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신라의 골품제도와 관등

道雨 2021. 5. 15. 13:24

신라의 골품제도와 관등 

 

골품제도

 

골품 제도(骨品制度)는 신라 사회의 신분제이다. 혈통에 따라 신분에 일부 제한을 두었던 폐쇄적인 신분 제도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이래 멸망할 때까지 약 1000여 년간 신라 사회의 기본 패러다임이었으며, 이웃인 고대 일본의 성씨제도(八色の姓,訓:야쿠사노 카바네)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구성

 

골품제는 기본적으로 여덟 단계로 구분된다. 왕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며, 왕족이 아닌 신분은 진골에서 6까지의 두품(頭品)으로 나뉘었다. 숫자가 높은 두품이 더 높은 신분이다. 두품의 경우 왕경(王京)에 거주하는 귀족 계층에 대해서만 적용하였던 신분제로 보기도 한다.

 

성골과 진골

이 부분의 본문은 성골과 진골입니다.

성골(聖骨)은 국왕을 포함해서 왕위 계승권을 가지는 왕족으로 매우 폐쇄적이고 규모도 작았다.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고 고대 국가로 성장한 법흥왕 무렵에 성골이 성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진덕여왕 때까지는 성골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폐쇄적인 신분이었던 이유로 성골 계통의 왕족이 모두 소멸되게 되어 이후에는 진골인 무열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성골(聖骨)과 진골(真骨)을 구분하는 기준을 비롯하여 성골의 구성원 등 확실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양한 추측이 존재한다. 부모의 출신 성분이 모두 왕족일 경우에만 성골이 되었다는 주장[1]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예외가 많아 최근에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외에도 족내혼과 연관지어 보는 견해, 7대 또는 5대의 혈족집단으로 한정짓는 견해, 국왕과 그 직계 혈족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진골(真骨)은 신라 왕족 및 최고위 귀족이 가진 신분이었다. 진골에는 내물왕의 후손인 경주 김씨 혈족뿐만 아니라 박씨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복속한 국가 중 금관가야 고구려(보덕국)처럼 큰 국가의 왕족은 진골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신라 하대(下代)에 이르면 진골의 수가 비대해지게 되면서 진골임에도 6두품으로 신분이 하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골은 골품 제도를 통해 특권을 보장받았으며 고위 관직을 독점하여 신라의 중앙 권력을 지배하였다. 또한 혜공왕 사후에 무열왕계 왕실이 단절되게 되면서 당시 왕가와 혈연 관계가 멀던 진골 출신의 유력자였던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의 왕실이 교체된 사건 이후부터 신라 하대(下代)라고 시대를 구분한다. 하대에는 진골들이 중앙 권력을 놓고 경쟁하면서 신라 사회가 혼란에 빠졌으며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진골이 지방으로 이주하여 호족이 되기도 하였다.

 

6두품

 

6두품은 진골 바로 밑의 귀족 신분이다. 6두품은 주로 사로 6촌장을 비롯한 소국 출신의 지배자 씨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복속된 소국 가운데 대부분이 6두품으로 편제되었으며 일부 강력한 세력을 갖춘 소국의 지배층은 진골이 되기도 하였다. 6두품은 왕족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신분이었기에 ‘득난(得難)’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진골이 독점한 최고위 관직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어느정도 높은 관직에 배치되어 신라 사회의 지배층으로 활약하였다. 신라 중대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국왕과 결합하여 친위 세력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출세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진골에 대해 불만을 가졌으며, 국왕 역시 진골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6두품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격화된 하대에는 권력에서 소외되면서 반 신라적인 계층이 되었다. 주로 유학을 익혀 관료제의 기반을 닦았으며 불교에 귀의하여 사상계를 이끌기도 하였다. 고려가 건국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던 계층도 주로 6두품이었으며, 그 동안 축적되어 있던 학문적 기반을 토대로 호족 세력과 함께 고려의 지배층이 형성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5두품

 

5두품은 6두품 밑의 신분으로 주로 촌장 계층이 5두품으로 편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5두품은 지방의 진촌주(眞村主)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5두품 역시 관직의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4두품

 

4두품은 5두품 밑의 신분이자 사실상 최하위 귀족 계층이다. 원래는 4두품 아래에 3, 2, 1두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삼국통일 이후에 소멸되어 평민과 같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4두품도 5두품과 같이 촌장 계층이 편재된 것으로 보이며, 5두품보다 세력이 약한 촌장이 편재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따르면 4두품은 지방의 차촌주(次村主)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4두품은 최하위의 관직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골품에 따른 제약

 

정치

이 부분의 본문은 신라의 관직 § 신라의 관위 17등급입니다.

