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이 또한 지나가리라

道雨 2023. 4. 10. 09:38

이 또한 지나가리라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할 때 설득의 의도를 미리 알려야 하는가?

이는 이 분야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오랜 쟁점이었다.

찬반양론이 존재하기에 정답은 없는 셈이지만,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방법>(2023)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저자인 과학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맥레이니는 “의도를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정치적 음모론을 믿는 아버지와 논쟁을 벌일 때 이런 접근법을 활용했다. 우리는 사실을 두고 오랫동안 입씨름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봤다. 나는 왜 아버지의 생각을 바꾸고 싶은 걸까? 나는 아버지에게 ‘저는 아버지를 사랑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잘못된 정보에 속는 게 너무 속상해요’라고 말했고, 우리의 입씨름은 바로 끝났다.”

 

의도를 밝히면서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해졌고, 그래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는 해피 엔딩의 이야기다.

 

축하해주는 게 좋겠지만, 이 접근법은 부모와 자식, 부부나 연인들처럼 ‘사랑’을 강조해도 좋을 사이에서만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걸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아무리 사랑한다고 외친다 해도 “사랑을 개입시키지 말라”고 냉정하게 쏘아붙일 가족이나 연인도 많을 게다.

 

설득 커뮤니케이션 전체를 놓고 보자면, 의도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쪽이 우세한 것 같다.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이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2023)이라는 책에서 지적했듯이, 연구자들은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보다는 암묵적이고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음을 밝혀냈다.

이는 어떤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긴 하지만, 아예 설득이나 논쟁 자체를 결코 시도해서는 안 될 금기처럼 여기는 주제도 있다.

누구나 흔쾌히 인정하리라, 그건 바로 정치다. 토론과 설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 원칙은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는 허구에 가깝다.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지거나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간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하실 게다.

어느 자리에서건 악착같이 논쟁을 지속시키려 애쓰는 ‘정치 애호가’가 있기 마련이지만, 대다수는 ‘정치 이야기의 금기화’를 지지한다.

 

그 이유는 다음 명언들로 대신하는 게 좋겠다.

 

“결코 설득될 수 없는 것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은 소용이 없다.”(조너선 스위프트)

“그가 속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보다 그를 속이는 일이 더 쉽다.”(마크 트웨인)

“신념이 확고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마음을 닫아버리고, 사실과 증거를 들이대면 출처를 의심하며, 논리로 호소하면 논점을 오해한다.”(리언 페스팅거)

“사람을 죽이거나 생포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능력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다.”(리처드 코언)

 

나는 ‘정치 이야기의 금기화’를 적극 지지한다. 친구들은 물론 가족 사이 대화에서도 아예 논쟁이 이뤄지지 않도록 화제를 돌리는 역할을 즐겨 한다.

입만 열면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해왔던 사람이 그런 대응을 해도 괜찮은가? 온 세상에 ‘설득’은 없고 ‘선동’만 흘러넘쳐도 좋단 말인가? 그건 반정치나 반지성주의 아닌가?

한동안 이런 의문이 나를 괴롭혔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기 위해선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정치적 주장을 강한 열정을 갖고 하는 걸 지켜보긴 쉽지 않았다. 내가 그간 높게 평가했던 사람의 지성과 이성, 도덕성마저 의심해야 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더욱 괴로운 건 역지사지의 결과였다. 나 역시 많은 사람에게 그런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옳지 않은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며, 그 누구일지라도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닌가?

 

열에 아홉은 생각이 같다. 생각이 다른 하나는 정치적 실천의 방법에 관한 것인데, 이 하나 때문에 아홉이 같은 사람들끼리 서로 싸워야만 하는가? 그런다고 해결이 되는가? 그 하나에 관한 생각은 서로 아예 모르는 척하는 방식으로 존중해주면 안 되는가? 각자의 생각과 기질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불거질 수밖에 없는 온갖 종류의 과도기적인 사건들이 집중돼 있는 이 시기는 그렇게 통과해나가는 게 슬기롭지 않을까? 그 누구도 미워하거나 경멸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노래하면 안 되겠는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