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재정’ 가장 아껴 쓴 나라
일제강점기 단편소설들엔 유난히 반어적 제목이 많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그렇고, ‘화수분’의 주인공 화수분이 그렇다. 인력거꾼은 돈벌이가 쏠쏠했던 어느 날 병든 아내의 싸늘한 주검을 만나고, 부자로 살라고 지어준 이름의 주인공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 얼어 죽는 운명으로 끝난다. 일제하 궁핍과 고통을 희망 섞인 제목으로 풍자한다.
얼마 전 홍남기 기획재정부 장관이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라며 비장한 소신을 밝혔을 때, 소설 <화수분>에 담긴 역설과 시대상이 떠올랐다. 나라 곳간은 마음껏 써도 줄지 않는 설화 속 보물단지가 아니라는 꾸짖음일 텐데, 코로나로 인한 민생의 궁핍과 고통에 나라 곳간이 제구실을 하도록 하겠다는 다짐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재난 상황에서 국가 재정을 가장 아껴 쓴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코로나 재정지출’은 3.4%다. 미국·영국·일본·독일 모두 10%를 크게 웃돈다. 지출 규모가 적으니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증가율 역시 주요국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역대 최대 ‘슈퍼 예산’이라는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난해 추가경정예산을 합친 예산보다 찔끔 증가했을 뿐이다. 겉으론 과감한 확장 재정을 말하지만, 실제론 여전히 재정지출에 미온적이라는 얘기다.
독일은 올해 예산의 40%를 빚으로 충당한다. 코로나 대응 예산을 크게 늘렸지만 세수가 부족한 탓이다. 이를 위해 연방하원은 헌법에 명시된 ‘부채 제동장치’를 잠정 유예하기로 의결했다. 한국의 재정당국과 일부 학자들이 침이 마르게 상찬하는 재정준칙을 한시적으로 폐지한 것이다.
우리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로존 국가들이 잇따라 재정준칙을 유보할 즈음인 지난해 10월, 우리는 재정준칙을 처음 도입했다. 위기 이후 빠른 재정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코로나 피해 지원책을 내놓을 때마다 ‘선별 기준’을 두고 형평성 논란이 반복되는 것 또한 재정당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 코로나 손실보상제 도입이 대표적이다. 여당은 이달 안에 소상공인법에 법적 근거를 담은 뒤, 구체적인 지급 기준을 확정해 7월부터 시행하겠다는데,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이미 방역당국은 이달 중 집합금지 등 ‘강제 방역’ 대신 ‘자율 방역’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터다. 보상 대상도 없는데 누구한데 지급하겠다는 건가.
법 시행 여부도 불투명하다. 기재부는 손실보상을 위한 소득 파악 시스템 구축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한다. 속 보이는 지연전술이요, 침대 축구라는 의심이 든다. 영국·독일의 경우 국세청이 월별로 소득을 파악해 세금 번호만 있으면 신청 며칠 만에 지원금을 받는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재정 만능주의’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제기된다. 주로 납세자 단체들이 정부 지원의 효용성을 따지고 법적 소송도 제기한다. 이른바 ‘좀비 기업’의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데 대한 우려가 나오고, 지원 기준의 형평성과 도덕적 해이 논란도 분분하다. 그래서 정치를 제어하는 관료의 역할이 필요하고, 입법 과정에서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상 ‘재정 무용론’이 공론을 주도한다. 현금성 지원과 공공 일자리는 비효율적인 퍼주기라고 반대하고, 국채 부담이 너무 크다면서 증세는 “현금 뿌리더니 세금 올린다”며 비난한다.
국채 늘리기도 증세도 안 된다니, 결국 국가는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복지든 일자리든 세금으로 하는 건 비효율과 낭비로 폄훼하고, 도덕적 해이와 형평성을 집요하게 침소봉대한다. 결국 국가의 효능감이 커지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큰 정부에 대한 반대다.
“정치는 효율과 생산성의 영역이 아니다.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요소를 낭비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이 우리 사회와 구성원과 국민이라면 그들을 돌보고 품는 게 정치다.”
이달 말 임기가 끝나는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의 라디오 인터뷰 중 일부다. 정치권의 러브콜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평생 사업을 해서 효율성·생산성·수익성 틀에 갇힌 나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하면 위험하다”며 이렇게 답했다.
우리 주변엔 박 회장보다 훨씬 더 위험한 정치인과 언론인, 학자들이 수두룩하다.
김회승 ㅣ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6094.html#csidxacf075291004ba3878750c4dca7d6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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