  • 성골과 진골은 모든 관직을 차지할 수 있다
  • 6두품의 경우 최고직은 6등급인 아찬
  • 5두품의 경우 최고직은 10등급인 대나마
  • 4두품의 경우 최고직은 12등급인 대사

 

사회

 

  • 성골 : 가옥의 제약없음
  • 진골 : 가옥은 24자(척)로 제한(약 7미터)
  • 6두품 : 가옥은 21자로 제한
  • 5두품 : 가옥은 18자로 제한
  • 4두품 : 가옥은 15자로 제한. 담장은 6자를 넘지 못함. 속곳을 착용할 수 없다. 느릅나무를 쓰지 못함. 우물 천장을 만들지 못함. 당기와를 덮지 못함. 금·은·구리 등으로 장식하지 못함. 대문과 사방문을 만들지 못함. 섬돌로 산의 돌을 쓰지 못함. 석회를 칠하지 못함. 마구간에는 말을 2필까지만 둘 수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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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과 진골, 대원신통과 진골정통

 

성골 진골(聖骨—眞骨)은 신라시대의 신분제인 골품 제도(骨品制度)의 등급으로, 신라 사회의 최고 신분층이다. 신라 왕족인 성골(聖骨)은 경주 김씨 진흥왕의 장자계열이 진덕여왕 대에 끊어 지고, 진흥왕 차남 계열 후손인 태종무열왕과 532년 신라로 항복해 온 금관가야 김해 김씨와 한반도 남부 통일 과정에 항복해온 일부 가야 왕족들이 진골의 등급에 해당된다.

 

개설

 

원래는 성골만이 왕이 될 자격이 있었으나, 선덕여왕 때가 되어 성골 출신의 남자가 하나도 없게 되자, 진골 출신도 왕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유사》는 이때의 상황을 "성골남진(聖骨男盡)"이라고 표현했다.

진골과 성골의 차이나 구분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고 여러가지 가설만 존재한다.

  1. 진흥왕의 직계(성골) 및 방계(진골)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다.
  2. 성골은 왕족 내부의 혼인[1]으로 태어난 집단이고, 진골은 왕족과 다른 귀족의 혼인[2]으로 태어난 집단이다.
  3. 같은 왕족이면서도 성골과 진골로 구별되는 것은 모계(母系)에 의한 것인 듯하다.
  4. 정치적인 면에서 구분하여 왕실 직계의 왕위 계승자 및 왕위 계승을 보유할 수 있는 제한된 근친자를 포함하여 성골이라 칭하고, 그 외 왕위 계승에서 소외된 왕족을 진골이라 하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시조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의 왕족은 성골, 무열왕 이후의 왕족을 진골이라고 해석하나, 성골은 불교가 들어와 신라의 사상 통일에 있어서 이념이 된 법흥왕 때부터 형성된 듯하며, 불교에서 종교적 신성 개념을 받아들여 왕실 자신이 신성 가족으로 자처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무열왕부터 왕족의 신분이 성골에서 진골로 전환된 것은 신라 왕족의 혼인 관계의 변천, 즉 새로운 왕비족의 대두에 따라 일어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신라와 당(唐) 사이의 정치·외교적인 관계가 중요시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랑세기》는 진골과 성골이 등장하지 않고, 대신 대원신통, 진골정통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전자는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 박씨 계통을, 후자는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 김씨 계통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 역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으며,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진골, 성골과 바로 일치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라가 태종 무열왕 이래로 국세를 신장하게 되면서, 진골은 기존의 왕족뿐 아니라, 정복지의 왕족까지 흡수하는 표현이 된다. 한 예로, 가야의 왕족 김씨의 후손인 김유신은 진골 대접을 받았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부흥운동의 지도자였던 안승도 김씨 성을 하사받고 진골 대접을 받았다.

