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용공(조작) 사건

김대중 노벨상 받은 지가 언젠데... 사법부 아직도 왜 이러나

道雨 2020. 6. 1. 10:46

 

김대중 노벨상 받은 지가 언젠데... 사법부 아직도 왜 이러나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재일교포 김정사 간첩조작사건

 


국군 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 <대공30년사>에 따르면, 1977년 4월 15일 부산대생 재일교포 유영수는 같은 유학생 원영삼의 이모부인 박아무개 육군 준장에게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불온서신'(이적표현물)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 '불온서신'을 읽어본 박아무개 준장은 곧 보안사에 신고했고, 유영수는 즉시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체포된다.



그러나 2011년 이 사건에 대한 재심 판결문을 보면, 당시 '불온서신'의 "내용이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적행위를 할 목적도 없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보안사 수사관들은 유영수 동생인 한양대생 재일교포 유성삼도 1977년 4월 17일 검거하고 가택수색을 한다. 이때 수사관들은 유성삼의 하숙집에서 이른바 '불온서적'인 김지하의 <법정투쟁기>, 김명식의 시 "10장의 역사연구",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장준하의 <사상계> 등을 발견한다.

보안사는 이 책자들을 유성삼에게 준 사람이 김정사라는 유성삼의 진술에 따라, 1977년 4월 21일 서울대에 다니고 있던 재일교포 김정사를 체포한다. 또한 유성삼과 같은 과에 다니고 있던 재일교포 손정자도 1977년 5월 5일 검거한다.



당시 보안사에 따르면, 김정사는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아래 한민통, 1989년부터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변경, 아래 한통련) 간부 '임계성'에게, 유영수는 재일공작지도원 '이시다'에게, 그리고 유성삼은 형 '유영수'에게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고문하다 죽으면 한강에 흘려보내' 위협



지난 2007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김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1977년 4월 1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집 현관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이 '네가 김정사야? 너 유성삼 알고 있지?'하고 물어, 알고 있다고 하자, 두 대의 승용차 중 한 대에 태웠는데, 다른 승용차에는 유성삼이 타고 있었으며, 차에 타자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너 북괴에 몇 번 갔다 왔어?', '이 빨갱이 새끼야' 등의 욕을 했다."



그리고 그 후 김정사는 강제로 보안사에 끌려갔고, 보안사에서 겪은 고문조사 경험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서빙고분실 2층에서 수사관들에 의해 주먹과 몽둥이 등으로 뺨, 얼굴, 허벅지, 엉덩이 구타, 다리에 몽둥이 끼운 채 밟기, 수건을 덮은 채 얼굴에 물 붓기, 엄지손가락에 전화선 연결해 전기고문, 엘리베이터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해 왼쪽 고막이 파열되었고, 지금까지 다리가 불편한 상태다."



김정사는 지난 2007년 국방부과거사위원회에서도 당시 보안사에 연행된 후 겪은 고초를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전화기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손으로 돌리는 형태이고, 양쪽으로 선이 두 개 있는 것을 양손의 엄지손가락에 감아서 전기고문을 받았는데, 그 상처는 한 달가량이 지나면 사라져서 재판과정에서는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얼굴에 수건을 얹고 주전자로 물을 부어 숨을 못 쉬게 하는 물고문도 받았으며, 고문을 매일 받은 것은 아니고, 제가 쓴 진술서가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일 등이 있을 때에 가해졌다.



한번은 '너 엘리베이터 타볼래?'하면서 다른 방으로 끌고 갔는데, 그 엘리베이터는 4개의 쇠로만 연결되어 받침만 있었고 위아래로 연결된 것으로 '이 엘리베이터는 북괴 간첩을 고문할 때 쓰는 것인데, 고문하다가 죽으면 시체를 한강에 흘려보내 신원불명의 시체로 처리된다'고 위협했고, 하루는 수사관이 제 뺨을 때려 왼쪽 고막이 파열되었고, 의사가 보안사에 와서 치료를 했고, 60세 정도로 보이는 박모라는 일제 특고 경찰이었다는 사람한테 전기고문, 물고문 외에, 다리 사이에 나무를 끼고 무릎을 꿇게 한 상태에서 무릎을 발로 밟히는 고문도 당했다."



1977년 서울고등법원 첫 공판에서 김정사는 변호인 김옥봉이 수사기관에서 자백한 사유를 묻는 질문에 "수사기관에서 그렇게 진술한 사실이 없으며, 고문에 못 이겨 조서 말미에 무인을 찍었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당시 변호인 이병용이 김정사에게 "보안사에서 조사받을 때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조사받았나?"라고 묻자 "(조사관들이) 전기고문, 물 먹인 몽둥이로 때렸다"라고 진술했다.



