈은, 선열들이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국민주권을 실현하여 국민이 주인인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준비합시다. 그 과정에서, 치유와 화해, 통합을 향해 지난 한 세기의 역사를 결산하는 일도 가능할 것입니다. 

국민주권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보수, 진보의 구분이 무의미했듯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세력으로 나누는 것도 이제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역사의 유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역사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며, 이 점에서 개인의 삶 속으로 들어온 시대를 산업화와 민주화로 나누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 없는 일입니다. 

대한민국 19대 대통령 문재인 역시 김대중, 노무현만이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모든 대통령의 역사 속에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치유와 화해, 통합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 현충일 추념사에서 애국의 가치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제 지난 백년의 역사를 결산하고, 새로운 백년을 위해 공동체의 가치를 다시 정립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정부의 새로운 정책기조도 여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보수나 진보 또는 정파의 시각을 넘어서 새로운 100년의 준비에 다함께 동참해 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우리 다함께 선언합시다.

우리 앞에 수많은 도전이 밀려오고 있지만,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헤쳐 나가는 일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에서 최고라고 당당히 외칩시다. 담대하게, 자신 있게 새로운 도전을 맞이합시다. 언제나 그랬듯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이겨 나갑시다.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완성합시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저력을 확인합시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독립유공자들께 깊은 존경의 마음을 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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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8151433001&code=940100#csidx5e53397e1b199239fe32616593de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