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전두환에게 ‘학살자’라는 제목을 달며. 학살자 전두환의 죄 용납할 수 없다

道雨 2021. 11. 25. 09:36

전두환에게 ‘학살자’라는 제목을 달며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의 사망 다음날인 24일, 9개 조간신문 사설을 봤다. 제목에서 전두환에 대한 명칭을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세계일보>는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국민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는 ‘전두환’으로, 그리고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은 ‘학살자 전두환’으로 각각 표기했다.

이날 외신 기사에선 <뉴욕타임스>가 ‘전 군부독재자’(Ex-Military Dictator)로, 프랑스 통신사인 <아에프페>(AFP)는 ‘학살자’(Butcher of Gwangju)로 표기했다.

 

                                       
                                           * 2021년 11월 24일자 한겨레신문 사설

 

 

 

23일 오전 10시30분 논설위원실 회의에서 제목에 ‘학살자’를 넣을 것인지 ‘잠깐’ 논의했다. 이견이 없었다. 사설 제목은 ‘한 마디 사죄도 없이 떠난 ‘국민 학살자’ 전두환’이었고, <인터넷 한겨레> 오전 10시54분 기사 제목은 ‘학살자 전두환, 반성없이 죽다’였다.

그때까지 논설위원실과 편집국이 ‘학살자’ 제목에 대해 같이 논의하진 않았지만, 그의 죄상과 역사적 규정을 보다 분명히 하고픈 마음은 같았나보다.

2021년 세상에서, ‘학살자 전두환’이라 쓰는 데에 용기가 필요하진 않다.

 

 

 

전두환 시절로 돌아가 1986년 7월16일, 문화공보부가 각 언론사에 배포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다음날) 보도지침을 보자.

<17일자> ①금일 하오 4시 검찰이 발표한 동사건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②사회면서 취급할 것(크기 재량에) ③검찰발표 전문, 꼭 실어줄 것 ④(보도)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줄 것 ⑤동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고 하지말고 “성모욕 행위”로 할 것 ⑥발표외 신문사 독자적 취재보도 불가 ⑦시중에 나도는 “반체제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NCC(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단체 등의 동사건 관계 표명” 일절 보도불가.

 

 

                                  * 자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실제 다음날 기사를 보면, <조선일보> “「성적 모욕」 없고 폭언·폭행만 했다”, <동아일보> 검찰 “성적 모욕 없었다” 발표, <경향신문> “성적 모욕행위 없었다” 등으로 보도지침을 충실히 지켰다. 다만, 그 기사는 모두 사회면 톱이었고, ‘성적 모욕’이라는 말은 모두 따옴표로 표기했다. <동아일보>는 ‘검찰 발표’라는 점을 제목을 통해 보다 분명히 밝혔다. 또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은 문귀동 경감의 사진을 신문에 박았다. <동아일보> 사진이 더 컸다. 제목만 보면 뻔뻔하기 그지없는 35년 전 전두환 시절 기사인데, ‘행간을 읽어주길 바라는’ 그때 기자들의 자괴감 속 마음이 읽히니, 기자 생활을 너무 오래한 것일까.

 

 

 

1980년 5월20일, <전남매일신문>(현 광주일보) 기자들은 공동사표를 제출하면서 이런 성명을 냈다.

“우리는 보았다/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고.

 

                                * 자료 : 박화강 전 <한겨레신문> 기자(1980년 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

 

 

앞서 5월16일, 기자협회는 ‘검열거부 선언’을 발표했다. 검열거부는 조선일보, 한국일보, 합동통신 등 전 언론사로 번졌다. 광주 상황을 전혀 보도하지 못하고, 계엄 당국이 발표한 허위 사실을 보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당국에 끌려간 송건호(1927~2001)는 각목으로 온몸을 구타당하는 모진 고문으로 말년에 깊은 병을 얻었다. 그해 1200여명의 기자들이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 당했다.

 

전두환의 죽음 앞에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1980년 5월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나는 ‘학살자’ 제목을 달자 할까. 1986년 7월로 돌아간다면, 그때 나는 “성적 모욕 없었다”가 아니라, ‘성고문 있었다’라고 쓰자 할까. 그도 아니면, “부끄러워 붓을 놓”았을까.

 

전두환 정권이 저물어가던 1987년 8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연례 총회 자리에 해직기자 정태기와 권근술이 찾아갔다. “새신문을 만들려 한다”며 지원을 부탁했다. ‘대통령 선거’라는 거대한 싸움 앞에 ’신문’은 뒷전이어서 대부분 시큰둥했다. 그런데 민통련 의장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좋습니다. 합시다. 대신 우리하고 같이 합시다. 당신들 언론인, 지식인끼리만 일을 벌이면 자기 감정에 함몰됩니다. 민중과 함께 합시다”라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창간 준비작업을 하고 있을 당시, 주변을 얼쩡거리던 정보요원들이 ’운동권이 지원하면 무조건 입사시키는 겁니까’라고 묻자, 정태기는 “그런 기준으로 뽑아 제대로 된 신문을 만들 수 있겠소? 다만, 이런 원칙은 세웠어요. 기자를 천직으로 아는 사람만 뽑는다. 기자를 정치권력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못 들어온다”라고 답했다.

