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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교류협력법의 탄생, 분단사의 분수령

道雨 2021. 12. 21. 11:01

남북교류협력법의 탄생, 분단사의 분수령

 

이제훈의 1991~2021 _18
노태우 정부는 ‘무슨 근거로, 왜 정주영의 방북만 승인했냐’는 물음에 답해야 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통치권을 뒤흔든 내분을 빠르게 수습할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잇단 고위 당정 협의 뒤 1989년 2월11일 노태우 정부는 남북교류협력특별법안 단 한 건을 심의하려고 임시 국무회의를 열었다.
 
*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2~4일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하러 가기에 앞서 발급받은 ‘북한 방문 증명서’. 대통령도 북한에 가려면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1990년 8월1일 제정·시행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른 절차다. <한겨레> 자료사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교류협력법)의 탄생은 남북 분단사에 분수령적인 사건이다. “이 법은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이하 ‘남한’이라 한다)과 그 이북지역(이하 ‘북한’이라 한다) 간의 상호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1조)

 

 
‘애걔, 이게 무슨 분수령?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되묻고 싶더라도 잠깐 참아주시길.
 
이 법은 노태우 정부 3년차인 1990년 8월1일 제정·시행됐다. 이 법 시행 이전 대한민국에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법은 국가보안법뿐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실상 “반국가단체”로 규정한다. 북을 오가거나 북쪽 사람과 만나는 행위는 물론이고 말을 섞기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됐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1일 제정·시행됐고, 오랜 세월 ‘헌법 위의 법률’이자 ‘실질적 헌법’이라 불렸다.
국가보안법의 관점에서 ‘반국가단체’와 교류·협력 촉진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교류협력법은 남과 북 사이의 “상호 교류와 협력 촉진”을 목적으로 한다고 1조에 명시했다.
교류협력법의 제정으로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국내 법체계는 국가보안법과 교류협력법으로 이원화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보안법이 ‘순전한 적’으로 간주한다면, 교류협력법은 “함께 번영을 이룩하는 민족공동체”로 관계를 발전시키려 “상호 교류협력”해야 할 ‘동반자’로 여긴다.
국가보안법이 북의 실체성과 교류협력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면, 교류협력법은 북을 대화와 협력의 상대로 인식해 ‘정부 승인’을 전제로 교류협력에 합법성을 부여한다.
‘1948년생’ 국가보안법과 ‘1990년생’ 교류협력법의 ‘북한 인식’은 티끌만큼의 공통점도 없다.
 
교류협력법의 탄생을 두고 당시 통일원은 “남북 간 교류협력을 우리 헌정사상 최초로 법적으로 보장”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자평했다.
“헌정사상 최초 법적 보장”의 의미는 넓고 깊다.
먼저 통일 문제를 대통령의 통치 행위로 여기던 관행이 법치 행정으로 전환됐다.
둘째, 남북관계에서 “교류협력”이라는 법적 영역이 새로 만들어졌다.
셋째, 교류협력 과정에서 ‘비국가행위자’(시민사회, 기업/자본)의 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넷째, 대북정책이 ‘말’을 넘어 ‘실천’으로 도약할 법적 디딤돌이 마련됐다.
 
교류협력법은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4조 ‘평화통일 원칙’ 조항을 근거로 삼아, 1988년 7월7일 집권 첫해의 노태우 대통령이 24회 여름올림픽(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안팎에 천명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을 구체화할 수단으로 마련된 법이다.
하지만 7·7선언 당시 노태우 정부는 선언 내용의 실천을 가능케 할 새로운 법률 제정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선언 전후로 구체적인 입법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교류협력법이 세상에 나오느라 겪어야 할 산통은, 1989년 ‘비국가행위자’의 잇단 방북, 특히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방북의 후폭풍과 함께 왔다. 그해 1월 정주영의 방북은 노태우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이뤄졌다. 정부(상공부)의 방북 승인 공식 발표도 있었다. 그런데도 ‘불법 방북’ 논란에 휩싸였다.
정주영이 서울에 돌아온 다다음날인 2월4일, 박세직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언론사 정치부장들을 안기부로 불러, 정주영이 평양에서 “위대한 김일성 장군”이라 추임새를 넣는 장면이 담긴 영상물을 보여줘 ‘정주영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을 부추겼다.
노재봉 대통령 특보는 대통령 면전에서 정주영의 방북을 ‘불법 방북’이라 공격했다. 박세직은 정주영의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을 “잘 추진되도록 하라”는 대통령의 공식 지시에도, “사문서로 법적 효력이 없다”며 깔아뭉갰다.
정치적으론 변화를 거부하는 강경파의 반발·저항에 따른 권력의 내분이자, 근본적으론 “교류협력”을 규율하며 합법성을 부여할 법률의 부재, 곧 입법 미비에 따른 과도기의 혼란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무슨 근거로, 왜 정주영의 방북만 승인했냐’는 물음에 답해야 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통치권을 뒤흔든 내분을 빠르게 수습할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잇단 고위 당정 협의 뒤 1989년 2월11일, 노태우 정부는 남북교류협력특별법안 단 한 건을 심의하려고 임시 국무회의를 열었다. 이틀 뒤인 2월13일 이홍구 국토통일원 장관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특별법안’을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 냈다.
정주영의 귀환일인 2월2일 법률 제정 방침 잠정 결정에서, 2월13일 법안 제출까지 열하루밖에 걸리지 않은 속전속결이었다고, 당시 법률 제정 작업에 실무자로 참여한 김천식 전 통일부 차관은 회고했다.
 