신라 관직 상에서 1등급부터 5등급까지는 진골 이상의 출신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신분의 탈락

 

골품제 내의 귀족들 중 진골 귀족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대로 신분이 유지됐지만, 성골의 경우 진평왕에 의해 폐위되는 진지왕과 왕자인 김용수, 김용춘, 또 그 아들인 김춘추는 왕궁에서 쫓겨나면서 진골 귀족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귀천상혼(貴賤相婚)의 혼인 과정에서 그 자손들이 낮은 배우자의 신분을 따라가게 되는 원칙에 따라 신분 탈락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신라 후대에 이르러 잦은 반란이 발생함에 따라 그에 대한 처벌로 신분이 격하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

 

 

같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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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신통(大元神統)

 

왕 등과의 혼인을 하는 여자를 공급하는 계통으로 인통(姻統)이라고 한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인통은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있다.

대원신통은 보미를 시조로 하였으며, 진흥왕의 황후였던 사도, 사도의 조카였던 미실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인통의 계승은 완벽하게 모계 계승으로 이러졌는데, 남자들은 한 대에 한하여 어머니의 계통을 따라 대원 신통이 되기도 하였다. 대원 신통은 화랑도 중 화랑과 낭도의 파를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진골정통(眞骨正統)

 

인통 중 하나다. 『화랑세기』 6세 세종 조에 신라에 병합된 소문국(召文國)의 운모공주와 구도 사이에서 출생한 옥모의 인통(姻統)이 아니면 황후로 삼지 말라는 미추왕의 말이 나온다. 이후 옥모의 계통을 이은 여자들이 진골정통이 되어 왕비를 공급하였다.

옥모는 진골 정통의 조(祖)가 되었다. 후일 지소태후가 진골 정통의 종(宗) 또는 수주(首主)가 되었다. 미추왕은 광명을 부인으로 삼았는데, 광명의 계보는 광명-아이혜-홍모-옥모-운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골 정통은 대원 신통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여자의 계통을 통하여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 과정에 남자는 한 대에 한하여 어머니의 계통을 이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 결과 왕, 화랑, 낭두들도 그 계통에 속하게 되었는데, 남자들은 어머니의 계통에 따라 부자간에 계통을 달리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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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관등

 

신라의 관직 제도 법흥왕 때 완성된 경위(京位) 17 관등과 외위(外位) 11관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지방인에게 주는 11위는 통일신라 이후인 674년(문무왕 14년)에 지방세력가들을 지배체제 속에 포섭하기 위해서 지방 출신에게도 일률적으로 경위를 주게 됨에 따라 자연히 폐지되었다.

 

개설

 

신라의 통용 신분체제인 골품제에는 형식상 왕/귀족 · 6두품 · 5두품 · 4두품 이외 기타(외국인) 신분이 있었다.

왕과 귀족인 성골과 진골과 더불어 두품의 분류에 따라서 신분 규정이 있었다.

성골과 진골은 중요 관등 중의 하나인 이벌찬까지 직임할 수 있어, 형식상으로 신라 사회 질서의 기준이 되었으나, 그 외의 신분 체제인 6두품, 5두품, 4두품은 중요 관등인 대아찬, 잡찬, 이벌찬, 파진찬, 이척찬까지의 직임은 이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하지만 자색 공복을 입게 되는 5순위 이상 관등들은 신라 사회의 분열을 막기 위한 상징과 명예 직임에 가까웠으며 (*물론 실권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 사회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것도 이들 때문이었다.) 그러한 고정된 신분체제의 대응으로 실세라고 할 수 있는 관직은 6두품, 5두품, 4두품들이 자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골품제와 두품 및 직임 중인 관직에 따라서 거주하는 집의 형태와 크기·지붕·공복 등의 차별 규정이 있었다.