1987년, 문익환(1918~1994)이 그리는 ‘민중과 함께 하는 신문’과 정태기(1941~2020)가 그리는 ‘제대로 된 신문’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2021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신문’을 만들면, 결과적으로 ‘민중과 함께 하는 신문’이 되리라 본다. 그러나 선후가 뒤바뀌면 모든 게 일그러질 수 있다.

 

24일치 대부분 신문들이 1면 사진으로 전두환의 계엄사령관 때 또는 최근 사진을 게재했다. <한겨레신문>은 전두환 대신, 1980년 5월 당시 망월동 묘역에서 어린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오열 장면을 담았다. 이때 ‘제대로 된 신문’과 ‘민중과 함께 하는 신문’이 다르지 않다 본다.

 

 

 

드라마 <모래시계>(1995)에서 광주항쟁 한복판으로 들어가버린 시민군 태수(최민수)에게,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진 후배 칠수의 어머니(김을동)가 전남도청을 떠날 것을 부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반장님은 살아있어야지. 살아서 늠들한테 우리 얘기를 해줘야지. 우리 말 안 믿을지 모릉께, 반장님 같은 타지 사람이 우리 얘기를 해줘야 써. 그것이, 그것이 나의 부탁이고 우리 칠수의 부탁이여. 거절하지는 않것지?”

결국 승락한 태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내 괴로울 겁니다.”

 

기자는 늘 ‘타지 사람’이고, 이어야 한다. 그래서 ‘남의 얘기’를 써야 한다. 그렇지만 ‘괴로워야 한다’.

나는 지금 충분히 괴로운가. 무엇에. 전두환에 ‘학살자’ 칭호를 붙이는 게 너무 쉬워진 날.

 

 

권태호|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0643.html?_fr=mt0#csidx5bebb192217f2658455fc17ea2a80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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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자 전두환의 죄 용납할 수 없다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에 미국 시사지 <뉴스위크>는 “이번 한번만은 죽음이 인간 입술에 미소를 가져다주었다”고 썼다.

전두환씨가 죽었다. 1979년 12월12일부터 1988년 2월24일까지 8년여 동안 대한민국을 철권통치한 독재자였다. 그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민주화를 짓밟고, 광주시민 수백명을 학살한 죄를 용서할 수 없지만, 끝내 사죄하지 않고 생을 마감한 죄 역시 용납되기 어렵다.

 

전두환은 군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만 골라서 주도한 인물이다. 육사생도 시절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하는 데 앞장섰다. 군에서 금기시된 사조직(하나회)을 만들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이어서 5·17 쿠데타로 정권을 도둑질했다.

재임 시절에는 파충류적인 식성으로 재산을 긁어모았다. 독일 주간지 <슈테른>이 “1995년을 빛낸 국제 8대 사기꾼” 2위(노태우는 3위)로 꼽을 정도였다.

 

그는 군인으로 입신했으나 군인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택한, 그래서 군과 나라의 명예에 먹칠을 한 장본인이다. 전방부대를 빼내어 쿠데타에 동원한 처사부터, 5·17 이래 걸핏하면 내세웠던 ‘국가안보’가 얼마나 허구투성이인가를 보여준다.

 

그의 죄상은 이것만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정의를 짓밟으면서, 허울 좋은 ‘민주정의당’이라는 정당을 만들고, 양심세력·개혁인사들을 용공좌경으로 몰아 탄압했다. 수많은 민주인사가 살해·투옥되고, 언론이 문을 닫거나 통폐합되었으며, 교수·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났다.

 

돌이켜 보면 전두환 8년의 폭정이 그의 죄과만은 아니다. 그에 동조하여 5공 정권을 세운 정상배·군인·언론인·지식인·종교인·법조인들의 합작품이다. 이들은 전두환을 우상화하면서 끼리끼리 동종교배를 통해 감투와 세력, 먹을거리를 챙겼다. 청와대 보좌진, 총리, 장관, 국회의원, 공공기업이나 언론사 대표가 되어,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면서 전두환을 지켜주었다.

저들은 독재자에게 변명의 멍석을 깔아주고, 사실 왜곡의 양념을 쳐주면서, 세력을 유지하고 국민을 억압하였다. 그래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이 나오고, ‘인간 전두환’으로 신격화시킨 언론사가 급성장하고, 조찬기도회를 열어주고 대형 교회가 되었다. 지금도 5공의 잔재는 도처에 활개치고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행세한다.

 

맹자는 “백성을 학대한 죄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했고,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죽은 자에 대한 관용이 미덕처럼 되고 있다. 그래서 독재자들의 죽음에 국장이나 국가장을 치르고, 생전의 죄상보다 소소한 미담이 채색된다.

친일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역사가 흙탕물이 되고 현대사가 오염되고 있다.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는 유력 정치인이 나오고, 공적으로는 문제가 많지만 사적으로는 인연이 깊어 조문한다는 정상배가 적지 않다. 전두환의 죽음을 계기로 공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포용성이 깊은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역사에 대해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가 크다”고 말하였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죽었을 때, 프랑스의 지성 장폴 사르트르는 〈르몽드〉에 “프랑코와 같은 독재자가 자기 침대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었다니”라며 개탄했다.

전씨와 더불어 역사와 겨레에 큰 죄를 지은 ‘생존 동업자들’은 이 기회에 ‘죄닦음’으로 속죄의 길을 찾았으면 한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020664.html#csidx884cdd0442bf089a87c89b922792b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