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전두환이 노동에 남긴 숙제

道雨 2021. 11. 25. 09:47

전두환이 노동에 남긴 숙제

 

 

90년 전인 1931년 5월29일 새벽, 식민지 조선의 평양. 을밀대 앞에 평양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지붕 위엔 가냘픈 체구의 여성 한명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2년 전 닥친 세계적 대공황의 여파로, 임금을 무려 17%나 깎겠다는 사장의 통보에 맞서, 48명의 여성 노조원과 함께 파업을 벌이고 단식투쟁에 나섰다가, 그날 새벽 해고 통보를 받은 평원고무공장 소속 서른살 노동자 강주룡이다. 그가 입을 뗐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임금삭감)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

 

한국 노동운동 사상 첫 고공농성으로 기록된 이 일로 ‘체공녀’라는 이름을 얻은 강주룡은, 거사의 명분으로 같은 일을 하는 다른 공장 노동자의 임금삭감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가 고공농성을 벌이기 1년 전엔 평양 시내 15개 고무공장 노동자 1800명이 임금삭감에 반대하는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개별 노동조합의 활동이 도드라지는 지금과 달리, 일제강점기에 노동조합운동은 업계 차원의 대응이 낯설지 않았다. 실제 사용자 단체와 본격적인 산업별 교섭이 이뤄지진 않았으나, 노동조합의 결성 형태는 지역별 노조 또는 산별노조 등 초기업 단위 노조에 가까웠다고 한다.

해방 뒤 미군정 시절 대한노총(한국노총의 전신)을 제치고 전국 노조원의 80% 이상을 차지한 전국노동조합평의회가 산별 형태였고, 1961년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때도 한국노총 소속 노조는 대부분 산별노조였다.

 

이런 흐름에 가장 큰 균열이 일어난 건 전두환 신군부가 1979년 12·12군사반란에 이어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권력을 찬탈한 뒤다.

전두환 손아귀에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노동조합 정화 지침’을 내려, 한국노총 산별노조 위원장급 상층 간부 12명을 해고하고, 지역지부 105개를 해산하는 등 산별노조 와해에 나섰다. 민주노조 운동을 하는 간부들한테는 현장 복귀를 지시했다.

그해 12월엔 노동법 개악을 감행했다. 사실상 해당 사업장 노동자가 아니면 노조를 만들거나 쟁의행위에 개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제삼자 개입금지’ 조항을 도입하는 등, 산별노조와 노-학 연대를 무력화하는 내용이다.

제삼자 개입금지 조항은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물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을 구속하는 도구 등으로 철저히 활용됐다. 한국의 노조는 유럽에선 어용노조로 불리는 기업별 노조만 허용됐다.

 

강요된 기업별 노조는 개별 사업장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투쟁에만 몰두하며, 노동 현장에 대기업-중소기업, 원청-하청 사이 노동 양극화가 심화하는 계기가 됐다.

스웨덴과 독일 등 서구 사회가 산별교섭이라는 제도적 틀로 임금 격차를 줄이고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이뤄낸 경험을 한국 사회가 갖지 못하게 된 배경이다.

현재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가장 큰 불평등, 불공정 이슈가 잉태된 셈이다.

 

노조 활동가를 잡아 가두고, 블랙리스트로 취업을 막는 등, 국가 폭력이 기승을 부리던 전두환 시절에, 노동자의 단결권은 끊임없이 위축됐다. 1979년 24.4%이던 노조 조직률은 1980년 21.0%로 급락한 데 이어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 1986년엔 16.8%로 바닥을 찍었다. 이듬해 6월 항쟁에 이은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고서야 비로소 조금씩 회복세를 보였다.

 

제삼자 개입금지는 2007년 노동법에서 사라졌으나, 노동 현장엔 여전히 기업별 교섭 관행이 대세이고,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등으로 대다수 산별노조는 ‘무늬만’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다.

 

5·18학살,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피해자, 해고 노동자와 언론인 등을 뒤에 두고, 사과도 없이 전두환은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전두환이 남긴 기업별 노조, ‘어용노조’의 틀에 갇혀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내몰린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누구인가, 질문을 던질 때다.

 

 

전종휘|사회에디터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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