당시 상고이유서에서도 김정사는 "(그때) 고문에 견디지 못해서 허위자백을 했고, 검찰에서는 경찰조사관(보안사 조사관)이 입회하고 협박해서 허위자백을 했다"고 증언했다.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에서 김정사는 1977년 당시 재일지도원 임계성에 대해 "보안사에 연행되어 수사관들이 일본에서 만난 사람을 다 적으라고 해 일본에서 만난 사람을 적었는데, 유학 오기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임계성이라는 이름을 적었고, 임계성과는 두 차례 정도 만난 것은 사실이나 강연회에 참석해 임계성의 강연을 들은 뒤 묻고 싶은 바가 있어 임계성을 찾아갔었고,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만나자고 해 나중에 만났지만, 임계성으로부터 지령을 수수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했다.



김정사는 또한 당시 항소이유서에서 "임계성으로부터 공산주의에 관한 교양을 받은 바도 없고, 또 간첩 지령을 받은 바도 없으며, 그에게 국가기밀을 제보한 사실이 없는데도, 수사기관에서 조사 중 견디기 어려운 신체적 정신적 사정(고문)이 있어서 사실 아닌 허위자백을 했으므로, 이를 토대로 한 공소사실은 너무 억울하다"고 적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비명"


유영수는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보안사 조사실에서 수사관들이 "옷을 모두 벗기더니 나무로 만든 침대 모양의 커다란 판 위에 누으라고 하고, 손발을 나무판에 묶은 다음에 물이 가득 찬 커다란 주전자를 가져와서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바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누구의 지시에 의해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말하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얼굴에 물을 부었는데, 몇 번이나 숨이 막혀 기절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라고 진술했다.



그 후 유영수는 광주보안대로 연행되었다가 2~3일 후 서울로 이동해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조사받았고 당시 상황을 진실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보안사에 연행된 후 상당 기간 동안 전혀 잠을 재우지 않았고, 음식을 주지 않아 먹어본 기억이 없었고, 아주 밝은 불이 24시간 켜져 있는 조사실에서 거의 수십 일을 잠을 자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보안대 수사관들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거나 군홧발로 정강이를 걷어찬다거나 각목으로 온몸을 마구 때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늘상했으며, 수건을 얼굴에 덮어씌운 채 물을 부어 숨을 못 쉬게 해, 자기들이 원하는 답을 말할 때까지 두드려 패거나 물고문, 전기고문을 해 허위자백 하도록 했는데, 육체적으로 가혹하게 당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옆방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비명소리가 너무 견딜 수 없었다."



유영수는 또 진실위에서 "(당시) 이시다는 일본에 있는 흔한 이름으로 TV에서 들은 이름을 말한 것으로, 보안사 조사관들은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인가', '언제 북한에 갔다 왔나'라는 두 가지로 계속 물고문과 구타를 했고, 이를 견디지 못해 '이시다'가 생각나서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지, 누구의 지시에 의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허위의 사실이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이시다라는 이름을 말하자, 원하는 답을 얻었다고 판단한 것인지 '이시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았고, 실제로 어떤 목적으로 그런 서신을 작성해 (박아무개 준장에게) 전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애초에 관심이 없었고, 자기들이 원하는 답만을 강요해 그것을 인정할 때까지 두드려 패거나 물고문, 전기고문을 해 허위자백 하도록 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유성삼은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조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가택수색에 동행했을 때 도망쳤다가 붙잡혔기 때문에 매우 많이 맞았으며, 오 계장은 '너에게 물어볼 것은 하나도 없다'며, 권총을 빼 들고 총으로 때렸으며, 군복으로 갈아입힌 후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집단으로 구타했고, 또 큰방으로 옮겨서 많이 때렸는데, 건너편에 형인 유영수가 있었던 것 같고, 수사관들이 형 유영수가 자신의 소리를 듣도록 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서빙고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비행기고문 등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고, 손정자를 구속하지 않고 살려줄 테니 시인하라고 회유, 협박을 했으며, 구치소에 간 후에도 서빙고로 출·퇴근하며 계속 조사를 받았는데, 구속 후에도 얼굴 상처 등 고문 흔적이 남아 있어, 타인이 보지 못 하도록 아침 일찍 서빙고로 데려갔다가 밤늦게 구치소로 데려왔다."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신문 기사가 '국가기밀'


재일교포 유학생 원영삼은 진실위에서 1977년 사건 당일의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군인들 몇 명이 전부 군복을 입고 제가 자고 있던 방으로 와서 권총을 들이대면서, '너 일어나' 하면서 깨워 유영수와 같이 연행되었다. 이모부(박아무개 준장)에게 유영수를 소개했다고 해서 유영수와 공모한 것으로 의심한 수사관들에게 엄한 문초를 당해야 했고, 거의 1주일 이상 구금되어, 머리나 얼굴을 때리는 정도의 구타를 당했는데, 당시에 그런 곳에 끌려가면 '살아서 나오기 힘들다, 병신 된다'라는 말을 평소에 듣고 있었기 때문에, 절망감에 빠져 수사관들이 요구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심리상태였다."