1등위부터 5등위까지의 관직은 "적(赤)색과 청(靑)색의 합(合)색인 자(紫)색" 공복(公服)을 입도록 했고, 6등위(아찬)부터는 비(緋)색 공복, 10등위(대나마)부터는 청색 공복을, 12등위(대사)부터 17등위까지는 황색 공복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골품제는 관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육정(六停)을 비롯한 군대의 최고 지휘관인 장군은 급벌찬부터 이벌찬이지만 가능한 경우 성골과 진골만이 되도록 규정했다. 이러한 신분 규정의 목적은 단지 계급의 서열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신라 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신라는 사로 6촌이라는 연맹체를 시초로 한 나라였으며 따라서 각각 다른 시조와 본류를 지닌 출신 성분을 서로 구별하여 그에 따른 다소 특수 이상적인 신분 사회를 구성하려 하였다. 골품제가 완전히 경직된 신분체계는 아니었으나 일반적으로 신라 사회에서 형식적 인식이 있었던 것일뿐이었다.

또한 왕의 아버지나 장인은 갈문왕에 봉해졌다. 갈문왕은 유사시 왕권이 흔들릴 경우에 대비해서 봉해지는 것으로써 직접적인 권위는 없지만 특수한 경우 왕권에 오를 수 있는 조선시대의 대군과 비슷한 작위였다. 따라서 왕의 사촌과 같은 친족 중에서 봉해졌다고 한다.

 

역사적 기록

 

제2대 남해 차차웅 석탈해 대보(大輔)에 임명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며, 제3대 유리 이사금이 관위 17등급을 설치하였다고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1] 신라의 관직제도는 삼국사기 잡지 7권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신라의 관직 17등급

 

 

관직의 분류에 따라서 착용 의복색이 달랐으며 (일반적으로 자색, 비색(緋色), 청색, 황색의 4색 구분), 또한 골품제에 따라서 입직 가능한 관직의 제한 규정이 있었음 (그러나 골품제에 관련없이 현재 재직 중인 관직의 분류에 해당하는 복색만을 착용해야 하였음)

 

 

신라의 외위 11관등

 

  • 신라시대 지방인에게 주는 관위(官位)
    • 악간(嶽干) - 11등급 중의 첫째 위계이며 경위(京位)의 일길찬(一吉湌)에 해당
    • 술간(述干) - 11등급 중 둘째 등급인 술간은 경위(京位)로 따지면 8위인 사찬(沙湌)에 해당되는데 668년 신라 고구려를 정복할 때 평양 남교다리 전투에서 제1의 공로자인 군사(軍師)인 구기(仇杞, ?~?)와 경상북도 영주시 태장리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의 주인공인 어숙(於宿)은 이 술간(述干)을 받았다.
    • 고간(高干)은 9위 급찬에 준한다.
    • 귀간(貴干)은 10위 대내마에 준한다.
    • 선간(選干·찬간撰干이라고도 한다.)은 11위 내마에 준한다.
    • 상간(上干)은 12위 대사에 준한다.
    • 간(干)은 13위 사지에 준한다.
    • 일벌(一伐)은 14위 길차에 준한다.
    • 일척(一尺)은 15위 대오에 준한다.
    • 피일(彼日)은 16위 소오에 준한다.
    • 아척(阿尺) - 신라시대의 외위(外位) 11등급 중의 맨 끝 17 위계. 경위(京位)의 선저지(先沮知:造位)에 준한다.
  • 삼국통일 무렵인 674년(문무왕 14년)에 육도의 진골이 오경과 구주에 출거하게 되어 지방세력가들을 지배체제 속에 포섭하기 위해서 지방 출신에게도 일률적으로 경위를 주게 됨에 따라 자연히 폐지되었다.

 

신라의 임시 관위

 

이 두 관위는 오늘날의 부통령에 해당되며 태대각간의 경우는 신라 역사상 김유신이 유일하게 오른 관직이다. 이후 김인문만이 태대각간으로 추증되었다.

 

상대등과 시중

 

상대등(上大等)은 신라 법흥왕 때 설치한 귀족회의의 의장으로, 실질적으로 수상과 비슷했다. 시중(侍中)은 집사부의 장관으로, 진덕여왕때 수상직을 맡아 상대등과 맞서게 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한이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