노태우 정부가 국회에 낸 법안의 내용은, 교류협력을 정부가 관리·통제하려는 “창구 단일화”를 전제로 한 “국가중심주의적 접근”이었지만, 적대 일변도의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으로 방향 전환시킬 안내도를 담고 있었다.
첫째 “이 법에 따른 행위에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아니함”,
둘째 통일원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 설치,
셋째 인적 왕래에 통일원 장관의 승인권,
넷째 남북 교역을 민족내부거래로 간주해 무관세 적용,
다섯째 남북 교역은 국가기관·지자체·정부투자기관과 무역업 허가를 받은 자로 한정 등이다.
 
이 법은 1969년 3월1일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개원 이래 21년 만에 처음으로 국회에 낸 법률안이라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그 와중에 1989년 3월25일~4월3일 문익환 목사 ‘미승인 방북’의 후폭풍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노태우 정부는 정주영과 달리 문 목사를 구속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해, 87년 6월항쟁 이후 목소리를 높여온 노동자 등 민중운동을 탄압했다. 영화로도 익숙한 ‘범죄와의 전쟁’은 노동자·민중 탄압에 쏠릴 시선을 흩트리려는 성동격서였다.
그해 7월1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이 열린 평양 능라도경기장에 있던 ‘전대협 대표 임수경’은 구속됐는데, ‘박철언 대통령 정책특보’는 멀쩡한 내로남불 사태가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정주영 때 권력 내부 분열로 시작된 방북 논란이, 문익환·박철언·임수경을 거치며 사회적 논란으로 확산한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자의적 적용 등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논란을 ‘통치행위’ 논리로 무마하는 데 한계가 분명했다.
 
노태우 정부는 잇단 방북과 관련한 내로남불 논란과 권력 내분이 대통령의 통치권을 뒤흔들지 않도록 신속하게 수습해야 했다. 방향은 정부가 통제·관리하는 남북 교류협력의 합법화였다. 7·7선언으로 이미 물꼬를 터놓은 터라 국회의 입법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6월12일 ‘대통령특별지침 1호’의 형식을 빌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기본지침’을, 그해 7월21일 ‘남북교류협력 세부시행지침’을 제정·시행했다. 이 지침은 1990년 8월1일 교류협력법이 제정·시행·공포될 때까지 1년 넘게 남북교류협력과 관련한 법률 구실을 했다. 국회에서 이를 두고 위헌 논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사실상 ‘입법’인 ‘대통령 특별지시’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정부 행위였다.
 
안타깝게도 교류협력법은 국가보안법에 포획된 채로 세상에 나왔다. 애초에 노태우 정부는 “이 법에 따라 행하여지는 행위에 대하여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해, 교류협력법을 국가보안법과 동급의 법률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초거대 보수당’인 민주자유당의 압박 탓에, 최종 제정 법률은 “…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로 바뀌었다. 교류협력법에 근거를 둔 행위라도 ‘정당하다’고 인정받지 못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교류협력법은 사실상 국가보안법의 하위법으로 세상에 나온 셈이다.
 
30여년이 흐른 지금 “다른 법률과의 관계”를 규정한 현행 교류협력법 3조는 “이 법률의 목적 범위에서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라는 주관적 표현이 ‘법률의 목적 범위’라는 법률 용어로 개선됐지만, 아직도 국가보안법의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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