임계성은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5년 7월경 김정사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 '재일한국청년동맹' 도쿄도본부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 '일한연대연락회의'(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일본 국회의원들과 교수 등 일본인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을 위해 결성한 단체)에서 한국 전반에 대한 강좌를 요청해 도쿄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일본신문에까지 광고가 나가서 일반 사람들도 많이 참석했고, 그때 김정사가 참석을 했다. 강연 후 김정사가 '선생님 강의를 듣고 저도 재일한국인으로 한국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다."



또한 임계성은 당시 김정사의 첫인상에 대해서 진실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김정사는 도쿄대학교, 와세다대학교 등 일본의 명문대학교를 진학할 정도로 똑똑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김정사가 나에게 한국의 민족의식에 대해 많이 알고 싶다면서 한국에 유학하기를 희망한다는 말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하며, 당시 한국의 김지하 시인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했고, 한국말을 잘 몰라 한국말을 배우기를 희망한다는 말도 했었다.

나는 김정사에게 북한 및 김일성 주체사상 등에 대해 선전하거나 교양한 사실이 없고, 설령 김정사가 김일성 주체사상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라도, 당시에는 내가 김일성 주체사상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는데 어떻게 김정사에게 주체사상에 대해 설명이나 선전, 교양을 할 수 있었겠나? 그런 일은 전혀 없었으며, 김정사의 아버지는 민단 사이타마본부의 간부로 활동했기 때문에 김정사도 북한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순수 한국의 민족의식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여러 증언과 진술에도, 1977년 보안사는 고문 조사 끝에 김정사, 유영수, 유성삼, 손정자를 국가보안법상 간첩, 고무·찬양, 회합·통신, 잠입·탈출 혐의와 긴급조치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그리고 3심 재판을 거쳐 1978년 김정사는 징역 10년, 유영수는 무기징역, 유성삼은 징역 6년, 손정자는 징역 3년 및 집행유예 5년 형을 대법원으로부터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의 이른바 간첩 범죄사실 가운데 '경부고속도로에 활주로가 있다' 또는 '대한민국은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내용 등은 당시 일본 언론에서 이미 다 보도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사법부는 이들이 이런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간첩죄 등을 적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검찰과 법원의 무리한 기소와 판결 때문이었는지, 이들은 수감된 다음 해인 1979년 8월 15일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판결은 1980년 신군부 정권에서 일어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근거가 된다. 즉 이 사건에 대한 1978년 대법원판결은 1980년 전두환의 '김대중 죽이기'를 위해 '합법성'을 제공하는 큰 음모의 한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지난 1973년 미국에서 망명 중이던 김대중과 전 한신대학장 김재준 박사 등이 한민통을 발족했고 김대중이 초대 의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빨갱이'로 조작하기 위해, 그가 초대 의장을 했던 한민통을 꼭 '반국가단체'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무죄판결 받았지만 여전히 입국 금지

 

 


2009년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한민통은 민단 내 인사들이 결성한 재일동포단체로, 결성목적이나 활동이 북한과 연계되어 남한사회의 체제전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것으로 볼만한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김정사 사건 판결에서 명백한 증거 없이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판시한 후, 이를 내세워 김정사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고 중형을 선고함으로써, 부당하게 김정사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다. 또한, 이후 다수의 재일동포와 관련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판결에서 김정사 사건의 대법원판결이 선결례가 되어 유사한 인권침해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진실위의 진실규명으로부터 2년 후인 2011년 9월 23일, 서울고법은 이 사건으로 복역한 김정사와 유성삼 등에 대한 재심에서 다음과 같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조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 현행법에 비춰 위헌이다. 이들의 공소사실도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 김씨 등이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신문조사나 진술서 등은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작성된 것이다. 영장 없는 구속과 고문 등으로 이뤄진 자백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



2013년 5월 22일, 대법원도 이 사건 재심 재판에서 모두 무죄 확정 판결을 선고했다.



당시 김정사는 "일단 무죄판결은 반갑다. 그러나 재판부가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이 반국가단체가 아니라는 언급이 없었던 점은 너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이 지난 1977년 김정사 사건을 조작했을 때, 당시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판결했다. 그런데 그때 대법원의 그런 판결은 그 후 한통련 회원들의 입국을 극도로 제한하는 큰 선례이자 족쇄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는 한통련 회원들이 아무 조건 없이 모국인 대한민국을 입국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그 후 집권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다시 위 대법원판결을 선례로 한통련 회원들의 입국을 제한시켰다.



결국 2013년 이 사건 피해자들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한통련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혀 있다. 그래서 지난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통련 모국방문단은 방한할 수 있었지만, 6·15 해외측위원회 위원장이자 한통련 의장인 손형근씨는 입국할 수 없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민통은 지난 1973년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과 김재준 박사 등이 발족한 단체이고, 김대중이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리고 김대중은 그 후 대통령을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법부는 지금도 여전히 한민통(한통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사법개혁이 시급히 필요한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위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한홍구 교수와 전명혁 박사께 감사드린다.

 

[ 김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