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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장인이 993년 만든 고려청자 항아리 국보 됐다

道雨 2019. 5. 2. 14:15




고려 장인이 993년 만든 고려청자 항아리 국보 됐다




군위 인각사 공양구·'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은 보물 지정


청자 순화4년(淳化四年)명 항아리
청자 순화4년(淳化四年)명 항아리[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고려 장인이 약 1천년 전 선대 임금 제사에 사용하려고 만든 고려청자 항아리국보 제326호가 됐다.

문화재청은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제237호 '청자 순화4년(淳化四年)명 항아리'를 ,보물 지정 56년 만에 국보로 승격했다고 2일 밝혔다.


높이가 35.2㎝이고, 문양이 없는 이 항아리는, 바닥면 굽 안쪽에 '순화사년 계사 태묘제일실 향기 장최길회 조'(淳化四年 癸巳 太廟第一室 享器 匠崔吉會 造)라는 글씨를 새겼다.

순화는 송 태종이 사용한 네 번째 연호로, 순화4년은 993년이다. 따라서 문구는 '993년에 태묘 제1실 향기(享器·제기)로서 장인 최길회가 만들었다'를 뜻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황해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태묘는 송나라 제도를 참고해 992년 12월 1일에 조성했고, 제1실에는 태조 왕건과 그의 왕비 신주를 봉안했다.

1910년 세상에 처음 공개됐다고 알려진 항아리는, 발굴 경위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소장가들을 거쳐 이화여대 박물관이 1957년에 구매했다.


청자 순화4년(淳化四年)명 항아리 바닥
청자 순화4년(淳化四年)명 항아리 바닥[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초기 청자 중 형태가 크며 유사한 예가 없는데, 입구가 넓고 곧게 섰다. 표면에 아주 작은 기포, 유약이 굳으면서 생긴 미세한 금인 빙렬(氷裂), 긁힌 흔적이 있다. 바탕흙인 태토(胎土)는 유백색으로 품질이 우수한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북한 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가 1989∼1990년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 2호 가마터에서 출토한 '순화3년(淳化三年)명 고배(高杯·굽다리접시)'와 다른 파편에서도 확인된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학계에서는 한때 이 항아리를 청자가 아닌 백자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으나, 지금은 청자가 맞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지난해 이 항아리에 대해 보존처리를 마쳤고, 이화여대 박물관은 작년 12월 기획전을 통해 공개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초기 청자 가운데 드물게 큰 항아리로, 제작 연도와 용도를 비롯해 사용처와 제작자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며 "청자 제작 시기를 유추하고, 발달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한편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과 금속활자로 찍은 서적인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對策) 권5∼6'은 각각 보물로 지정됐다.

경북 군위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사찰로, 일연이 삼국유사를 완성한 장소여서 유명하다.


공양구 18점은 2008년 발굴조사 중, 건물터 동쪽 유구(遺構·건물의 자취)에서 발견됐다.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공예품 11점과 청자 7점으로 구성됐다.

금속공예품으로는 사찰에서 사용하는 의례 용품인 금동사자형 병향로(柄香爐), 향합(香盒·향을 담는 뚜껑이 있는 그릇), 정병(淨甁·목이 긴 물병), 청동북(金鼓), 청동발(靑銅鉢)과 뚜껑, 불교에서 천상의 새를 상징하는 가릉빈가를 표현한 청동상이 나왔다. 나말여초(羅末麗初) 금속공예품 중에는 희귀한 출토품이다.

청자는 8세기 말∼10세기 초에 당나라 월주(越州)에서 만들었다고 추정되며, 포개진 채 한꺼번에 발견됐다.



군위 인각사 출토 청자
군위 인각사 출토 청자[문화재청 제공]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은 원나라 유인초(劉仁初)가 당시 시행된 과거시험에서 합격한 답안을 주제별로 분류해 1341년 새롭게 펴낸 책이다.

보물 제2023호가 된 책은 총 72권 중 권5∼6 부분 4권 4책이다. 그중 2권 2책은 고려시대 후기 판본이고, 나머지 2권 2책은 조선시대 초기에 찍었다. 고려본과 조선본은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고려본은 판심(版心·책장의 안쪽 부분) 규격이 조선본과 다르고, 왕실 구성원을 높일 때 표기하는 방식도 조선본과 차이가 난다.


또 고려본은 '임'(壬)과 '안 성'(安 成)이라고 인출한 권차(卷次)와 편자(編者) 표기를 조선본은 '임'(任)과 '성안'(成案)으로 찍었다.

고려본은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이라는 책이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유입됐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고려 금속활자로 제작한 드문 서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1403년 주조한 계미자(癸未字)를 바탕으로 간행한 조선본도 금속활자 변화상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psh5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